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 '항일·통일 헌신' 한기명 범민련 의장...조국 통일 못보시고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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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년 94세...18일 숙환으로 영면, 전국 '시민·사회장'
10대부터 민족운동, 민주·통일운동...투옥·고문 고초
20일 대구 추모의 밤...경기 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 안장
"통일 조국 일념에 사셨는데...우리가 꿈 이뤄야"


한평생 통일운동에 헌신한 한기명(94) 범민련 명예의장이 향년 94세로 별세했다. 
 
대구경북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대표 임성종)는 19일 "한기명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대구경북연합 명예의장이 지난 18일 일요일 오후 3시 35분 숙환(宿患)으로 우리의 곁을 떠나셨다"고 밝혔다. 
 

한기명 범민련 대경엽한 명예의장이 생전 집회에서 발언하는 모습(2012.9.13.대구경찰청 앞)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한기명 범민련 대경엽한 명예의장이 생전 집회에서 발언하는 모습(2012.9.13.대구경찰청 앞)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일제의 만행에 분노한 10대 소녀는 '민족운동'에 첫발을 들였다. 

고(故) 한기명 의장은 1929년 9월 12일 서울 창신동에서 2남 3녀의 막내 딸로 태어났다. 1935년 동대문여자심상소학교에 입학해 1941년 계성여자소학교에 입학해 1941년 졸업했다. 1942년 동덕여자고등학교에 수석 입학해,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는 여성들과 농민 수탈 광경을 보며 일제의 만행에 분노했고 같은 해 민주학생연명에 가입해 처음으로 민족운동을 시작했다. 

1948년 '2.7구국투쟁', '5.10단정단선반대투쟁' 동덕여고 대표로 동맹휴학을 주도했다가 유치장에 수감됐다. 학교를 자퇴해 학생운동을 조직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조선노동당' 서울 동대문구역당 선전부 활동을 하다가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하고, 서대문형무소 등에서 3년 수감됐다. 

출소 이후 본격적으로 통일운동에 뛰어들었다. 

운동 중 고(故) 이형락 선생과 만나 1956년 결혼해 대구에서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남편인 이형락 선생이 박정희 정권 당시 '남조선해방전략당 간첩조작 사건'에 휘말려 10년간 복역하자, 고인은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며 서문시장에서 장사를 해 생계를 책임졌다. 남편은 고문 후유증으로 1985년 숨졌다. '남조선해방전략당' 조작사건에 연루된 고인 4명은 2011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    

남편이 돌아가신 이후 한 의장은 1986년 막내 딸 이단아씨가 노동운동 중 수배되자 대구민주화운동가족협의회 활동을 시작했다. 1994년 대구경북지역양심수후원회 공동대표, 1995년 범민련 초대 부의장을 맡았다. 범민련을 결성을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그해 11월 구속돼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여러 난관을 맞았지만 통일운동 뿐 아니라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에도 목소리를 냈다.    

국보법 폐지, 주한미군장갑차 고(故) 신효순·심민선 살인사건 진상규명, 이라크 파병 반대, 한미 FTA 저지, 4대강사업 저지, 국정원 대선 개입 규탄, 세월호 진상규명, 사드 반대, 영남대의료원노조 정상화, 박근혜 퇴진 운동을 펼쳤다.  
 

"강제징용 사죄 않고 경제보복 협박하는 파렴치한 일본, 아베 정권 강력 규탄한다"...한기명 의장이 대구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시위 중이다.(2019.7.9)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강제징용 사죄 않고 경제보복 협박하는 파렴치한 일본, 아베 정권 강력 규탄한다"...한기명 의장이 대구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시위 중이다.(2019.7.9)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앞서 20여년간 전 범민련 대구경북 의장(2000년), 2016년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대구경북본부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현재 범민련 명예회장과 한국진보연대 고문을 포함해 대구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고문, 대구촛불행동 고문 등을 맡고 있는 '민주화운동원로회' 회원이다. 기자회견, 집회 현장에 늘 참석했지만 몇년사이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활동을 하지 못했다.  

최근 윤석열 정부 들어 남북 관계가 경색되면서 통일운동이 어려워지자, 괴로운 심정을 나타낸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이 최근 대남(對南) 기구를 정리하면서 국내 통일운동 단체들도 해산, 해체 등 위기에 빠졌다. 고인은 숨지기 일주일 전부터 곡기를 끊고 병상에서 통일운동을 역설했다. 하지만 범민련 남측본부가 해산을 결정(2.17)한 다음날 끝내 통일 조국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영면에 들었다.    

장례 실무를 맡은 임성종 대구경북열사추모연대 대표는 "한기명 의장은 평생을 통일운동에 몸 바쳤다"며 "오로지 통일 조국을 본다는 일념으로 사셨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최근 남북 관계 경색과 통일운동 단체들 해산 소식 등 통일운동의 암담한 현실에 큰 좌절감을 느끼셨다"면서 "남은 우리가 고인이 못다 이룬 통일의 꿈을 반드시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고인의 장례는 전국 단위의 '시민·사회장(葬)'으로 치러진다. 빈소는 대구전문장례식장 신관에 차려졌다. 오는 20일 오후 7시 빈소에서 '추모의 밤'을 통해 추모공연과 추모사를 낭독한다. 오는 21일 대구 명복공원에서 화장하고 같은 날 남편 이형락 선생이 안장된 경기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나란히 잠든다. 

자세한 위치와 연락처는 이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故) 한기명 의장 '시민·사회장' 웹자보 / 사진.대구경북열사추모연대
고(故) 한기명 의장 '시민·사회장' 웹자보 / 사진.대구경북열사추모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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