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띠 가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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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익 / "멋진 범띠 가시내를 위하여 건배! 당·신·멋·져!"


용 가는 데 구름 가고 범 가는 데 바람 간다고, 새해가 마침 범띠인 네게는 절로 신바람이 날 경인년(庚寅年)이로구나. 게다가 사신(四神)의 한 자리를 떠억 차지한, 신령스러운 백호띠 라고까지 하니 설레기조차 하겠구나. 물론 게으른 일꾼이 버려놓은 돌밭에 호박이 넝쿨째 솟아날 일도, 호랑이 꿈 한 번에 동쪽으로만 내처 달리던 놈에게 벼락처럼 서방정토가 펼쳐질 일이야 있겠냐마는 말이다.

호랑이 등에 답삭 매달려 넋을 놓고서 달려가는 일상에서 잠시나마 한숨 돌리고서, 잊어버렸던 예전의 꿈들을 추슬러보고 새로운 다짐이나 한 번 다져보자는 게지. 이마저 허망한 도깨비놀음이라고 타박하는 것 또한 너무 야박한 노릇이 아니겠니.

 그래,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자꾸나.
호랑이는 사신(四神 ; 청룡, 백호, 주작, 현무) 중 유일한 실제동물로, 숱한 설화와 속담을 비롯하여 문학작품에서 만날 수 있는 퍽이나 친숙한 이름이 아닌가 싶구나. 중국에서는 우리나라를 호담지국(虎談之國 ; 호랑이 이야기의 나라)이라고 불렀고, <후한서> 동이전에서는 아예 ‘호랑이를 신으로 받들어 모시는 나라’라고 소개까지 할 정도였단다. 우리 문헌상에는 <삼국사기>의 신라 헌강왕조에 처음으로 기록이 보이지만, 석기시대 울주 반구대 바위그림이나 철기시대 청동제 허리띠 걸쇠인 호형대구(虎形帶鉤)에서 벌써 그 자취를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는 구나.

물론 <삼국유사>에서 너무나 친숙한 단군신화,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도록 환웅에게 빌어, 쑥과 마늘을 먹고서 계율을 지키기로 약속을 하였고, 이에 곰은 아리따운 여자로 다시 태어났으나 호랑이는 결국 실패하였다.’ 라는 슬픈 사랑의 이야기는 누구나 알고 있지. 천신족(天神族) 임을 자처하는 환웅에게서 소박맞고서 내쫓겼던 호족(虎族)은 먼 훗날 단군이 산신이 되어서 입산할 때부터, 그 이후로도 언제까지나 산신각을 함께 지키면서 변함없는 동반자요, 수호자와 전령으로서 화려하게 되살아났지. 아예 ‘산군자(山君子)’, ‘산신령(山神靈)’, ‘산중영웅(山中英雄)’으로까지 불리면서, 한반도의 형세가 곧 호랑이 모양이라는 은근한 자부심으로 피어나기도 했지. 마침내는 88 올림픽에서 곰순이를 물리치고, 당당하게 한민족의 마스코트로 호돌이가 우뚝 서는 쾌거로까지 말이다.

물이 깊어야 고기들이 놀고 산이 깊어야 범이 든다고, 우리네 삶 속에 넓고도 깊숙하게 자리 잡아 그만큼이나 애증을 함께한 존재도 드물 것 같구나. 흔히 호랑이는 재앙을 몰고 오는 포악한 맹수로 여겨지지만, 반대로 사악한 잡귀들을 물리치는 신령스러운 존재로 받들어져 왔단다. 뭇짐승의 용맹스러운 왕으로 힘세고 날래기도 하지만, 의외로 어리석을 정도로 순진하여 사람에게는 물론 토끼나 여우, 까치 등에게도 곧잘 골탕을 먹는 존재로 등장하기도 하지. 인간들의 의로움이나 효행에 감동을 받아 뜻밖의 은혜로움을 베풀기도 하고, 인간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받으면 기어코 큰 보은으로 되갚는 영물(靈物)로 그려지기도 했단다. 주변에서 자주 만나는 ‘까치 호랑이 그림’에서 소나무가 장수를, 까치가 기쁨을 나타낸다면 호랑이는 바로 보은을 상징한다고 하구나. 그렇듯 두려우면서도 푸근하고, 혹은 아득하면서도 가까운 이웃으로 우리와 함께 하여 왔었지.

