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송정 푸른 솔, 백두산, 압록강 넘어 북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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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유적 만주기행> 서전대야 윤동주생가 청산리 천지 두만강... 6월 30일까지 신청


"일송정 푸른 솔은 홀로 늙어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일송정'은 중국 용정에 망명했던 민족운동가들이 자주 올랐던 비암산 위에 세워진 정자를 말한다.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의 이 노래는 용정을 배경으로 한 독립운동가를 노래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특히, 이 노래의 실제 인물로 알려진 일송 김동삼(1878-1937) 선생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국내에서 애국계몽운동을 하다 서간도로 망명해 이시영.이동녕.이상룡 선생과 함께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독립군의 맹장이다.

일송정과 해란강, 그리고 윤동주 생가를 비롯해 항일독립운동의 얼이 서린 만주(북간도) 기행이 대구에서 시작된다.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는 오는 7월 23일부터 30일까지 7박8일 일정으로 <2009항일유적과 함께 하는 만주기행 - "만주에서 부르는 고향의 노래">를 마련했다. 만주 일대를 5번 다녀 온 이 단체 정경호 대표(영남신학대 교수)가 안내하며, 6월 30일까지 선착순 30명을 신청받는다. 항공편으로 오가며 2성급호텔에서 묵는다. 

"만주에서 부르는 고향의 노래"라는 주제는 윤동주 시인이 1936년에 지은 '고향집'에서 따왔다.

헌 짚신짝 끄을고 / 나 여기 왜 왔노 / 두만강 건너서 / 쓸쓸한 이 땅에
남쪽 하늘 저 밑에 / 따뜻한 내 고향 / 내 어머니 계신 곳 / 그리운 고향 집
(1936.1.6 윤동주 '고향집')


이번 만주 기행은 '항일독립운동을 평화.통일'로 이어가려는 의지가 담겨있다.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김두현 사무처장은 "민족 분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근대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며 "일제에 대한 저항과 민족에 대한 삶과 사랑이 묻어있는 만주, 그리고 북녘이 보이는 압록강과 백두산을 돌아보며 우리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꿈꾸고자 한다"고 취지를 밝혔다.

따라서, 이번 기행은 '독립운동사의 발자취'를 따라 진행된다.
첫날 7월 23일, 대구에서 출발해 중국 심양의 오애시장과 청나라거리를 둘러본 뒤, 24일은 용정에 있던 민족.교육기관 ▶대성중학▶서전서숙, ▶1919년 북간도에서 첫 만세시위(3.13만세운동)가 벌어졌던 '서전대야' 터를 새겨본다. 25일에는 ▶북간도지역의 근대민조주의 교육의 본산으로 불리는 '명동학교' ▶윤동주 생가 ▶일송정 ▶1920년 철혈광복단이 일본은행의 송금마차에서 군자금을 탈취한  '15만엔 탈취사건 기념비'을 방문한다. 

26일에는 ▶독립군의 얼이 서린 청산리.봉오동.삼둔자 전투지를 둘러본 뒤 ▶중국과 북한의 국경인 '두만강'을 찾는다. 두만강에서는 '떳목 레프팅'도 한다. 27일과 28일에는 ▶민족의 명산 '백두산'에 올라 '천지'와 '장백폭포'를 비롯한 백두산 비경에 젖는다. 이어 29일에는 ▶압록강 국경을 찾아 "압록강 넘어 북녘 땅"을 절감한 뒤 30일 대구로 돌아본다.

김두현 사무처장은 "대구에서 흔치 않는 '만주 기행'일 뿐 아니라, 항일유적을 통해 우리 민족의 얼을 새기고 백두산.압록강에서 통일을 꿈꿀 수 있는 좋은 여행이 될 것"이라며 시민들의 참여를 당부했다.

