“30년 ‘길거리 정’으로 일궈갑니다”

평화뉴스
  • 입력 2004.05.15 09:5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구 시내 곳곳에 들어선 대형서점들 사이에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작은 서점이 하나 있다. 중앙시네마 옆 ‘대우서적’.
서점 주인 박순진(63)씨는 ‘대우할머니’로 불리며 30년 가까이 이 서점을 운영해왔다. 얼핏 특별한 게 없어 보이는 20평 남짓한 작은 서점이지만 이곳 대우서적은 할머니가 그동안 쌓아온 ‘길거리 정’으로 운영되고 있다.

서점 앞에서 노점상을 운영하는 부부와 요쿠르트 아줌마, 안경점 아저씨 등 동네 상인들에서부터, 몇 년째 단골손님인 젊은 회사원과 주부, 동네할머니.할아버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이곳에 들러 대우할머니를 찾는다. 아저씨들과는 야구 이야기도 신나게 하고, 주부들과는 아이들 이야기, 고부갈등의 고민 등 다양한 대화가 오간다. 동네 할아버지의 뜻밖에 연애담을 들어주는 것도 모두 대우할머니의 몫이다. 젊은이에게는 조언도 잊지 않는다.

달서구 송현동 40대 양모씨는 10년 가까이 대우할머니와 가족처럼 지내는 사이다. 양씨는 속상한 일이 있거나 기쁜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대우할머니를 찾는다.
“할머니는 한마디로 정이 많은 분이세요. 저는 이곳을 친정이라고 여기고 있어요. 할머니에게 와서 직장의 어려움이나 가정의 문제까지도 이야기합니다. 그러고 나면 정말 엄마를 대하는 것처럼 마음이 편해져요.”

친정같은 대우서적, ‘길거리 정’으로 운영...대우할머니, 서점 찾은 사람들 노력과 정성으로 대해

대우할머니는 사람들과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길거리 정’이라고 이야기한다. “남편과 자식을 매일 보긴 하지만 이렇게 서점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과 쌓은 정이 더 소중해요. ‘한이불 정보다 길거리 정이 더 좋다’는 말도 있잖아”라며 유쾌하게 웃으시는 할머니.

할머니의 ‘길거리 정’은 처음 서점을 찾는 손님들에게도 이어진다. 좋은 책을 스스럼없이 권해주기도 하고, 어떤 책을 잡고 물어도 내용과 감동을 술술 이야기해준다. 초등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모든 책을 다 읽을 수는 없어도 최소한 서론 정도는 읽어요. 그래야 사람들에게 어떤 책이 좋다고 이야기를 해줄 수 있죠. 나도 모르는 책을 팔 수는 없잖아요.”

할머니와 몇 번 대화를 나눠본 사람들이 할머니 특유의 정감있는 말투를 느끼고, 한 번, 두 번 서점을 찾다보면 결국 단골이 된다. 양씨처럼 십년 넘게 대우서적을 이용한 사람도 많다.


◇ 대구시내 중앙시네마 옆 대우서적. 대형서점들 사이에서 꿋꿋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할머니는 단골들에게 책값을 깎아주는 것은 물론, 그들의 취향도 관심있게 알아놓는다. 그리고 단골들이 어렵게 책을 구할 필요가 없도록 새로 나온 책을 미리 준비해준다. 몇 년 째 ‘노신’과 관련된 책을 찾는 할아버지가 있는가 하면, 시를 좋아하는 고객도 할머니가 따로 책을 골라줘 고마워한다.

손님이 찾는 책이 없으면 따로 주문을 해서 이틀안에 마련해주고, 몇 권이 되든 택배로도 배달해주는 것도 할머니만의 노하우. 서점이 오래 되다보니 간혹 절판돼 구하지 못하는 귀한 책을 이 서점에서 발견하는 사람도 있고, 찾지 못할 경우는 할머니가 수소문해 구해주기도 한다. 이러한 할머니의 노력과 정성이 입소문으로 퍼져 서점을 찾아오는 사람도 꽤 있다.

대형 서점 틈에서 작은 서점들 설 곳 없어...작지만 소중한 정 나누며 서점 계속 일궈갈 것

할머니는 얼마전 친하게 지내던 근처 서점이 대형 서점들 틈바구니에서 소리소문없이 문을 닫았다는 걸 알고 속이 많이 상했다.
“그동안 이 동네도 많이 변했어요. 처음 시작할 때는 근처에 10개 가까이 작은 서점이 죽 들어섰는데 이제는 거의다 사라지고 2개밖에 안 남았어요. 대형서점이 생기고부터 이곳을 찾는 사람들도 많이 줄었고, 젊은 사람은 이런 작은 서점에는 거의 오지않죠”

하지만 복잡한 대형서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대우할머니의 서점은 작지만 반갑다. 책 제목만 말해도 어디있는지 척척 짚어내는 대우할머니. “이렇게 쉽게 책을 구할 수 있는데 그동안 큰 서점에 가서 고생만 했다”며 기뻐하는 손님도 종종 있기에 그 모습을 보면 할머니도 뿌듯하다.

대우할머니의 ‘정’은 서점을 찾은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남몰래 꾸준히 소년소녀가장들에게 무료로 책을 보내주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도서관에서 신청한 책은 이윤을 남기지 않고 싸게 값을 매겨 배달해준다.
“나는 잘 배우지도 못했고, 아는 것도 없는 사람이예요. 비록 작은 서점이지만 이 가게가 있어서 남편과 아이들 뒷바리지를 할 수 있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저한테는 무엇보다 이곳이 더 소중하고 이렇게 만나는 사람들이 더 정겹습니다.”

혼자 손으로 30년동안 서점을 일궈온 대우할머니.
책을 쥐어주는 할머니의 손길에 이웃과 함께하는 ‘정’이 묻어난다.

글.사진 평화뉴스 배선희 기자 pnsun@pn.or.kr





---------------------------------------------------------

이 글은, 평화뉴스에 2004년 4월 22일 보도된 내용입니다.
(평화뉴스 http://www.pn.or.kr/)

저작권자 © 평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
지금 주목 받고 있어요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