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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내 수첩의 변천사
이은정.."여백 없는 일상, 새해에는 더 잘 쉬고 잘 놀자"
2008년 12월 19일 (금) 14:38:24 평화뉴스 pnnews@pn.or.kr
   
▲ 직접 만든 새해 수첩...

연말이다. 나에게 연말의 가장 큰 행사는 새해 수첩을 만드는 일이다.
속지를 사서 일일이 달력을 그려넣고 백지를 넉넉히 끼워서 옛날식으로 끈을 묶으면 수첩 한권이 완성된다. 표지를 예쁘게 그려넣어 비닐을 입히고, 스티커 붙여가며 챙겨야할 기념일들을 죽 적어 넣으면 일 년 준비 다 한 것 같다. 뿌듯한 마음으로 빈 수첩을 연신 뒤적이면서 한 해를 살아갈 내 모습을 그려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백수생활 3년째로 접어들면서 세 권째 수첩을 들고 보니 수첩의 변천사가 꼭 나의 변화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처음 백수생활을 시작했을 땐 엄청난 백지를 끼워넣어 수첩이 책 한 권 두께가 되었다. 너무 지쳐있던 나는 쉬려고 직장까지 그만두었으면서도 늘 뭔가 해야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일정표엔 그날그날 해야할 일들이 빼곡히 적혀있고 백지에는 무슨 강의 기록이나 읽어야 할 책 제목이 가득 들어있었다.

언제나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나를 굴리려 했다. 배우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잠깐 주어지는 자투리 시간을 못참아 일기나 낙서를 적어놓기도 했다. 빈 시간이 있어선 안되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책을 잡고 있거나 생각을 기록해야 했다. 하다못해 이어폰을 끼고 음악이라도 듣든지... '백수 과로사 한다'는 말이 빈말은 아니었다.

두 번째 수첩에는 '제발 그냥 쉬어라' 하는 주문을 걸면서 수첩 젤 앞장에 이렇게 적어놓기도 했다. '천천히 걷기. 아무것도 하지 않기. 사소하고 하잘 것 없는 것 들여다보기. 입 다물고 귀 열기. 하늘 쳐다보기.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미소 짓기. 말없이 고개 끄덕이기. 별 일 없이 여기저기 싸돌아 댕기기.' 일정은 휴대폰에 저장해서 매번 점검하면서, 수첩은 지난 일을 기록하는 의미로 썼다. 할 일을 까먹을까봐 초조해하며 수첩 대신 휴대폰을 대구 들여다보게 되었지만, 수첩은 여전히 깨알같은 글씨로 빼곡하다.

   
▲ "수첩은 여전히 깨알같은 글씨로 빼곡하다"

'살처럼 흘러가는 시간에 나를 맡기고 세월의 바다에서 유영하자'고 늘 다짐을 두는데도, 사실은 '거 봐, 난 논 거 아니야, 바쁘게 살았잖아~' 하면서 나를 위로하려 한 것 같다. 경제도 어려운데 나 혼자 탱자탱자 노는게 찔리고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미안스럽기도 하고...

살아오면서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한 일이 참 많았다. 누가 억지로 못하게 한 것도 아닌데 하고 싶은 일을 못했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생각해보면 뭔가를 계속 하려했던 강박도 그 피해의식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닥치는대로 이것저것 찔끔찔끔 하다보니 욕구불만도 이제는 많이 해소된 것 같다.

새해에는 백수 3년차가 된다. 세 번째 수첩은 아예 만들지 않았다. 누군가가 전해준 그림수첩을 그대로 쓰려고 마음먹었다. 여백이 거의 없는, 틀에 박힌 수첩이지만 일년 내내 가지고 다니면서 수첩을 만든 이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받아들이려 한다.

'쉰다'의 반대말은 '움직인다'라 한다. '움직인다'에는 '논다'와 '일한다'가 있단다. '노는 것'과 '쉬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새해에는 더 잘 쉬고 더 잘 놀면서 내 안의 평화와 여유를 찾아가야지.

   

 

 

 

[주말 에세이] 이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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