한편, 이번 '만주 기행' 비용은 7박8일 항공.숙박료를 포함해 89만원이며, 전화로 신청한 뒤 계약금 10만원을 입금하면 된다.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가 주최하고 <평화뉴스><영남일보><영남대통일문제연구소>가 후원한다. (신청 /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053)254-5615. 010-5148-6536)

 
 


23일 조선족의 삶과문화엿보기
오애시장, 청나라거리, 삼학사, 광장문화 체험

24일, 25일 용정에서 듣는 믿족의 소리

◈  대성중학교
역사적 의의
1921 년 7월 11일 만주 길림성 용정에 세워진 민족학교. 대성유교의 공교회에서 세운 학교. 대성유교의 석호준과 청림교의 임창세가 중학교 건립을 계획하고, 대성유교 공교회의 회원인 강훈등이 연길도윤 도빈의 허락하에 용정촌 제4구에 2층 벽돌목조건물로 교사를 짓고 1921년 7월 11일에 정식으로 대성중학교 개학식을 거행.
대성중학교는 점차 한인공산주의자들이 학교의 주도권을 잡아가면서 수많은 항일공산주의자들이 배출. 옛 건물은 현재 이 학교의 이름인 용정중학교의 역사기념관으로 사용되어 왔으나, 1996년에 이를 헐어내고 옛 모습으로 복원하여 기념관으로 사용. 이 곳에는 항일운동과 관계되는 많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특히 윤동주 기념관 코너가 설립되어 그의 항일운동과 순수했던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다. 

◈ 서전서숙
역사적 의의
1906년 항일 민족교육을 실시한 교육기관. 만주지역 교육기관 설치 기여
1906 년 만주 용정에서 이상설.여준.정순만.이동녕등이 서전평야의 이름을 따 설립. 숙장 이상설, 운영 이동녕, 정순만등 교사 이상설, 여준, 황달영,김우용등이 철저한 항일민족 교육 실시. 1907년 4월 이상설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여하려 블라디보스톡으로 떠나게 된 것을 계기로 재정난과 일제의 감시와 탄압등으로 폐교.
1년 미만의 짧은 역사임에도 만주지역에 수많은 신식 민족교육 기관이 설립되는데 영향을 줌. 건물은 없고, 위치는 길림성 용정시 용정실험소학교의 운동장으로 비정됨.
현재 용정실험소학 교정에는 1995년 용정항일역사연구회에서 세운 "1906년 4월 반일지사 이상설은 이곳에 연변 최초의 근대학교인 서진서숙을 개숙하였다"라는 내용의 서전서숙기념비가 서 있다.

◈ 3,13 만세운동지 ; 서전대야 터
역사적 의의
1919년 3월 13일 북간도에서 최초로 만세시위가 벌어졌던 곳
3월 13일 서전대야에서 조선독립축하회라는 이름으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대회 부회장 배형식목사의 개회선언에 이어 대회장 김영학이 독립선언포고문을 낭독하였다. 이어서 용정시내에서 시위행진이 있었다.
현재 서전대야유적지라는 기념비가 건립되어 있다.

◈ 3,13반일의사 릉
역사적 의의
북 간도 용정 지역 3.1운동 당시 순국한 애국지사들의 묘: 1919년 3월 13일 만주 용정의 서전 벌판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항의 시위에서 공덕 선생등 12명이 순국하였다. 이에 용정에서 최근갑이 3.13 순국열사 13인의 합동묘소를 찾아냈다. 이 묘역은 근래까지 그대로 방치되어 오다가 용정유지들이 주축이 되어 1990년에 목비를 세우고 부근을 정화하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 허청리(현재 합성리)에 소재한 13의사의 묘소에서 해마다 성대한 추모제를 거행, 1993년 5월에는 화강암으로 3.13반일 의사능이라고 새긴 묘비를 세웠고, 1996년에는 대대적인 공사를 벌여 동묘역을 성역화하였다. 기념비를 중앙에 두고 전열에 9기, 후열에 4기를 배열하였다.

