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사’(愛社)와 ‘해사’(害社)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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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쟁이 기자' 우호성② / 해고-승소-복직-무기정직-'유배'


‘개는 왜 짖는가?’ 그가 1980년대 후반, 신문에 연재한 콩트입니다. 글의 제목에서 보듯 세상을 풍자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말하자면 당시 5공 정권의 행태를 꼬집고, 비비고, 희화화 한 것입니다. 뒤틀린 세상풍경에 비춰 독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해 주기에 안성맞춤 이었지요.

그의 이런 글쓰기 재주는 일찍이 선을 보였습니다. 의성에서 난 그는 초등학교 6학년 때 군청에서 주최한 백일장에서 동시가 입선된 것이지요. 그 때부터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고등학교 시절에는 문예반에 들어갔습니다. 대학 입시에 실패한 후 재수할 때는 신문사 신춘문예에 응모한 소설이 가작으로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대학은 선배의 권유로 상대에 들어갔습니다. 글쎄, 숫자에 어두운 제가 상대에 들어갔으니 어떻게 좋은 결과를 바랄 수 있었겠습니까.” 그의 말은 사실에 가까웠습니다. 1988년 11월에 콩트집을 같은 이름으로 발간했지만 재미를 보지 못했습니다. 때를 맞추지 못한 것입니다. 전두환 정권이 국민의 민주의지에 무릎을 꿇는 상황에서 책의 선명성(?)이 빛바랜 것이지요.

우호성(61)님
우호성(61)님

그때 그 시절은 ‘땡전뉴스’란 용어가 일상적인 단어로 자리 잡았습니다. 텔레비전의 9시 뉴스가 으레 ‘전두환 대통령은…’으로 시작했기 때문이지요. 무소불위의 권력 이 ‘보도지침’을 앞세워 국민의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를 짓밟던 시절이었으니 이런 일은 하등 이상할 게 없었습니다.

하지만 1987년 6월, 들불처럼 일어난 민주화 물살은 언론도 비켜갈 수 없었습니다. 매일신문만 하더라도 그와 신도환, 김시형 등 경력 10년차 전후의 기자들이 주축이 되어 이듬해 7월 노동조합을 만듭니다. 전국 언론사노동조합협의회(뒤에 언노련)에도 스물일곱 번째로 가입합니다.

노동조합은 특히 편집국장추천제를 도입합니다. 기자들이 회사 측에 두 사람의 편집국장 후보를 추천하는 제도입니다. 이는 대구지역 언론계에서는 처음 있는 일로 당시 편집국장에 이용근, 조병로 후보를 추천합니다.(회사 측은 조병로 후보를 편집국장으로 임명합니다)

‘편집권에 문제 있다’ ‘무원칙․정실인사를 없애라’ ‘골프장은 사기저하 킬러’…. 1988년 8월 22일 낸 ‘매일노보’ 2호에는 이 같은 내용의 기사가 실립니다. 노동조합이 출범했다고 전근대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경영체제가 단번에 나아질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한편으로 시대적인 배경과 맞물려 예사롭지 않은 노사의 대립각을 예고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노동조합의 사무장에다 노보편집실장을 맡습니다. 그러던 중 쟁의행위가 발생하고 노사 간 대립이 심화됩니다. 급기야 편집국 조합원 52명이 서명한 ‘현 매일신문 사태에 대한 우리의 결의’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하게 됩니다. 신문 편집과 관련해 부당한 개입을 규탄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때가 1990년 4월 28일. 회사는 곧장 해사행위 및 위계질서파괴행위를 저질렀다며 극약 처방으로 대응합니다. 문화사회부에 있던 그를 주동자로 여겨 해직하고 박종봉(생활과학부), 최한태(경제부), 정지화(체육부)를 무기정직 시킵니다. 신문의 지면보도 내용을 비판하고 연대 서명한 성명서를 회사 곳곳에 부쳤다고 책임을 물은 거지요. 기자들은 애사(愛社)행위라고 하는데 회사는 해사(害社)행위로 몰았습니다.

노동조합은 즉각 부당인사라고 규탄했고 그는 외로운 법정 투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마침내 승소 했습니다. 법정에서도 해직이 부당했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복직 한 달 뒤에 사측은 기고문을 빌미로 무기정직을 내렸고 6개월 뒤에야 징계를 풀어 지방 주재기자로 발령을 냅니다.

“창녕 유배지 생활, 오히려 행복했습니다. 주재기자 사회가 그렇고 그런 곳인지도 알 수 있었고요.” ‘행복했다’는 그의 말은 아마도 복잡한 심사를 힘겹게 달랬다는 말을 달리 표현한 것이겠지요. 그는 주재기자를 끝으로 애증이 뒤섞인 매일신문을 떠납니다. 그가 기자로 뛰기 전 신춘문예로 인연을 맺은 바로 그 신문사입니다.



[박창원의 인(人) 27]
여섯 번째 연재 '사주쟁이 기자' 우호성②
글.사진 / 평화뉴스 박창원 객원기자


'곡주사 이모'와 '하회마을 뱃사공', 노동운동가 '장명숙 세실리아',
'장승쟁이 김종흥', '고서 일생 박창호' 에 이은 <박창원의 인(人)> 여섯 번째 연재입니다.
매일신문 기자로 해고와 복직을 겪고 경향신문 영남본부장을 지낸 '사주쟁이 기자' 우호성(61)님의 이야기입니다.
그 시절을 기억하는, 요즘 '사주쟁이' 우호성님과 사연 있으신 독자들의 글도 함께 싣고자 합니다.
- 사연 보내실 곳 : 평화뉴스 pnnews@pn.or.kr / 053-292-6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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