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을 나눌 수 있는 기자" - 대구신문 최태욱 기자

평화뉴스
  • 입력 2004.08.08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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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신문의 꽃은 사회부, 그 중에서도 경찰서를 출입하는 사건담당기자라고 한다.

나는 기자생활을 한지 이제 갓 1년을 넘긴 새내기 사건담당기자다. 취재기자들 사이에서는 ‘사건 복(?)이 많은 기자’란 말이 있다. 유난히 대형사건이나 사고가 많이 생기는 출입처만 담당하게 되는 기자에게 농담처럼 던지는 말로 대구신문에서는 내가 바로 사건 복이 많은 기자다.

나는 수백명의 사상자를 낸 대구지하철참사로 시끄러웠던 지난해 4월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첫 출입처로 대구 중부경찰서를 배정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정집에 권총을 든 강도가 침입해 집주인에게 총을 쏘고 달아난 사건이 발생했다. 가정집에 권총을 든 강도가 침입한 것은 지역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큰 사건이라 당시 전 언론의 이목이 집중됐다.
한 달 뒤에는 대구시 수성구 사월동 경부선 철로에서 부산으로 향하던 무궁화 열차가 정차중인 화물열차를 들이받아 승객 2명이 숨지고 99명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또 지난해 10월 봉화 관광버스 추락사고와, 12월 10여명의 생명을 앗아간 청도 버섯농장 화재 사건 현장에도 나는 뛰어가야 했다.

사건기자는 굵직굵직한 사건이 생기면 곧장 사건현장으로 뛰어가야 된다.
사고 수습에 정신이 없는 경찰과 구조대원들을 붙잡고 취재를 해야 되고 밤을 새울 때도 많다. 사건사고 뒤에 숨겨져 있는 뒷얘기를 취재하려다 보면 가족을 잃어버린 아픔에 이성을 잃은 유족들의 말문을 열어야한다.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나 ‘평상시 어떤 사람이었는지’ 등을 질문하다보면 ‘참 못할 짓’이란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기왕이면 더욱 가슴 아픈 얘기를 들어야 한다.

처음에는 유족들의 오열하는 모습에 말문을 쉽게 열지 못했지만 이젠 너무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지는 내 모습에 ‘감정이 메말라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다. 참사를 당한 유족들과의 인터뷰를 자주 하다보니 ‘유족인터뷰 담당기자’란 말을 듣고 꼭 능력을 인정받은 것처럼 좋아하기도 했다.

매일 아침 경찰서에서 전날 발생한 사건사고를 체크하며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형사들이 갖은 고생 끝에 검거한 범인이나 밤새 발생한 사건사고를 챙기면서 의심이 되는 것을 꼼꼼하게 확인하는 것이 경찰출입기자들이 할 일이다. 하지만 경찰출입기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기자용 보고서에는 나와 있지 않은 발생사건을 알아내는 것이다. 범죄는 발생했지만 범인은 잡지 못했기 때문에 언론에 보도되면 경찰이 곤욕스러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때문에 경찰은 숨기려하고 그것을 알아내는 것은 경찰출입기자의 능력이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단순히 기사거리로 보기 전에 그들과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기자가 되고 싶다"

굳이 독자들이 궁금해 하지 않는 강도.절도사건이나 굳이 보도하지 않아도 되는 자살.성폭행사건을 다른 출입 기자들이 알지 못하면 유능한 사건기자가 된 듯한 착각 속에 크게 다룬 적도 있다. 비판기사를 많이 쓰는 것이 유능한 기자란 착각 속에 지면을 낭비한 것이다.

언제부턴가 경찰차가 급히 지나가는 것을 보면 당연한 듯이 따라간다.
이런 방법으로 강도.절도 발생현장을 잡는(?) 성과를 거둔 적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엔 약혼녀와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 찾은 울릉도에서 경찰차 2대가 여객선 터미널로 가는 것을 봤다. 순간 나도 모르게 ‘뭔가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두 대가 잇따라 가는 걸 보면 순찰은 아닌 것 같은데... 폭력사건인가?’ 그렇게 밤바다를 바라보며 데이트를 하면서도 머릿속에서는 궁금증이 사라지질 않았다. 결국 애인 몰래 울릉경찰서 당직실에 전화를 걸어 50대 관광객 한명이 목숨을 끊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숙소로 향했다. ‘왜 울릉도에까지 관광을 와서 자살이란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을까’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냥 타살 가능성이 없고 유서가 발견돼 자살이 확실하다는 것만 확인하면 더 이상의 궁금증은 사라진다.

요즘은 어지간한 사건은 경찰 보고서만 보고 기사를 작성한다.
사건기자에겐 필요 없는 잔꾀나 요령이 늘어나고 엉덩이가 무거워졌기 때문이다. 늘 ‘왜?’란 의문을 갖고 모든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고 조금이라도 의문이 생기면 반드시 사실을 확인해야 하는 것을 잘 알면서도 대충 넘어갈 때도 많다.
사건기자가 천직처럼 보이는 한 선배가 언제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건기자는 불이 꺼지고 난 뒤에라도 화재현장에 뛰어가서 탄내를 맡아야 하고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현장에 가서 피냄새라도 맡아야한다.” 그만큼 발로 뛰어야만 현장감 넘치는 살아있는 보도를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난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기자란 명함을 내밀며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참기자의 모습은 기자생활 10년차 20년차가 되는 미래가 아니라 짧았던 수습기자 시절이 아닐까”란 생각.

사건사고 특종보다는 우리 이웃들의 아름답고 소박한 얘기, 사람 냄새와 정이 묻어 있는 맛있는 기사를 많이 쓰는 기자가 되고 싶다. 다른 사람의 희생이나 불행을 단순히 기사거리로 보기 전에 그들과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기자가 되고 싶다.

오늘도 기사에 들어가는 단어하나, 제대로 된 기자의식으로 고민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진정한 언론 선배들을 닮기 위해 초심을 잃지 않는 기자가 되고 싶다.

대구신문 최태욱 기자(choi@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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