◈ 용정기원우물
역사적 의의
한국인들이 처음 용정에 이주하여 판 우물. 이곳에는 용정지명기원지정천이라고 새겨진 기념비가 서 있다. 1879년 전후에 장인석, 박인언씨의 두 농가가 육도구 부근(지금의 용정)에서 정착하여 농사를 짓게 되었다. 이 때 우물터를 발견하였다.
음료수를 해결하기 위하여 부근의 한족 농민들과 함께 우물을 잘 정리하고 용두레를 설치하여 깨끗하고 시원한 물을 마시게 되었다. 이 때로부터 육도구를 용정이라고 했다. 1934년에 이 지명기원의 우물을 기념하기 위하여 우물을 수건하고 주위에 돌기둥을 쌓고 돌 비석을 세우고 비술나무도 한 그루 세우고 "용정지명기원의 우물"이라고 글씨를 새겨 세웠다. 지금도 한 그루의 비술나무는 우물가에 있다.

◈ 명동촌 - 명동학교유적지
역사적 의의
북간도 지역의 근대민족주의 교육의 본산
1908 년 4월 27일 김약연에 의해서 명동촌에 설립된 민족교육기관. 유교의 정신에 입각하여 규얌제를 설립하여 교육을 해오던 김약연 이상설의 서전서숙의 민족교육정신을 계승하여 화룡현 명동촌에 명동서숙을 설립. 교육이념을 "독립정신"의 함양과 신지식의 보급에 두고, 이를 위하여 역사 황의돈, 윤리 박태항, 한글 장지영, 체육․군사에 김홍일외에 여준, 최기학, 송창의, 박태식, 김철, 박경철, 김성환, 김근승 등의 교사가 있었다. 설립 2년 만에 여학교까지 병설하고 명동중학으로 발전하였다. 이 학교 출신의 많은 인물들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  명동교회
역사적 의의
독립운동의 근거지이며 민족운동의 산실이 되었던 교회
1909 년 5.6월경 명동교회가 설립되었다. 교회의 설립에는 국내에서 온 정재면의 공헌이 컸다. 명동교회는 처음에는 8칸의 집을 사서 방을 터 사용하였다. 명동교회는 길선주 목사, 김익두 부흥사를 초청하여 사경회를 개최하였다. 주일 평균 예배 참석자는 6-70명이 넘었고, 이동휘 전도사의 부흥회 때에는 인근 수백리 에서 1천 여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공산혁명이후 정미소로 사용되면서 그 본 모습을 잃고 폐허가 된 것을 해외한민족연구소에서 단층 70여평 크기의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 김약연 목사 기념비
역사적 의의
북간도에서 활동한 기독교계 민족운동가 김약연의 기념비
1942 년 건립되어 문화혁명 때 일부 파손되었다가 최근 복원. 규암 김약연(1868~1942)은 1908년에 명동서숙을 설립하였으며, 1912년 북간도 국민회 회장, 1917년 간민교육회 회장, 1919년 대한독립기성총회 의사부원 등을 역임. 북간도와 노령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여 일제로부터 한국독립운동의 "수령"으로 지목되어 체포의 표적이 됨. 만년 캐나다 선교회에서 용정에 설립한 은진중학교의 이사장에 선출되어 활동하다가 61세에 목사 안수를 받고 명동교회의 목사로 시무하다가 1942년 10월 29일 용정시 자택에서 “내 모든 행동이 곧 나의 유언이다”라는 유언을 남기로 75세로 별세.
최근 복원됨.

◈ 일송정
역사적 의의
용정에 망명하였던 민족운동가들이 자주 올랐던 비암산 위에 세워진 정자
일 송정은 “선구자”의 노래로도 유명하다. 가곡 [선구자]는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으로 용정을 배경으로 한 독립운동가를 노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구자] 노래의 모델로 알려진 일송 김동삼(1878~1937)은 경북 안동출신으로서 국내에서 애국계몽운동을 하다가 1911년 국권피탈 직후 서간도로 망명하여 이시영, 이동녕, 이상룡등과 함께 경학사를 설립하고, 유명한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독립군의 맹장이다.

