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만원 세대, 우리 청춘들"

평화뉴스
  • 입력 2007.12.29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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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에세이] 이진이(방송작가)
"새 대통령은 그들에게 희망을 말할 기회를 주게 될까?"


2007년을 시작하는 재야의 종소리를 들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12월, 사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대학들도 2학기 수업을 마치고 긴 방학에 들어가게 된다. 이번 학기 동안 시나리오 창작 수업을 맡았었는데, 최종과제물로 단편영화 시놉시스를 내주었다. 20대 초반답게 재치있고 톡톡 튀는 소재와 이야기가 눈에 띄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놀라웠던 건 주인공들의 면면이었다.

학생들이 제출한 단편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20대 청년들이었다. 글은 글쓴이의 경험치의 바로미터나 다름없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그런데 하나같이 실업자에 백수이거나, 직업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비정규직을 전전하고 있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족과 부모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고, 미래에 대한 즐거운 계획이나 희망도 없었다. 사회나 세상에 대한 고민보다 자신에 대한 고민이 더 많았다. 하지만 그 고민이 결코 개인을 구원해주지도 못한다. 한마디로 빛이 보이지 않은 암담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청춘들이라고나 할까? 바로 그런 인물이 우리 학생들이 쓴 단편영화의 주인공들이었다.

학생들의 과제물을 하나하나 읽다보니 씁쓸함을 넘어서 슬퍼졌다. 어쩌다 우리의 청춘들이 이렇게 어두운 그늘 속에 갇혀있단 말인가? 월드컵 응원의 함성 속에서 열기에 가득차있던 그 홍조띤 얼굴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세간에 화제가 되고 있는 소위 ‘88만원세대’가 바로 나의 강의실에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서글픔과 자책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문득 나의 대학시절을 떠올려본다. 나 역시 대학시절에 이런저런 글을 많이 썼었다. 교내 방송국에서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서도 글을 썼었고, 외부 작품 콘테스트를 위해서도 방송원고를 여러편 썼었다. 그때 라디오 드라마를 몇 편 썼었는데, 주인공은 늘 운동권 대학생 아니면 공장 노동자, 광부, 농부였다. 때때로 먹물로 가득찬 룸펜도 주인공으로 등장한 적도 있다. 지식인 아니면 노동계급들이 주인공이었지만, 그래도 그때 내 글 속의 주인공들은 자주 희망을 얘기했던 것 같다. 억압된 현실 속에서도 뭔가 돌파구를 찾으려고 애쓰며, 자신의 삶에서 스스로가 주인공이 되기를 열망하는 이들이 많았던 걸로 기억된다. 언젠가는 군부독재도 끝내고, 권력의 칼날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 놓고 말하고, 신명나게 일할 날이 올 거라는 희망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면 공허하고 순진하다 싶지만, 그래도 그런 희망이 있었기에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고, 대통령을 마음대로 욕하는 시절이 온 것 아니겠나 싶다. 80년대에 청년기들을 보낸 이들은 다들 그랬던 것 같다. 그때 학생들이 쓴 습작품 속의 주인공들도 나의 주인공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소설도, 시도, 연극도, 영화도 그랬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어찌보면 행복한 시절을 보냈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완벽하게 행복한 청춘은 없다. 청춘은 언제나 번민 속에서 질척거리는 시기이다. 하지만 그 질척거림이야말로 청춘을 더욱 빛나게 하는 요소가 아니겠는가? 문제는 지금의 20대는 그 질척거림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마음이 참 아팠다.

어쩌면 그런 불안감과 슬픔이 우리 젊은이들의 보수화를 부추겼는지도 모르겠다. 유난스레 경제와 성공의 신화에 목을 매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겠는가? 누가 그들에게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할 권리를 빼앗아버린 것일까?

내년에도 학생들은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인물을 자신의 작품 속 주인공으로 등장시킬까? 아니면 그 반대급부로 대한민국 1%에 해당하는 성공신화의 주인공을 내세우진 않을까? 암담한 현실 속을 헤매는 ‘서글픈 청춘’ 아니면, 신자유주의의 열매를 거머쥔 ‘대단한 청춘’ 말이다. 그러고보면 학생들이 쓴 작품 속의 주인공들은 우리 사회의 초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은 것 같다.

17대 대통령선거가 끝났다. 대한민국 유권자는 경제를 살리겠다는 이에게 표를 몰아주었다. 어떤 경제를 살리겠다는 것인지 따져보지도 않고, 경제라는 말 한마디에 최면에 걸린 듯 표를 던졌다. 그 안에는 88만원세대라고 불리는 우리의 청춘들, 나의 강의실에서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수업을 듣던 학생들도 있을 것이다. 새 대통령은 그들에게 희망을 말할 기회를 주게 될까? 그렇게 된다면 천만다행이겠지만, 행여 다음 학기에 더 암담한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과제물을 받게될까 벌써부터 걱정이다. 부디 그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래보지만 말이다.

[주말 에세이 61]
이진이(대구MBC 방송작가)



(이 글은, 2007년 12월 21일 <평화뉴스>주요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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