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할머니의 "통일 바라기 60년"

평화뉴스
  • 입력 2004.03.02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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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민련 대구경북연합 한기명 의장...
"나는 통일밖에 모르는 사람이야"

범민련 대구경북연합 한기명 의장 [사진 평화뉴스 배선희 기자]
범민련 대구경북연합 한기명 의장 [사진 평화뉴스 배선희 기자]

60년동안 한 가지 일만 기다려온 사람이 있다.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본부 대구경북연합의 한기명 의장. 올해 76세의 고령이지만 통일에 대한 열의는 누구못지 않다. 3월 1일 이라크 파병반대와 친일파 규탄 대회에 참석한 한기명 의장을 대구 동성로 작은 찻집에서 만났다.

“일제시대, 민족분단 직접 겪어...통일은 당연한 일”

‘통일에 어떻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냐’는 물음에 한기명 의장은 “일제시대와 민족 분단을 직접 격은 사람으로 당연한 것”이라고 말한다. 분단 이후 태어난 사람들에게 분단이 당연한 것이지만 반대로 분단 이전부터 살아온 사람들에게 통일은 당연한 과제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당연한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의 삶은 역경의 연속이었다.

일제말기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시절, 여자들이 정신대로 끌려가는 모습이나 농민수탈 등 일제의 만행을 그대로 보며 자랐다. 또한 만주에서의 무장 독립투쟁의 소식을 접하며 작게나마 민족의식을 키워갔다. 여고 3학년 해방 후, 진보적 학생들이 모인 ‘민주학생연맹’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민족 통일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6.25가 터지고 좌익 세력으로 낙인찍혀 서대문형무소를 시작으로 대전형무소, 부산형무소, 마산형무소를 거치면서 여자의 몸으로 견디기 힘든 모진 고문을 받았다. 왼쪽 팔은 아예 쓸 수가 없었고 허리도 펴지 못할 정도였다고. 손등에는 아직도 상처가 남아있다.

5년 가까이, 옥고를 치르고 겨우 병보석으로 풀려나 고향인 서울로 돌아왔지만 서울에서의 생활도 계속되는 감시의 눈길로 힘든 나날이 계속되었다.
이후 통일의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을 만나 대구로 시집을 왔지만 시어머니와 시동생, 시누이까지 수발하며 단칸방에서 생활고를 겪어야 했다. 거기다 박정희 정권 때 사상 탄압으로 잡혀들어간 남편의 10년 옥바라지까지, 그동안 안 해본 장사가 없을 정도로 힘든 생활을 보냈다. 하지만 그런 고난도 통일에 대한 마음을 꺾을 수는 없었다.

“6.15남북공동선언이 최고의 보람...나는 오직 통일만 바랄 뿐”

군사정권의 가혹한 시기가 지나고 ’87년 6월 항쟁이후, 그동안 가슴속에 숨겨놓아야만 했던 통일의 염원을 대구에서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89년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청년들의 부모를 후원해주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활동, ’91년 범민족 대회에 참여 이후 ’93년 양심수 후원회를 조직하고 범민련 대구경북연합 결성을 준비했다.

그리고 ’95년. 범민련남측본부대구경북연합이 결성되었지만, 본격적으로 뜻을 펴기도 전에 팩스로 북측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28명의 회원들과 함께 새벽에 체포됐다. 당시 일흔의 나이로 투옥되어 겨울의 혹한을 또다시 감옥에서 보내면서 건강이 많이 상했지만 통일에 대한 열의는 더욱더 불타올랐다.

마침내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자 한기명 의장이 그동안 겪었던 고통은 눈녹듯 녹았다. “통일운동을 하면서 6.15공동선언 때 가장 보람을 느꼈다. 그동안의 동지들과 함께 했던 옥고와 고통의 시련이 여기에 기여를 했다고 생각하면 자부심을 느낀다.”라며 그때를 회상하는 한기명 의장.


◇ 작년 12월 이라크 파병 반대 단식 투쟁 중 쓰러져 입원한 한기명 의장 [사진 통일뉴스 김규종 기자]

작년 11월에는 금강산도 다녀와, 초등학교 6학년때 평양을 갔다온 이후 처음으로 북한땅을 밟았다. 또한 12월에는 이라크 파병 반대를 위한 국회 앞 단식투쟁에 7일동안 참여하다 쓰러져 주위를 안타깝게 했지만 그 의지만큼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 이번 국회의원 총선 역시 당을 떠나서 6.15 공동선언을 지지하는 후보를 뽑을 것이라고.

“내가 무언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나는 통일만을 바란다. 설령 내가 통일을 못 본다고 해도 거기에 얼마만큼 기여했나가 더 중요하다.”

“60년도 기다렸는데...”

오직 통일만을 바라는 고령의 할머니에게는 지금 작은 걱정이 하나 있다. 요즘 젊은이들이 통일에 대해 방관과 무관심으로 가득하기 때문.

“젊은이들은 단순히 통일은 하면 좋은 것일 뿐, 그 필요성은 못 느낀다. 결국 우리 역사를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이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좀더 잘했으면 이미 통일이 됐을텐데, 후손들에게 짐을 지워주는 것 같아 미안함 마음이다”라고 하며 “지금의 젊은이는 지식도 풍부하고 재능도 다양하다. 이것을 살려서 젊은이들이 열심히 해주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여러번의 옥고로 쇠약해져 요즘은 말하는 것조차 힘들지만 아픈 몸도 마다않고 평생을 한 길만 달려온 한기명 의장. ‘통일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라는 조심스런 물음에 그는 “60년도 기다렸는데 그 이상을 못 기다릴까!”라며 환하게 웃는다.

지난 ’85년에 병으로 남편을 보내고, 변변히 준 것 없는 네 딸도 잘 성장해 모두 출가한 상태. 지금은 한기명 의장 혼자 영세민 아파트에 살고 있다. 집회나 회의가 있을 때마다 성서에서 시내까지 버스로 1시간을 걸려 오가지만 자신의 건강이나 휴식보다는 조국의 평화와 통일에 대한 일이 우선이다.

한 가지만 소망하며 평생을 살아온 긴 여정.
그 여정의 끝이 통일의 기쁨으로 채워지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글 평화뉴스 배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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