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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농사꾼'의 속내평 "면서기 어떻노?"
'농사꾼 철학자' 천규석② / 볏단 지고 농삿일...'시 쓰는 선생님'을 꿈꾸다
2010년 10월 27일 (수) 10:43:30 평화뉴스 pnnews@pn.or.kr

"1~2년만 (지도)받으면 (등단)할 수 있겠네."
친구의 손에 이끌려 서울 공덕동 서정주 시인의 집으로 찾아 갔을 때 시인이 던진 말입니다. 유명 문인을 찾아 인사하는 이른바 ‘방문 지도받기’에 간 것입니다. 시인의 집은 언덕배기에 있었고 빨간 감나무가 퍽이나 인상 깊은 한옥이었습니다. 집 앞에 당도하니 정종(청주)같은 선물 꾸러미를 든 학생, 예비 문인들로 문전성시였습니다. 말하자면 ‘정종 로비’(?)의 현장을 생생히 목격한 것입니다.

‘방문 지도받기’는 일종의 도제식 문학수업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문단으로 향하는 통로는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자유문학’이나 ‘현대문학’ 같은 문예지를 통하거나 신춘문예가 다였습니다. 하지만 문예지에 추천을 하거나 신춘문예의 심사를 하는 문인들은 대부분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이러니 ‘방문 지도받기’는 등단의 안전코스이자 지름길로 일컬어졌던 것이지요.

그 역시 몇 시간을 기다려 시인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습작을 보여줬더니 한 두 해만 노력하면 문단에 데뷔할 수 있겠다는 희망 섞인 이야길 했습니다. 그러러면 당시의 문단 형편상 시인을 부단히 따라다니고 사숙도 마다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러는 게 싫었습니다. 차라리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접고 맙니다. 그때가 1960년을 바라보는 시점이었습니다.

   
▲ 천규석(72)님

그는 왜 시인이 되고 싶어 했을까요? 그는 일제시대에 경남 창녕군 영산에서 칠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은 논 열두 마지기에 밭 여남은 두락으로 영산지방에서는 중농에 속했습니다. 농사꾼인 아버지는 그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몸에 딱 맞는 꼬마지게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는 들로, 산으로 어른들을 따라 다니며 볏단을 지고, 나무를 해오며 농삿일을 배웠습니다.

"공부 말고 일하라고 하니까 공부가 더 하고 싶었지요. 그래도 공부는 일하는 중에 틈틈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대개의 아이들이 그랬듯 학교 다니더라도 학생대접을 받기보다는 어린 농사꾼 취급을 받았지요."

그는 해방되던 해인 1945년 국민학교(초등학교)에 입학 합니다. 남들보다 늦은 7월에 학교에 들어갔고 한 달 뒤 해방을 맞습니다. 그리고 6․25가 터졌을 때 그는 6학년이었습니다. 학교 건물이 국민방위대에 접수되는 바람에 소나무에 칠판을 걸어놓은 산간 야외교실에서 수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농업중학교(영산중학교)로 진학을 합니다. 일제 때 농업기술을 가르치던 농업보습학교가 농업중학교로 간판을 갈아 단 것입니다. 이내 이 학교는 학제개편과 함께 일반 중학교로 바뀌고, 농업고등학교가 새로 생깁니다. 고등학교는 영산을 떠나 도시로 나가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 그러질 못합니다.

그는 학창시절에 혼란과 희망을 동시에 겪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를  급작스레 여읜 것입니다. 그에게 어머니와의 이별은 충격으로 다가왔고, 청소년기의 방황으로 이어집니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힘겹게 중학교를 마친 뒤 고등학교에서는 중퇴와 복교를 되풀이 하며 5년 만에 졸업을 합니다.

그에게 중고등학교 시절은 한편으로는 문학청년이라는 꿈을 심어 준 시절이었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되고 싶었습니다. 거기에다 시인이란 꿈을 하나 더 얹게 됩니다. 아무래도 중학교 때 ‘시 쓰는 선생님’ 밑에서 공부를 하고, 고등학교 때는 문학에 관심이 많은 국어선생님을 만난 것이 영향을 미친 듯합니다.

결국 그는 시도 쓰고, 선생님도 하고 싶어 서라벌 예술대학에 입학을 합니다. 교사 자격증을 얻을 수 있는데다, 예술대학인 만큼 학교에 문인들이 많아 시나 글을 쓰기가 쉬울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의 꿈은 시간이 흐르면서 ‘시 쓰는 선생님’으로 점차 진화해 간 셈입니다.

애초 그에게 꼬마지게를 만들어준 아버지는 아들이 어떠하기를 원했을까요? 농사를 천직으로 여기게 하려고 지게를 만들어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골병들기 쉬운 농사꾼 보다는 면서기가 어떻노?”라고 묻곤 했습니다. 아니면, 일제시대 면서기의 못된 힘에 질려서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봐도 이런 바람은 아버지의 한(恨)이 아들의 꿈으로 드리워진 듯합니다. 말하자면 ‘자식 농사꾼’은 안된다는 것이 ‘아버지 농사꾼’의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반세기 훨씬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랬는데-오늘-꼭 같이 묻습니다.
"면서기 어떻노?…."


   


[박창원의 인(人) 31]
일곱 번째 연재 '농사꾼 철학자' 천규석②
글.사진 / 평화뉴스 박창원 객원기자


'곡주사 이모'와 '하회마을 뱃사공', 노동운동가 '장명숙 세실리아', '장승쟁이 김종흥',
'고서 일생 박창호', '사주쟁이 기자 우호성'에 이은 <박창원의 인(人)> 일곱 번째 연재입니다.
친환경농산물과 그 가공품을 협동조합 방식으로 직거래하는 대구 한살림 천규석(72)님의 이야기 입니다.
도농공동체를 꿈꾸는 농사꾼 천규석님과 사연 있으신 독자들의 글도 함께 싣고자 합니다.
- 사연 보내실 곳 : 평화뉴스 pnnews@pn.or.kr / 053-292-6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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