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사람을 위한 종합전시’는 대구민예총에서 매년 일정한 직업군이나 장소, 삶의 양식 등 특정하게 분류된 일하는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후 사진과 르뽀, 미술, 체험 등 여러 장르의 협업으로 표현해내는 전시이다. 높은 미학적 성취보다는 민중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소박하고 수월한 표현방식을 선택하여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예술가의 생존조건, 사라져가는 직업군
2007년 일하는 사람을 위한 종합전시 ‘한 사진기수리공이야기-사라져가는 수공업자, 우리시대의 장인들’을 진행할 때였다. 당시 대구경북지역의 세공사, 배목수, 자전거수리공 등 소규모사업장의 열악한 수공업자들의 일과 삶을 여섯 명의 사진가와 르뽀작가가 함께 취재했었다. 수공업자들의 팍팍한 삶은 연민을 느끼기에 충분했으나 의외로 취재를 맡았던 사진가와 르뽀작가 역시 열악한 노동조건과 수익구조를 가진 채 사회보장제도의 바깥에 머물고 있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게 관심을 가지고 둘러보기 시작하니 주위에서 발견한 예술가들의 생존조건은 하나같이 비정규직 노동자의 생계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약속이나 한 듯 누구도 예술가들의 복지나 생계에 대한 문제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었고, 땀방울 값과 삶을 위한 권리는 논외로 치부되었다. 이대로 가다간 수공업자가 아니라 예술가들이 사라져가는 직업군이 되는 게 아닌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노동자의 권리도, 예술인의 존경도 허락되지 않는"
예술가는 사회통념상 여흥을 제공하는 사람처럼 여겨지며 은연중에 일하는 사람의 범주에 넣지 않는 추세가 강했다. 티브이에 출연하는 억대월급의 ‘연예인’들의 재능에는 환호로 화답하던 사람들은 월30만원에 미치지 못하는 수익으로 버텨내는 ‘딴따라’들의 치열하고 뜨거운 열정의 가치는 쉬이 인정하지 않는다. 작은 예술을 지향하는 이들에게는 노동자로써의 권리도 예술인으로써의 존경도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예술가들은 생계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한겨울에 왕따 당한 베짱이 마냥 개미떼의 주변을 빙빙 돌며 눈치를 살피는 주변인일 수밖에 없었다.
진짜노동자 '생계형 예술가'
매년 ‘일하는 사람’에 대한 전시를 한답시고 대상을 멀리에서만 찾았던 게 괜스레 미안했다. 결국 2008년의 일하는 사람을 위한 종합전시의 소재를 예술가, 아니 예술이라는 일을 하는 진짜노동자인 ‘생계형예술가’에게서 찾기로 마음을 굳혔다.
다섯 해를 예술단체에서 일 해온 필자는 ‘예술가’를 소재로 정하면 일을 진행하기가 수월할 줄 알았지만 국어사전에도 없는 ‘생계형예술가’라는 두루뭉술한 조건을 규정짓고, 구체화하는 일은 의외로 녹록치 않았다. 처음에는 생계유지가 어려워 예술 활동을 놓치 않되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 다른 직업을 찾은 세칭‘투잡예술가’들을 찾기 시작했다. 금새 조건에 맞는 여섯 사람을 찾을 수는 있었지만 여러 면에서 폭이 좁고, 할 수 있는 이야기가 한정지어지는 것 같아 만족스럽지 못했다.
결국 생태계를 탐사하듯이 시야를 넓혀서 접근하기 시작했다. 생계문제로 예술활동을 그만두거나 생활예술인으로 이행한 상황, 민중예술운동이나 동네예술운동을 시작한 사람들, 거리의 예술가나 가난한 예술가로 반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활동한 사람들 등, 예술가들의 생계와 예술세계는 파고들면 들수록 삶과 맞물려 돌아가는 모양새는 만만치 않게 복잡했다. 결국 기계적인 분류나 조건을 따져 들어서는 오히려 하고자하는 이야기를 다 할 수 없다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삶 속에 피어나는 예술, 민중들 삶이 곧 예술"
취재대상을 선정하기 위해 수차례의 회의를 거치면서 가장 치열하게 논의됐던 부분은 예술의 범주였다. 세속적 예술을 하는 사람이나 거리예술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라치면 그때마다 ‘에이, 그건 예술이 아니잖아.’, ‘그걸 예술이라고 할 수 있나?’라는 부정적인 대답들이 곧바로 돌아왔다.