◈ 15만엔 탈취 사건 기념비 장소
역사적 의의
1920년 철혈광복단이 일본은행의 송금마차로부터 군자금을 탈취한 곳
1919 년 겨울, 임국정과 최봉설등은 철혈광복단을 조직하고 군자금 마련에 헌신하던 중 회령에서 용정으로 조선은행권 15만엔이 우송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습격, 군자금으로 사용하기로 하고 1920년 1월 4일 동랑어구의 숲속에 매복해 있다가 현금 수송마차를 습격하여 15만원의 현금을 확보하였다. 15만엔을 소지한 이들은 국자가, 와룡동, 의란구를 거쳐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으로 갔다. 그리고 이곳에서 무기구입을 위해 활동중 최봉설을 제외하고는 체포되었다. 현재 탈취십오만엔사건 기념비가 있음. 

◈ 창동학교(와룡동 사은비)
역사적 의의
창동학교 은사들을 기념하는 비
정면에는 은사기념비라고 쓰여 있고, 뒷면에는 창동학교 설립과 운영과정에 공적이 큰, 원장인 오상근, 이병휘, 남성우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창동학교 연혁과 은사에 대한 찬사의 글이 있다.

◈  제창병원
역사적 의의
용정지역 기독교 독립운동의 본산
1914 년 캐나다 연합교회 선교사 바커(A.H.barker)부부가 용정촌 동산에 설립한 병원으로 독립운동가의 정치적 피난처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이 병원 지하실은 북간도의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이 인쇄된 곳이며, 3.13만세운동 당시에는 일본군의 저격으로 쓰러진 애국동포 시체한치소 및 부상자에 대한 치료소로도 이용되었다.
한편 이 병원에서는 실비진료와 더불어 빈곤자에 대해서는 무료치료를 실시하였으며, 순회진료도 시행하여 오지에 있는 한인촌을 찾아다니면서 환자들을 치료해 주었다.
 
26일 “청산리와 봉오동의 신대한의 독립군아”

◈ 방천
 방천은 러시아의 불라디보스톡과 북한 중국의 3개국이 만나는 장소이다.

◈ 훈춘
역사적 의의
훈춘 3.1운동, 훈춘대한애국부인회, "훈춘사건"
훈 춘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중심인 연길 동쪽에 있으며 소련으로 통하는 관문이다. 이 곳에는 1919. 20년 당시 독립운동에 역사적 자취가 많이 남아 있지만 최근 중국의 개발붐을 타고 도시 재개발이 활발하게 일어나면서 과거의 흔적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1919 년 3월 20일 오전 8시 차대인구를 출발, 동문을 통과하여 룡원거리를 행진, 서문밖 일본영사관 부근까지 행진한 시위대 3천여명은 이곳에서 독립축하회를 개최하였다. 집회장소는 현재 훈춘시병원에서 인민정부 방향으로 난 도로로 추정되고 있다.
1919 년 9월 29일 훈춘의 각 지역에 거주하는 200여 명의 여성들이 훈춘 동문에 있는 박봉식의 집에 모여 주신덕을 회장, 황병길의 부인인 김숙경을 부회장으로 하는 훈춘대한애국부인회를 결성하였다. 결성 장소는 오늘날 훈춘시 병원 앞 거리로 추정되고 있다.
일 제는 1920년 9월과 10월에 자신이 사주한 마적단이 훈춘일본영사관을 습격한 것을 빌미로 조선군 제19사단 등 2만여 명의 병력을 만주로 출동시켜 독립군을 공격하고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경신참변"을 일으켰다. 이 참변과 관련된 훈춘일본영사관은 오늘날 훈춘시 인민정부와 연결된 신안 거리의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었다. 최근 이 건물과 관사는 철거되었으며, 그 자리는 훈춘시 공안국이 들어서 있다.

