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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운동, 치열한 내면의 노력이 필요하다” - 조근래
“유배지 같은 지방중소도시 활동가...스스로 견딜 수 있는 소요유 방안 찾아야”
2004년 09월 23일 (목) 10:02:39 평화뉴스 pnnews@pn.or.kr
며칠 전 울진 후포중학교 김재욱 선생으로부터 오래된 클래식 LP 음반 32장을 선물로 받았다. 80년대에 4천원 하던 라이센스 음반도 아니고, 값이 비싸 살 생각을 포기했던 수입 음반이다.
아바도가 1970년에 지휘한 그의 첫 번째 브람스 교향곡 전집엔 베를린 필과 함께 연주한 교향곡 2번이 들어 있는데, 마침 구하고 있었으나 클래식 음반복각 호사가들이 가장 많은 일본 수입목록에서도 찾지 못했던 음반이어서 더욱 고마웠다.

한편으로는 김 선생이 지금, 농촌 학교에서의 생태적 삶을 소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방중소도시가 주는 고립감과 내면의 적적함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내 멋대로의 공감도 들었다.
나와 비슷한 나이의 김 선생은 포항환경운동연합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구미에 재직할 땐 구미경실련에서 추진해 시행하고 있는 수돗물불소화를 걱정하면서 반박자료를 꼼꼼하게 챙겨줬던 분이다.

시대를 앞서나가는 의식과 자발적 열의를 수용해주지 못하는 지방중소도시가 주는 지역적 고립감, 특히 소통의 범위가 극히 제한적인데 따른 인간관계의 취약함이 주는 적적함은 지방중소도시 활동가들이 공통으로 안고 있는 내면의 문제이다. 사람이 없다는 비관적 느낌,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사람이 그립다는 적적한 정서를 늘 안고 활동해야하는 지방중소도시, 활동가들에게 지방중소도시는 일종의 유배지이다.

"지방중소도시 활동가들은 유배지 생활을 한다?"

작년 8월, 첫 도시형 대안중고등학교인 ‘이우(以友)학교’의 9월 개교를 앞둔 축하모임이 성남시 분당구 학교 앞 기와집에서 열렸다. ‘벗과 함께’라는 뜻의 이름에서 풍기는 인상대로 신영복 선생으로부터 이름과 휘호를 받았다고 한다. 정광필 교장과 함께 노동운동을 했던 전국 각지의 동지들이 10년 만에 처음으로 모인 것이다. 악수보다 서로의 가슴으로 인사를 나누는 사람이 눈에 띌 정도로 너무나 반가운 자리였다.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의 리더였던 현 주대환 민노당 정책위원장을 비롯해 황광우 민노당 초대 정치연수원장, 현 조승수 민노당 의원 외에 꼭 보고 싶었던 동지들도 10년 만에 만났다. 당시 민노당 사무총장이었던 노회찬 의원은 당내 분파모임을 도모한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불참했다고 한다. 이날 모임을 ‘인민노련 동창회’라고 이름을 짓고, 1년에 한번씩 모이자고 했다. 수도권에 살거나 같은 학교 출신인 동지들은 가끔씩 교류를 한다지만, 대학교도 다니지 않은 데다 지방중소도시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몹시도 기다리고 있는데 올 들어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인민노련은 내 인생의 대학교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있어선 가장 기다려지는 모임이다.

이처럼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옛 동지들이 몹시도 그리움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단절하며 지낸 세월이 10년이다. 세상을 보는 눈이 뚜렷하게 각자 주관화되면서, 만나더라도 특별한 얘기가 없을 것이란 느낌이 단절의 이유로서 컸다고 본다. 세상이 만만하지 않다는, 같은 하늘 아래 그리 특별한 게 없을 것이라는, 존재에 대한 깨달음도 단절의 큰 이유였다. 무엇보다 각자의 빠듯한 처지를 너무나 잘 아는 마당에, 일부 동지들이 갖고 있는 나에 대한 경제적 후원이라는 부담을 주기 싫었던 게 단절의 가장 큰 이유였다. 작년 여름 두 달을 사이에 두고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을 때도, 시간적 부담을 주기 싫어 아무 동지에게도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정으로 굳혀진 지방중소도시 활동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회원 증가가 활동력의 성장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외지인 80% 공단도시여서 정주의식이 매우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회비 전액의존 운영’ 방침을 포기하거나, 기준 없이 회원을 늘려서도 안 된다. 이것저것 기준을 다 따지면, 남는 사람은 활동가와 소수 지지자뿐인 게 지방중소도시의 현실이다. 10년 홀로 상근을 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다.

어렵게 활동하고 있는 지역 활동가들 간의 의사소통의 불화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구미경실련의 분수도시 만들기 성공사례에 대해 부르주아 시민운동이라고 비난하는 일부 활동가들과의 소통의 불화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곁눈을 팔지 않고 오직 실력을 키우기 위한 노력과 성실함으로 무장해 약자층 중심의 시민들의 요구를 중심으로 홀로 일로 매진하는 길 밖에 없다.

이러한 환경을 뒤돌아보면, 지속적인 노력과 성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직접 동참은 좀체 늘지 않고, 소통의 불화 때문에 가장 가까이에서 동고동락해야 할 사람마저 없는, 역시 지방중소도시는 유배지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스스로 견뎌낼 수 있는 각자 나름의 소요유(逍遙遊) 방안을 마련해야"

낙후한 변경지방 근대화운동으로서의 성격도 일부 갖는 중국공산당의 지식인 하방운동이나, 80년대 학생운동가들의 지방노동운동 진출을 오늘의 우리가 기대할 순 없다. 그래서 나는, 하루빨리 지방의원 유급제도가 도입돼 중소지방도시가 고향인 활동가 출신 각계 사람들이 대거 지방으로 이전하는 날을 학수 고대한다.

그렇게 좀더 좋은 날이 올 때까지 지방중소도시 활동가들은, 적적함을 스스로 견뎌낼 수 있는 각자 나름의 소요유(逍遙遊)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네트워크로부터 해방되고 자가발전 능력도 뛰어난, 자기만의 취향을 개발해 자유롭게 노닐 수 있는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대부분의 저술이 18년 강진 유배생활에서 완성된 사례는, 그의 위대함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대목이다. 동경에서 대학교를 다닌 후, 공무원으로 취직해 지방에서 생활하는 게 일본의 젊은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경향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UN에서도 30만명 규모의 도시가 여러 가지 면에서 가장 적합한 규모라고 발표한 적이 있다. 인적자원 문제만 어느 정도라도 해소되면 지방중소도시도 가능성이 있다.

어렵고 재미없는 알튀세르 전문연구자이면서 마르크스주의 학자인 윤소영 교수가, 좌파 음악학자들의 글을 모아 ‘베토벤-윤리적 미 또는 승화된 에로스’라는 의외의 책을 펴낸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1997년의 일이다. 이 책엔 “건강한 주거, 훌륭한 식사, 2세의 교육, 노후의 보장이 그런 것처럼, 베토벤 역시 투쟁해서 획득해야 하는 것이다. 음악에서 가장 긴급한 임무는 전문가 운동으로, 음악의 문맹을 절멸시켜 고전음악가의 가장 복잡한 음악까지도 인민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한스 아이슬러)”라는 말이 실렸다. 각자의 소요유 방안 만들기 역시, 치열한 내면의 노력을 통해 마련해야 할 것이다.

조근래(구미경실련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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