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향해 '소장'을 내민 법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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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 / "현재도 반복되는, 아직도 '안장'되지 못하는..."


제법 오래 전 고인이 된 어떤 두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1948년 대구에서 나서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10대부터 노동자로 살다가 22살에 자진한 사람이며, 두 번째 사람은 1년 먼저 같은 곳에서 태어났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로 일하다 43살에 폐암으로 죽었는데, 두 사람은 생전에 서로 만나지 못했다. 태어난 시기와 장소를 빼면 사는 동안 상호 교통은 없었지만 지금 우리에게 시대정신으로 살아 있는, 전태일과 조영래에 대한 말씀이다.

故 조영래 변호사
故 조영래 변호사
전태일을 이야기하면 조영래가, 조영래를 화제에 올리면 전태일이 등장하는 것처럼 두 사람은 격정적인 연극의 주연과 조연의 역할을 번갈아 하는 존재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1970년 당시 노동자와 대학원생으로 살던 두 사람의 인연을 만든 것은 그때의 폭압적인 시대상황이였다. 전태일은 하층 노동자로 일하면서 자신이 주장할 ‘법’과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그 권리를 향유하기 위해 고뇌하다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조영래는 노동자 전태일이 간절하게 원하던 ‘지식’을 가진 자로서 자신의 지식을 사회에 내놓겠다는 결심을 전태일의 죽음으로 인해 하게 되었을 것임을 그후 그의 행적을 미루어 우리는 알 수 있다.


전태일은 열악한 노동현실과 국가권력마저 준수하지 않는 노동법에 분노했고 그것을 바꾸기 위해 동료들을 조직하여 법률이 정한 권리를 간절히 요구했지만 그 요구는 외면당하고 좌시되었다. 굴절된 현실에 그가 택한 것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외침을 유언처럼 남기면서 짧은 생을 반납하는 것이었다. 그의 삶과 바꾼 외침은 단순한 권리주장이 아니라 인간이면 누려야할 생존권의 최소한도 보장하지 않는 폭압적인 국가를 향한 저항권 행사의 효시였다. 그의 죽음은 당대의 지식인과 관료는 물론 노동자 자신 스스로도 무관심한, 캄캄한 바다 같은 노동판에 가장 먼저 불을 밝힌 등대였으며, 그 등대는 한 세대를 뛰어 넘어선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가야할 항로를 밝히고 있다.

조영래는 전태일 사후 20년을 더 살았다. 그는 전태일의 죽음이 ‘필부의 뜻’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당시 사회적 약자에게 희생만을 강요하는 폭압적 국가에 의한 타살이라는 점을 가장 명료하게 이해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쩌면 쉽게 잊혀 질지도 모를 노동자의 죽음에 대한 행장을 짓고 이를 남김은 물론 전태일이 더 살았더라면 했었을 나머지 일이 무엇인지 가장 잘 알고 실천한, 전태일이 생전에 그토록 사귀고 싶어 했던 ‘법대생 친구’였다. 그는 당시 누릴 수 있던 변호사로서의 마른 땅만을 딛고 살기를 원치 않고 노동자 전태일이 항의한 세상을 향해 ‘소장’을 내민 법률가였다.

오는 11월 13일은 전태일의 40주기이고, 12월 12일은 조영래의 20주기이다. 어쩌면 식상할지도 모르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것은 그들의 고단한 삶과 죽음이 한 세대 전의 완료된 사실이 아니라 현재도 반복되는 서글픈 현실 때문이다. 두 분의 고향 지척인 구미공단에서 사용자와 국가에게 자신의 말을 들어 달라는 수단으로 한 노동자가 자신의 몸을 불꽃에 내놓는 사건과 G20 의장국이 되었으니 국격을 높여야 한다고 떠드는 일이 동시에 벌어지는 현실을 보면, 두 분은 아직도 ‘안장’되지 못했다라는 자괴감이 든다.

그래서 일찍 떠난 두 분이 더욱 아쉽다.






[기고]
정재형 / 변호사 hanala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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