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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팔공산, 그 추억에 잠기다
이은정..."선홍색 단풍 숲길, 내 뒤에 그가 걸어오고 있다"
2009년 09월 18일 (금) 10:00:13 평화뉴스 pnnews@pn.or.kr

 

생각보다 일찍 가을이 왔다.

가을은 언제나 청아한 달빛 아래 풀벌레들의 합창으로 시작된다. 단풍으로 절정을 맞이하는 가을은 낙엽 속에 스러지며 다음 계절로 사라진다. 나는 가을의 그 모든게 좋았다. 가까운 팔공산에 자주 들락거리며 짙어가는 가을을 지켜보곤 한다. 도심 가까이 이렇게 깊은 산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대구 사람치고 갓바위 돌부처님 앞에서 합장 한 번 안해본 사람은 잘 없을 것이다. 팔공산은 나의 유년과 현재를 이어주는 고향과 같은 곳이다.

일곱 살 때라고 기억된다. 생애 처음으로 갓바위에 오른 것이.
아버지는 친구들과 갓바위 등산길에 오르면서 동생과 나를 데려가셨다. 아버지 뒤에 바짝 붙어서 아버지가 사 준 새우깡을 들고 갓바위 계단길을 오르는 유년의 사진 한장. 지금은 잃어버린 그 사진을 나는 선명히 기억한다. 윗도리를 벗어 쥔 런닝 차림의 젊은 아버지와 커트 머리에 팔랑 치마를 입은 내가 앞서 간 카메라를 보고 환히 웃고 있다.

나는 우리 오형제 중에서 가장 지독한 반항아였다. 아버지와 나 사이의 극한적 대립은 결국 온전히 해소되지 못한 채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영원히 묻혀버렸지만, 미움 뒤에 찾아온 안식은 오랜 적이었던 아버지와 나를 화해시켰다. 나는 그 사진을 기억하며 아버지에게 받았던 사랑을 기억해낸다. 미움도, 분노도, 증오도, 모두 사랑의 왜곡된 다른 이름이란 걸 깨닫는 순간,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들이려 한다. 나를 있게 해준 아버지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스무살의 내가 팔공산 동봉 길에 오른 것은 막 연애를 시작할 때였다.

선홍색 단풍들이 우거져 하늘을 다 가렸다.
붉은 단풍숲길에 취한 내 뒤에 그가 걸어오고 있다.
팔공산의 단풍은 사람을 아름답게 만든다. 단풍그늘이 내려와 우리를 붉게 물들였고 우리는 사랑에 빠졌다.

고등학생 후배를 묻은 것도 팔공산이다.
사회의식이 강했던 후배는 학교의 강압을 이기지 못한 채 애젊은 생명을 스스로 버렸었다. 우리는 수태골 너른 바위에 우리가 만든 비석을 세우고 해마다 그를 추모하는 모임을 가졌다. 그를 생각하면서 지금의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돌아보려 했다.

소박한 추모모임이 14년째 이어지던 해에야 우리는 그의 명예졸업장을 대신 받을 수 있었다. 우리 젊은 날의 꿈, 열정, 희망이 그 명예졸업장 속에 오롯이 들어있다. 수태골 맑은 계곡물에 발 담그고 따스한 햇살을 쬐노라면 젊은 날로 돌아간 것 같아 마음이 순수해진다.

팔공산에는 내 오랜 친구가 산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그 친구 집에 가서 밤새워 술을 마시고 느지막이 일어나 팔공산을 거닐곤 했다. 친구 아들 녀석이 다니는 그곳 작은 학교에 가서 그네를 타기도 하고 방짜유기박물관에서 열리는 문화공연을 구경하기도 했다. 값비싼 방짜유기주전자를 쳐다보며 그저 침만 질질 흘리기도 하고. “저 주전자에 막걸리 부어 마시면 얼마나 맛있겠노?!” 하면서. 그 친구가 곧 지리산으로 귀농을 한다.

오랫동안 귀농준비를 하면서 더욱 깊어지고 맑아진 내 친구.
멀리 떠날 친구를 생각하니 우리 우정이 새삼 애틋하게 여겨져서 늘 팔공산을 바라보게 된다.

산은 언제나 말없이 우리를 굽어보고 있다. 이번 가을은 유난히 팔공산에 자주 오르내릴 것 같다.
그곳에서, 눈이 멀 듯한 단풍에 마음을 빼앗겨도, 쌉싸름하고 메마른 낙엽 냄새를 맡으며 쓸쓸해지더라도, 가을의 그 모든 것들이 환장할 정도로 좋은 것이다.

   
이은정씨와 민영.민우...

 

 

 

 

 

 

 

 

 

 

 

 

[주말에세이] 이은정

 

 * 이은정씨는 달성군 화원읍에 사는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대구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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