◈ 도문 
도문은 두만강의 중국이름이다. 즉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마주보는 장소이다. 여기에서 잠시 월북도 감행한다.(1M정도)

◈ 삼둔자 전투지
1920 년 6월 4일 화룡현 삼둔자지역에서 독립군이 일본군을 패배시킨 전투. 독립군 1개 소대가 화룡현 월신강 삼둔자(현재의 간평)를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너서 1920년 6월 4일 새벽 5시에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으로 진입, 일본군 헌병군조 福江이 인솔한 헌병순찰대를 격파하고 귀환한 소규모의 전투가 있었다. 이에 일본 남양수비대장 新美중위가 인솔하는 일본군 1개 중대가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하여 삼둔자에 이르러 무고한 재만동포들을 학살하는 한편 독립군을 계속 추적하고자 하였다. 독립군은 삼둔자 서남방에 잠복하여 기다리고 있다가 이들을 섬멸하였는데 이것이 삼둔자전투이다. 현재 삼둔자(간평) 마을 바로 앞에는 두만강이 흐르고 있으며, 마을 뒤는 산으로 이루어져 있어 당시의 전투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일본군은 독립군 못 발견 퇴각하다 섬멸 당하였다.
삼둔자는 현재의 간평이다. 연변지역의 인사들은 이곳의 위치를 모르는 경향이 많다. 도문에서 바로 다리를 건너 좌회전하여 기차역을 지나 10분 정도 지니면 맞은 편에 북한의 강양역이 보이고 거기서 2분 정도만 차로 달리면 바로 간평에 도착할 수 있다. 이곳에는 간평 마을 건너편에 계곡이 있어 과거 일본군과 독립군이 전투했다는 지형을 능히 짐작해 볼 수 있다.

◈ 봉오동 전투지
함 경남도 나남에 본부를 두고 있던 일본군 19사단은 삼둔자에서의 패배에 분개하여 군대를 파견, 독립군을 섬멸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安川소좌가 이끄는 일본군은 왕청현* 봉오동지역까지 독립군을 추격해왔다. 보고에 접한 대한북로독군부 부장 최진동과 홍범도는 이들을 섬멸하기로 결정하고 봉오동의 주민들을 대피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제1중대는 봉오골 윗마을 서북단에, 제2중대는 東山에, 제3중대는 북산에, 제4중대는 서산 남단에 매복하여 기다리게 하였다. 그리고 홍범도 자신은 본부병력 및 잔여 중대를 인솔하고 서북고지에서 탄약과 식료를 공급하면서 만일의 경우에 퇴로를 확보하도록 하였다.
사령부장 홍범도는 북로도독부의 전 독립군에게 일본군의 본대가 독립군의 포위망에 완전히 들어 올 때까지 미동도 하지 말고 매복해 있다가 사령부장의 발포신호에 따라 일제히 총공격을 가하도록 명령하였다. 또한 홍범도는 이화일에게 약간의 병력을 주어 高麗嶺 북쪽 1,200미터 고지와 그 북쪽 마을에 대기하고 있다가 일본군이 나타나면 교전하는 체 하면서 일본군을 포위망 안으로 유인해 오도록 하였다. 홍범도의 계획에 따라 작전이 전개되어 6월 7일 일본군은 대패하였다.
상해 임시정부의 군무부에 의하면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은 전사 157명, 중상 200여명, 경상 100여명을 내었다고 한다. 한편 독립군측의 피해는 전사 4명, 중상 2명의 경미한 것이었다. 숫자에 대하여는 앞으로 정밀한 검토가 요망된다.
봉오동전투의 승리는 당시 국내외에 있는 모든 동포들에게 강한 독립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는데 무엇보다도 큰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봉오동 지역은 현재 저수지로 변하였으며, 도문에서 연길로 가는 길에 왕청방향으로 우회전하여 水南마을 조금 지나 좌회전 하면 된다. 저수지 입구에서 2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봉오동전투기념비를 중국정부에서 세워 이를 기념하고 있다.