호랑이에게 열두 번 물려가도 정신만은 차리라고들 하지만, 짝사랑이라는 열병에 한번 걸린 이들은 당최 정신을 못 차리더구나. "범은 착하고도 성스럽고, 문채롭고도 싸움 잘하고, 인자롭고도 효성스럽고, 슬기롭고도 어질고, 엉큼스럽고도 날래고, 세차고도 사납기가 그야말로 천하에 대적할 자 없다." 조선 제일의 문장가요, 매서운 필봉을 휘두르던 연암 박지원(1737 영조 13년~1805 순조 5년)이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벌려놓은 호들갑의 한 대목이다.

이에 뒤질세라 한국미술의 탁월한 감식가로, 진중하기 그지없던 미술사학자 혜곡 최순우(1916~1984)의 은근한 연서 또한 이에 못지않더구나.

"어쨌든 동물원 우리 안에서나마 바라보고 좋아하던 호랑이의 듬직한 거동을 우리의 생활 주변에서도 볼 수 있는 듯싶은 것이 즐거웠고, 나는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호랑이란 짐승을 한층 좋아하게 되었다. 공연히 거만만 떨고 대가리 치장만 자랑삼는 사자보다는 듬직하고 구수하게 생긴, 말이 없는 산중군자(山中君子) 호공(虎公)이 좋았고, 앙칼진 돈점박이 표범 같은 것은 내가 싫어하는 맹수였다. 말하자면 어질고 올바른, 그리고 산전수전 다 겪은 늙은 호랑이의 늠름한 장자지풍(長者之風), 이것은 아마도 과거의 세상에서 한국의 촌부촌부(村夫村婦)들이 마음속에 그리던 하나의 이상적 남성형이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늘빛 청자」에서)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 없다지만, 인왕산 호랑이를 잊지 못하는 시인도 있더구나.
인왕산(仁旺山)은 일찍이 조선시대 명산으로 숭앙되었고 조선 초에 북악을 주산(主山), 남산을 안산(案山), 낙산과 인왕산을 좌우용호(左右龍虎)로 삼았던 곳으로서, 도성을 세울 때 궁궐터로 지목되기도 했던 바위산이었지.

"백 년 전까지는요 / 북악 인왕에 호랑이가 불쑥 나타났지요 / 대궐의 가여운 상궁아씨들도 / 호랑이 울음소리 들었다지요 / 아이구 무서워라 호랑이었지요 / 보아요 북악 바위바위 얼마나 뛰어나요 / 거기에 와 앞발 내디디면 / 멋지고 멋진 호랑이었지요 / 우리나라 통 큰 시악시 쩍 반했지요 // 예부터 허튼 수작 관상에는 호식상이 있었지요 / 호랑이한테 잡아먹히는 상이 그것이지요 / 한양 4대문 밖 변방에서 / 걸핏하면 어린아이 물어가는 / 그런 고얀 놈 없지 않았지요 / 쯔쯔 더러는 인수봉 스님도 하나 물어갔지요" (고은 「호랑이 타령」)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하지만, 헛된 욕심과 아집으로 어깃장 부리며 자는 호랑이에게 불침 놓고, 저 먼저 범 아가리에다 머리를 들이미는 허튼 수작은 진작부터 하지 말았으면 싶구나. 부릅뜬 범 눈깔로 스스로를 먼저 살피고, 날카로운 발톱은 슬며시 제 안으로 감추는 어리석음에서 진정한 너그러움을 읽어내고서, 쩍 반할 줄 아는 큰 범띠 가시내로 우뚝 서는 멋진 새해이기를 빌어본다.

"가시내야 가시내야 범띠 가시내야~ 멋쟁이로 살고 싶은 범띠 가시내~"
오래 전 기억 속에서 잠자고 있던 세레나데를 바치면서 이만 줄이마. 좋은 복 많이 짓고 더 흐뭇한 복덩이를 거두는, 멋들어진 새해 새날이기를 바란다.  다시 한 번 멋진 범띠 가시내를 위하여 건배!
"당〮·신·멋·져!" (당당하고 신나고, 멋지게 져주며 살자!)






[주말에세이]
송광익 / 의사. 소아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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