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져가는 새벽 인력시장 모닥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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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비산 인력시장> 일주일 내내 '헛탕' 일쑤..."봄 되면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막막"

오전 6시쯤의 새벽 인력시장...일거리를 구하지 못한 일용직 노동자들이 모닥불을 쬐며 인력회사 차량을 기다리고 있다(2009.4.15 대구 북비산네거리 인근 / 사진.남승렬 기자)
오전 6시쯤의 새벽 인력시장...일거리를 구하지 못한 일용직 노동자들이 모닥불을 쬐며 인력회사 차량을 기다리고 있다(2009.4.15 대구 북비산네거리 인근 / 사진.남승렬 기자)

"일주일에 한 번 나갈동말동한데...IMF때보다 더 해. 10일째 아무 일도 못해 큰일 났구만"

15일 새벽, 대구시 서구 비산동 북비산네거리에서 만난 박모(64.남)씨는 애써 웃음을 보이며 말했지만 씁쓸함을 감추지는 못했다. 40년 가까이 일용직 노동자로 일해 '노가다 판'에서 잔뼈가 굵다는 박씨는 "이 곳 인력시장을 통해 하루에 일 나가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라면서 "많이 나가는 사람이 한 달에 이레, 못 나가는 사람은 고작 이틀 뿐"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박씨의 말에 새벽부터 인력시장에 나온 사람들의 고단한 삶의 풍경이 그려졌다.

헛탕 헛탕...일감 없어 발길도 줄어

날품팔이 일용직 노동자들의 희망인 '새벽 인력시장'이 무너지고 있다. 계속되는 경기침체에 따른 불황으로 일자리 자체가 줄어들어 인력시장을 찾는 일용직 노동자의 수도 크게 줄었다. 그러나 전체 일용직 노동자 수가 줄어든 것은 아니다. 대구지역 대표적 '새벽 인력시장'인 북비산네거리에는 한 때 100명 넘는 사람들이 모닥불을 쬐며 일거리를 구했지만 최근에는 노동자들의 발길이 뜸하다.

15일 새벽 5시 20분쯤 이 곳을 찾은 노동자는 20여명에 불과했다. 나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50~60대. 한 노동자는 "대부분 수 십년 동안 건설현장에서 일해 온 사람들이지만, 최근에는 실직한 30대들도 종종 있다"고 전했다.

이들은 '허드렛 일'이라도 구하기 위해 매일 새벽 5시쯤부터 이 곳에 나와 모닥불을 지핀 채 인력회사 차량을 기다린다. '공구리' 일을 구하러 나왔다는 장모(59.남)씨는 "요즘은 '잡부'들이 적게 나오는 편"이라면서 "그러나 (일용직 노동자가) 실제로 준 것은 아니고, 여기(인력시장) 나와도 일감이 없으니 헛탕 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오지 않기 때문에 잡부가 준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운 좋아야 집 청소 허드렛 일이라도...

20분쯤 흐르자, 사람들은 30여명으로 늘어났다. 채 가시지 않은 어둠 속에 노동자 2명이 나무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작업용 옷가지를 넣은 것으로 보이는 낡은 배낭을 멘 그들은 60대 일용직 노동자였다. 그들 중 줄담배를 피우던 한 노동자는 "나이가 든 우리 같은 이는 쓰지도 않는다"면서 "고작 구하는 일거리라곤 이사한 집 청소해 주는 허드렛 일 정도"라고 했다. 그는 "집 청소작업 하루 일당은 5만원"이라면서 "이 일도 그나마 운이 좋아야 구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젊은 기자 양반, 우린 새벽에 떨면서 일감 구하는데 공짜로 취재 하려고 카면 되능교. 해장집으로 데리고 가 막걸리 사주면서 해야지. 잡일 찾기도 힘든 세상, 공짜가 어디 있노"

어떤 일거리를 구하느냐는 질문에,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노동자가 농담조로 말했다. 그는 "여기 나온 사람 중에 그나마 내가 젊은 축에 들어간다"면서 "여기 영감들은 나이가 많아 쓸려고 하는 데가 없어 매일 헛탕치기 일쑤"라고 했다.

재수 좋아 한달 '공구리'쳐도...

오전 7시..."일거리는 오늘도 없다"
오전 7시..."일거리는 오늘도 없다"

운이 좋아 '공구리' 치는 일이라도 건지면 하루일당 12만원이 노동자에게 건네진다고 한다. 그러나 인력사무소에 소개비 주고 차비 떼면 수중에 들어오는 돈은 6~7만원 정도다. 그나마 공구리 일은 일당이 높다고 한다. 집안 청소와 밭일 등 허드렛 일은 4~5만원 정도다. 신모(60.남)씨는 "재수가 좋아 한 달에 열흘 공구리 쳐도 70만원을 채 벌지 못한다"면서 "일거리가 없는 요즘, 한달벌이는 고작 40만원 정도"라고 푸념했다.

일주일째 일감을 구하지 못했다는 임원식(66.남)씨는 "경기가 워낙 얼어붙어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것은 엄두도 못낸다"면서 "봄이 되면 그나마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날씨가 따뜻해져도 고작 구하는 일이라 해봤자 이사짐 나르기, 밭일 정도"라고 말했다. 임씨는 "그 일도 없어 못하는 형편"이라고 덧붙였다.

오전 6시. 그 때까지 노동자를 현장으로 태우러 갈 승합차는 1대도 오지 않았다. 인력시장에 모인 노동자도 더 이상은 늘어나지 않았다. 기다리기 지쳤을까. 오늘도 헛탕칠 것 같다는 초조함 때문일까. 노동자들은 줄담배와 함께 농담이 섞인 험한 말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공친 하루...겨울처럼 추운 봄날

한 노동자는 "제기랄, 봄날이지만 마음은 겨울처럼 춥다"며 어디에선가 낡은 목재합판을 가져와 약해진 불길을 살린다. 노동자 가운데 일부가 "오늘도 공쳤다"면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대포나 한잔하자"며 근처 술집으로 들어가자, 타박하는 소리가 들렸다. "장씨, 아침부터 뭔 술인교. 밥값은 해야지. 조금 더 기다려 보고 가이소"

오전 7시가 넘어 출근시간이 되자 북비산네거리는 사람들로 붐빈다. 새벽 한기를 녹여준 모닥불도 거의 꺼져 잔불만 남아 있다. 곳곳에 버려진 담배꽁초를 환경미화원이 쓸어 담는다.

30명 중에 1명..."요즘처럼 어려웠던 시절 없어"

2시간여 만에 끝난 새벽 인력시장. 하지만 사람들은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한다. 결국 이날 일감을 구한 사람은 일당 7만원에 정화조 설치 작업을 하러 간 1명 뿐이다. "내일 역시 일거리 있을 것이라는 기약도 없고", "그러게. 기약 없이 매일 나올 수도 없는 노릇이고...", "술이나 한 잔 하지"...헛탕 친 하루, 곳곳에서 푸념이 들려왔다.

새벽 5시에 나왔다는 김장섭(64.남)씨는 "서른 명이 넘는 사람 중에 한 명만 일감 구하는 낭패는 더 이상 놀랍지도 않다"면서 "요즘처럼 일거리 구하기가 어려웠던 시절은 없었던 것 같다"고 말하며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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