◈ 청산지 전투지
청산리전투는 간도에 불법으로 침입한 일본군의 東支隊가 길림성 화룡현 삼도구와 이도구에 주둔하고 있는 독립군들을 포위하여 섬멸하려고 들어오다가 도리어 독립군의 반격을 받고 전개된 전투들이다. 그 첫 전투는 1920년 10월 21일 오전 9시 삼도구 청산리 白雲坪 부근의 골짜기에서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독립군과 일본군 동지대의 山田토벌연대사이에 시작되었다. 여기서 시작된 전투는 이도구부근으로 옮겨지면서 1920년 10월 26일 새벽까지 약 6일간 10여차례의 대소전투들이 전개되어 독립군이 일본군을 패전시킨 전투이다.
청산리전투에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를 주력으로 하여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의군부, 한민회군, 의민단, 신민단 등 8개 독립운동단체가 참여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전개한 주요 전투로는 백운평전투(북로군정서, 10.21), 완루구전투(홍범도연합부대, 10.21), 천수평전투(북로군정서, 10.22), 어랑촌전투(북로군정서, 홍범도연합부대, 10.22), 맹개골전투(북로군정서, 10.23), 만기구전투(북로군정서, 10.23) 쉬구전투(북로군정서, 10.24), 천보산전투(홍범도연합부대, 북로군정서, 10.24, 10.25), 고동하곡전투(홍범도연합부대, 10.25,10.26)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전투에서 일본군전사자는 한국측 기록에 의하면 1,200명 정도이다. 일본측 기록에서는 이것을 확인할 수 없다.
청산리전투에서의 승리는 지형을 이용한 독립군의 전략 전술, 노령지역에서 입수한 우수한 무기, 재만동포들의 절대적인 지원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27일 28일 “민족의 산 백두산으로...”

 ◈ 백두산
함 경남도·함경북도와 중국동북지방의 길림성이 접하는 국경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고봉의 산. 높이 2,744m이다. 최근에까지 활동했던 휴화산으로 북위 41도 31분-42도 28분, 동경 127도 9분-128도 55분에 걸쳐 있고 그 총면적은 8,000평방 킬로미터에 달하여 전라북도의 면적과 거의 비슷하다. 산의 북쪽으로는 장백산맥이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달리고 있으며, 백두산을 정점으로 하여 동남쪽으로는 마천령산맥이 대연지봉, 간백산, 소백산, 북포태산, 남포태산, 백사봉 등 2,000m이상의 연봉을 이루면서 종단하고 있다. 한편, 동쪽과 서쪽으로는 완만한 용암대지가 펼쳐져 있어 백두산은 한반도와 멀리 북만주 지방까지 굽어보는 이 지역의 최고봉이 된다.
백두산은 산세가 장엄하고 자원이 풍부하여 일찍이 한민족의 발상지로 또 개국의 터전으로 숭배되어 왔던 민족의 영산이었다. 민족의 역사와 함께 수난을 같이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고, 천지를 비롯한 절경이 많은데다가 독특한 생태적 환경과 풍부한 산림 자원이 있어 세계적인 관광의 명소로서 새로이 주목을 받고 있는 산이다.

 ◈  천지
백 두산 꼭대기에는 화산이 폭발하면서 남긴 분화구가 있는데 거기에 물이 고여 천연적인 호수가 되었다. 이것을 천지라고 한다. 호수의 수면은 남북의 길이가 4.8km이며, 동서의 너비가 3.3km, 분수령의 둘레가 18.1km이다. 평균 물의 깊이는 204m이며, 총저수량은 20억 입방미터이다. 천지는 중국과 한반도의 경계에 있는 호수이며, 또한 중국에서 가장 깊은 호수이다. 천지의 주위에는 16개의 산봉우리가 있다.

