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정치야, 바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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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 칼럼] 국민이 주권자인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정치가 우선이다


우리는 지금도 익숙한 구호 하나를 기억하고 있다. 이것은 총선이나 대선만 되면 유령처럼 한국사회를 떠돌아다닌다. 지난 1992년 미국 대선에서 빌 클린턴이 내세운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라는 구호다. 클린턴은 이 한마디 구호로 부시를 이기고 미국의 제42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 구호는 곧 세계화 되었고, 무엇보다 한국사회에서는 만병통치약이 되었다. 경제는 한국사회의 모든 사회적 갈등과 정치적 논쟁을 해결하는 주술사임을 만천하에 알렸고, 신자유주의 시대를 활짝 피운 근원지가 되었다. 그런데 경제는 정말 모든 문제를 해결했을까?

모든 문제를 경제로 환원시킨 신자유주의 체제는 모든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해결사인 것 같지만, 사실은 사람들을 고통의 질곡에 빠트리는 리바이어던이다. 모두가 경제를 외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잡히지 않은 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대통령이, 장관이, 재벌이, 경제학자가 ‘경제가 최고야!’라고 외치니까 그런가보다 수긍하는 정도가 보통 사람들의 생각이다. 도대체 경제란 무엇인가. 경제는 희랍어 oiko nomos, 즉 ‘집안 살림하는 사람’에서 유래한 용어다. 말하자면 경제는 ‘가정 살림살이’라는 기원을 갖고 있다.

한 가정을 생각해 보자. 가정은 기본적으로 부모와 자식으로 이루어진 가장 작은 단위의 사회이다. 가정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어느 가정이든지 많은 결정을 내려야 한다. 쉬운 결정도 있고 어려운 결정도 있다. 누가 아침을 차려야 하는지, 누가 청소를 해야 하는지, TV 프로그램 선택을 누가 할 것인지, 가족 여행은 언제 할 것인지 등 식구 중 누가 어떤 일을 해야 하고, 그 대가로 무엇을 받아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즉, 한 가계는 각 식구의 능력, 노력, 희망에 따라 한정된 자원을 식구들에게 나눠주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회나 국가도 많은 결정을 내려야 한다. 어떤 사회든지, 어떤 국가든지 어떤 일을 해야 하고, 그 일을 누가 해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사람들의 일상적 삶은 ‘일과 대가’라는 한정된 자원의 배분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 삶에서 겪는 크고 작은 문제들은 많은 결정을 통해 해결되거나 해결되지 못한 채 남는다. 해결되지 않는 것 중에 가장 큰 걸림돌은 단연코 ‘돈’과 관련되어 있다. 말하자면 우리의 삶을 둘러싼 수많은 문제들은 이 돈과 관련되어 있는 셈이다. 이러한 사실은 ‘한 가계는 각 식구의 능력, 노력, 희망에 따라 한정된 자원을 식구들에게 나눠주어야 한다.’는 원칙이 깨졌거나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흔히 듣는 말 중에 ‘영혼을 팔아서라도 돈을 벌고 싶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각자의 삶의 질이 고단함을 반증하는 말이다. 나의 삶이 이토록 불안정하니 너의 삶이 보일 수 없다. 나부터 더 많은 돈을 가져야겠다는 무한 욕망이 너의 삶의 질을 파괴한다. 돈을 더 가지는 것과 잘 사는 것은 다른 차원임에도 사람들은 잘 사는 것과 돈을 더 가지는 것, 즉 가치와 사실을 같은 것이라고 공식화한다.

경제는 이런 개인의 혼란, 즉 가치와 사실의 혼동 사이를 파고든다. 가치를 무너뜨리고 사실을 강고히 한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갈등들은 ‘경제가 우선이다’라는 구호 앞에 무력해진다. 위기에 빠진 경제부터 살려야 각자의 능력, 노력, 희망에 따라 나눌 수 있다는 주장에 공손해진다. 정치꾼들도 한 몫을 한다. ‘경제민주화’, ‘경제활성화’, ‘창조경제’ 등으로 성장의 과실을 강조하거나, 유사한 방식으로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새경제를 주장하기도 한다. 뱀의 혓바닥으로 더 가질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의 눈짓을 보내며 민생이 문제라고 속삭인다. 결국 모든 문제는 국민들의 욕망에서 발생하는 것이 되고 만다. 일상의 삶은 이렇게 발가벗겨져 호모 사케르가 된다.

민생이 문제라고? 천만에.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 정치다. 국민이 주권자인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하는 정치가 우선이다. 주권자를 호모 사케르로 내모는 경제는 민주주의의 파산을 선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주권자의 뜻을 잘 헤아려 각자의 능력, 노력, 희망에 따라 나눠주어야 할 주권자의 대표자가 주권자를 호모 사케르로 내모는 경제는 반정치이며 민주주의의 파괴다. 정부의 주권자에 대한 신뢰 부족과 가장된 신중함은 정치의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여론과 상황이 변화를 요구하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그것은 죽은 정치다. 정치를 회복해야 할 이유다.

정치는 정의의 다른 말이다. 정의는 평등이 아니라 공평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평등이 불평등하게 취급되고 불평등이 평등하게 취급될 때 불의가 생겨난다.”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을 각기 다르게 대우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럼에도 이러한 불의가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숙명으로 되고 있다. 정의의 지연은 불의나 다름없다. 로버트 케네디가 말했듯이 정의의 지연은 곧 ‘민주주의의 부정’이다. 때문에 저항이 가장 필요하고 가장 정당화될 수 있는 경우는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대변할 때이다. 민주주의가 제 숨을 쉴 수 있는 정치의 시작은 여기서 부터다.






[평화뉴스 이재성 칼럼 56]
이재성 / 계명대 교양교육대학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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