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 선생님의 속말…"식모살이는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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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숙 세실리아 ② / 고향 떠나 열여섯에 직공, 그리고 '해고' 보따리...


"밥도 못 먹고, 가는데 마다 잘리고…"
공장에서 쫓겨나 돌아오는 길에 살살이 꽃을 보니 절로 눈물이 흘렀습니다. 바람 불 때 힘없이 흔들거리는 한해살이의 운명이 자신과 닮았습니다. 잎 떼기 놀이에서 떨어지는 잎은 자신의 모습으로 비쳤습니다.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린다고 지은 코스모스의 정겨운 우리 이름마저 그를 아프게 했습니다.

"월급을 10원 올려 달라…기숙사에 신문을 넣어 달라"
1969년, 열여섯 살에 일신직물에서 직공생활의 첫발을 내딛습니다. 하루 일당 100원을 받을 때이니 10원의 임금 인상은 생존의 의미를 담았습니다. 신문이나 책을 볼 수 있게 해달라는 것 또한 인간다운 대접을 받기위한 최소한의 요구였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가톨릭노동청년회(JOC) 활동 이전에 자생적(?) 노동운동가였던 셈이죠.

어린 동생들 돕다 뺨 맞기도...

장명숙(세실리아)
장명숙(세실리아)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는 초등학교를 중도 포기한 채 공장생활을 시작 하는 아이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열두 세 살 어린 나이에 주야간으로 나눠 12시간을 근무해야 했으니 엉덩이를 붙이면 잠이 따라붙는 건 당연했습니다. 그는 공장 사택에서 사장 부인이 잠옷 바람으로 나와 조는 아이들을 감시하는데 분개했습니다. 동생들이 박스에 들어가 눈 붙이는 것을 돕다가 뺨을 맞은 적도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그의 노동자 생활이 순탄할 리가 없었습니다. 당초 일신직물에서 대농으로 옮겨 공장생활을 이어가던 그는 1975년 첫 해고를 당합니다. 해고이유의 속내는 노동자의 권리를 찾는데 앞장 선 때문이지요. 그는 해고를 당하면 놀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곧바로 검단공단의 중앙섬유에 기능공으로 취직을 합니다.

일신직물 중앙섬유 영화방직...'해고'의 아픈 길

하지만 이미 그는 불온한 근로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른바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던 것이지요. 2주일 만에 그는 보따리를 쌉니다. 그렇다고 굶을 수는 없는 법. 그는 다시 경주에 있는 영화방직으로 달려갑니다. 야간을 끝내고 주간이 되는 날에 자신을 해고했던 대농에 있던 간부직원들이 여기에 와있음을 압니다. 일주일 만에 또다시 보따리를 쌉니다.

그는 왜 이렇듯 어린나이에 공장생활을 하며 해고의 아픈 길을 걷게 됐을까요. 그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공장에 몸을 던진 것은 아닙니다. 그는 애초 공부를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8살 때 어머니를 여읜 터라 집안 형편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집에서 따뜻한 밥 먹고 중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꿈속 호강이었습니다.

그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고향인 경북 영천 신령을 떠나 대구로 나옵니다. 그리고 식모살이를 시작합니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어 가난이 일상으로 자리 잡았던 그 시절, ‘식모살이’는 자신의 몸을 의탁할 수 있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그렇더라도 식모살이는 어쩔 수 없이 건너는 외나무 다리였습니다. 남의 집 일을 하는 비정규직의 원조쯤으로 생각해보면 그 설움이나 아픔을 짐작할 수 있겠지요.

공부 욕심에 식모살이...

하지만 그가 식모살이를 택한 것은 공부욕심이 컸습니다. 당시 대구 제일모직에는 산업체학교가 있었고 그는 거기에 가려고 했지만 나이가 어렸습니다. 그래서 그 공장의 이◯동 생산과장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고 2년 뒤 제일모직에 들어가려 한 것입니다. 하지만 식모살이는 아무나 하나요. 그는 몇 달 만에 도망을 나오고 맙니다. 주인집을 무작정 뛰쳐나온 그가 갈 곳은 딱 한군데. 통행금지가 없는 대구역에서 2~3주를 지내며 가장 배고픈 시절을 보냅니다.

그는 지금도 6학년 담임이었던 박상필 선생님의 속말을 잊을 수 없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비단 이 뿐이었을까요. 식모살이가 흔했던 그 시절, 그때는 그랬나 봅니다.

“지구는 둥글다. 네가 가진 가치관을 버리지 않는다면 네가 꿈꾸는 그 자리로 돌아온다. 그러나 바퀴를 돌며 하지 말아야 될 일이 있다. 남의 인생을 사는 일, 그게 식모살이다.”




[박창원의 인(人) 11]
글.사진 / 평화뉴스 박창원 객원기자


'곡주사 이모'와 '하회마을 뱃사공'에 이은 <박창원의 인(人)> 세 번째 연재입니다.
직물공장 여공에서 대구의 노동운동가로 살아 온 장명숙(세실리아)님의 이야기입니다.
장명숙님과 함께 활동하셨거나 사연 있으신 독자들의 글도 함께 싣고자 합니다.
- 사연 보내실 곳 : 평화뉴스 pnnews@pn.or.kr / 053-421-6151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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