천지로 올라가는 길은 두갈래이다. 하나는 지프를 이용하여 기상대까지 올라간 다음 5분 정도 도보로 걸어서 천지를 만나는 것이다. 두번째는 장백폭포로 걸어서 천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두번째 길은 과거에는 험난하였으나 최근에는 난간을 마련하여 등산객에 크게 편의를 주고 있다.

 ◈ 장백폭포
천지의 북쪽으로 물이 흘러나와 1,250m 떨어진 지점에서 큰 낙차를 이루며 폭포를 형성하는데 이것이 장백폭포이다. 높이는 68m이며, 허공에서 떨어지는 폭포는 그 소리가 골짜기를 뒤흔들고 물보라가 흩날려 햇빛을 가리운다.

 ◈ 소천지와 원지
백 두산 기슭의 경사진 고원에는 몇개 비교적 작은 분화구 호수가 있다. 산 서남쪽에 있는 王池, 북쪽에 있는 장백호와 園池 등이 그것이다. 장백호는 소천지라고도 부른다. 이 밖에 장백온천, 수직관대, 국제장백산생물권 보호구 등이 있다.

29일“압록강 넘어 북녘의 땅”

◈ 단동 (丹東)
단 동의 옛 이름은 안동(安東)이다.단동은 북한의 신의주와 압록강을 끼고 인접해 있는 국경도시이다.인구 약 70만으로 최근 현대식 건물이 도시곳곳에 세워지는 등 급속한 발전을 보이고 있는 곳이다.북한을 바라볼수 있는 금강산 공원과 평양-북경을 달리는 국제열차가 지나는 철교가 있다.압록강어귀에는 가도(椵島)라는 섬이 있다.◈ 압록강(鴨綠江)우리나라와 중국의 동북지방과의 국경을 이루면서 황해로 흘러드는 강이다.길이 790km, 유역면적 30.739㎢. 가항거리 698km.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강으로 백두산 천지 부근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흐르는데 혜산. 중강진.신의주. 등을 거쳐 용암포의 초하류(稍下流)에서 황해로 유입한다.이 강은 직선거리로는 400㎞ 정도이나 상류쪽에서 심한 곡류를 이루므로 실제 강 길이는 직선거리2배에 가깝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압록강의 물빛이 오리머리 빛처럼 푸른 색깔을 하고있다.” 고 하여 압록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압록강 유역은 우리나라의 북단을 차지하고 바다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지역을 포함해 우리나라에서 기온의 차가 가장 큰 곳이다. 겨울철에 -20~-30°C 정도로 내려가나 대륙성 기후의 영향으로 여름철에는비교적 고온이 되어 냉대림이 무성하다.예로부터 강 연안은 우리나라 특산인 산삼의 명산지이다.우리민족을 구획시켜주는 변방지대로서 압록강은 이른바 대륙의경계를 의미하며 우리 민족과 이민족을 지리적으로 변별시켜줄 뿐만 아니라,정신적 지주로서의 상징적 의미도 지니고 있다.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통한 어린사연이 흐르는 눈물의 강이 되었으며 특히 이미륵(李彌勒)의 소설“압록강은 흐른다”에서는 우리의 정신적 고향이며 지주로서 모든 우리의 감성과 사고가 비롯되는 근원의 강, 그 가슴속에 항상 흐르고 있는 어버이 나라의 대한 향수와 정신적 발원지로 묘사되고 있다.이와 같이 압록강은 문학 작품 속에서 신화적 의미를 지닌 상징적 배경으로 또는 국경이 자아내는 외롭고 쓸쓸한 정조와 함께 순수한 자연경관으로 또는 국경을 건너야 하는 이들의 쓰라린 이별과 시대적 수난의 배경으로 또는 마음의 고향을 의미하는 뿌리의 상징으로 나타내고 있다.즉 압록강은 우리의 시조가 탄생한 신화적 공간이면서 동시에 시대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민족의 심성에 비추어진 민족의 강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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