예술론과 직업분류체계 사이에서 논의가 표류하고 있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민중예술, 민중문예운동을 지향한다는 민예총에서 조차 미학적 성취와 예술적 수준을 이렇게 높이 올려놓고 있으니 그동안 생계형예술가들의 소외감은 오죽했을까. 진작 그네들에게 눈을 돌리지 않은 사실을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가장 인기가 높은 장르 중에 하나인 타악 - ‘난타’로 더 잘 알려진 - 이나 풍물 역시 십 수년 전만해도 예술이 아니라 무지랭이들이 즐기는 놀이처럼 폄하되지 않았던가. 치열한 삶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 예술이고, 또한 민중들의 삶이 곧 예술이라는 생각으로 더 많은 예술가들을 만나고, 더 끈질기게 사람들을 설득해나갔다.
상쇠, 비-보이, 조형예술가, 가수, 각설이, 시인... 우여곡절 끝에 여섯 명의 생계형예술가가 정해졌다. 다양한 직업군에 적게는 스물네 살에서 많게는 여든 세 살까지, 생계를 위해 두 가지 직업을 병행하는 사람과 생활보호대상자가 되면서도 예술을 사수한 사람, 예술가라기보다는 사회운동가에 가까운 사람, 역에서 노숙을 하는 사람과 인적이 드문 산골에 자리 잡은 사람, 생계를 위해 ‘야매’로 예술행위를 배운 사람과 정석대로 예술을 전공한 사람. 다종다양한 생계형예술가들의 삶은 정리된 해답을 내놓는 것보다 사방으로 펼쳐놓는 문제제기가 더 잘 어울렸다.
예술과 생계, '예술밥 먹는 사람들'
취재를 하는 동안 사진가와 르뽀작가들도 혼란스럽고 지리한 고민과 논쟁, 질문에 시달으리라. 그들에게도 예술과 생계의 상관관계설정은 평생을 안고 살아가야 할 화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시장에 걸린 사진과 글을 통해 지금까지 알 수 없었던 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세계의 이면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예술가라는 편견을 걷으면 여러분과 같이 정직한 손으로 일하는 친구나 이웃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책의 주제를 ‘생계형예술가’라는 생경한 단어로 정한 데는 1980년대 대구의 민중화단을 대표하는 정하수 화백이 다시 미술계로 나오셨으면 하는 바람이 섞여있었음을 고백한다. 엄혹한 시대를 화폭에 담아내던 정하수 화백은 형식적인 민주화의 과정이 지나자 주류예술시장에 편입하지 못했다. 급기야 세상의 어지러운 변화는 손에서 붓을 앗아가고 말았다.
민중화가 정하수 선생...
그렇게 청도의 어느 골짜기로 들어간 지 십수 년째, 그의 손에는 붓과 조각칼이 아니라 양봉도구가 들려있다. 정하수 선생의 복귀를 목표로 전시를 준비하려했으나 그를 몇 번 만나고는 나의 판단이 섣부른 것임을 깨달았다. 미술작품 뿐만 아니라 ‘그림과 벌꿀’이라는 상표를 붙여 손수 채취한 꿀 역시 훌륭한 작품이었다. 정하수와 꿀벌이 함께하는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 중 하나라는 사실에 만족하여 다음을 기약해본다.
꽹가리 대신 바코드리더 든 상쇠
이어서 다른 한사람을 떠올린다. 10년이 넘게 대구지역 최고수준을 자랑하는 풍물굿패의 상쇠로 활약했던 그는 얼마 전 모든 활동을 그만두고 잠적해버렸다. 몇 달 뒤, 어느 편의점에서 꽹가리 대신 바코드리더를 든 그의 모습을 발견 했을 때 느낀 절망감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참담했다. 이렇게 자본주의의 메커니즘 밖으로 떠도는 순수예술인은 나날이 삶이 피폐해져 창작욕까지 사그라지곤 한다.
행사를 준비한 대구민예총은 그 높고 낮음이 있긴 하지만 생계형예술가들로 구성된 단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예술을 통한 세상의 변혁을 꿈꾸었으나 정작 우리의 삶을 돌보지 못하였다. 예술가들의 생계를 대변하고 문화복지를 챙겨야 할 문예단체 실무자로서 이번 작업은 방치되고 있는 지역예술인들의 처우를 돌보는 좋은 기회였다. 지금이라도 예술 활동을 열망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예술과 등질 수밖에 없었던 동무들에게, 힘겹게 생의 한 가운데를 돌파하는 이들을 돌아보며 아름다운 연대를 시작하고 싶다. 희망을 나누고 싶다.
[평화뉴스 문화현장 10] 글. 한상훈(대구 민예총 사무국장)
|
저작권자 © 평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