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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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택진 칼럼] 경북대 '총장 임용 거부' 사태, 경북대 교수들은?


 며칠 전 경북대에서 총장문제와 관련한 토론회가 있었다. 50여명 남짓 참가한 토론회는 제목부터 ‘규탄 토론회’였는데 일부 패널들은 총장임용을 거부한 교육부의 처사와 함께 이 문제의 핵심당사자인 교수들을 향해 ‘왜 가만히 있느냐’며 규탄(?)하기도 했다. 교육부의 경북대 총장임명제청 거부가 알려지자 지역의 시민사회, 언론, 법조계 등은 하나같이 이에 대한 반대와 규탄의 입장을 표명했다. 지역에서 하나의 이슈에 대해 진보와 보수 구분 없이 비슷한 입장을 보인 것은 근래에 보기 드문 일이다. 그만큼 교육부의 처사가 상식적이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이 문제 해결의 핵심당사자는 경북대학교 구성원이고 그 중에서도 교수들이다. 총장선출 간선제를 받아들인 것도, 총장추천위원회에서 가장 많은 표를 행사한 것도 교수들이다. 학생들은 소수지만 1인 시위를 이어가고 있고, 한 표도 행사하지 못한 비정규교수들도 입장을 발표하고, 경북대 동문들도 뜻을 모아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가기로 했다. 지방변호사회, 지역언론, 지역 시민사회와 민주동문 등 교수들이 움직이면 힘을 모아 도와 줄 ‘우군’이 대기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정작 경북대 교수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교수회 명의로 성명서를 발표하고 학내에 현수막을 게시한 것 외에 보이지 않는다. 교육부의 총장 임용거부를 반대하고 규탄한다는 입장은 있지만 행동은 없다.

'경북대 민주화교수협의회' 주최로 열린 <흔들리는 대학, 위기의 국립대 - 현 정부의 대학 자율성 훼손 규탄 토론회>(2015.3.18 경북대 교수회 회의실) / 사진. 오택진
'경북대 민주화교수협의회' 주최로 열린 <흔들리는 대학, 위기의 국립대 - 현 정부의 대학 자율성 훼손 규탄 토론회>(2015.3.18 경북대 교수회 회의실) / 사진. 오택진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
독일 법학자 루돌프 폰 예링이 한 말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도 침해당할 수 있다는 의미로 법을 배우는 사람에게 널리 알려진 문구이다. 앞의 토론회에서 한 변호사가 이 문구를 인용하며 교수들의 행동을 촉구했다. 먹고 사는 문제를 떠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행동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반드시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하며, 해결의 과정에 자신의 ‘시간’과 ‘돈’을 들여가며 노력해야 한다. 현재와 같은 시대 분위기에선 자신에게 닥칠 직간접적 ‘불이익’까지도 감수해야 한다. 경북대 총장 임명제청 거부사태에 권리 위에 깨어있는 교수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교육부의 총장임명 제청 거부는 어떤 명분도 논리도 이유도 없다.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고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정당하고 합법한 절차를 거친 총장선출과 추천을 교육부가 공문 한 장으로 거부한 이 사태는 명백히 대학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처사다. 공주대는 경북대와 똑같은 일을 먼저 겪고 있고 1심, 2심 법원에서 ‘교육부 처분을 취소’하라고 판결했다. 상황이 이러한데 ‘대학의 자율성’을 심각히 침해당한 이 사태에 왜 ‘대학의 자율성’을 지켜야 할 교수들이 ‘침묵’하고 있는가.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많은 교수들과 소통해야 한다’, ‘총의를 모아야 한다’, ‘개인적으로 입장을 정하지 않았다’, ‘다양한 생각이 존재하고 존중되어야 한다’는 말은 그럴듯한 말이다. 그러나 교육부의 총장 임명제청 거부가 석 달을 넘어가고 있는 지금까지 이렇다 할 행동도 방침도 없는 것은, 시간만 보내며 문제해결의 때를 놓칠 뿐만 아니라 해결의 의지가 있는 당사자들과 도와줄 수 있는 ‘우군’의 응원도 놓치게 되는 것이다. 교수들이 이미 누리고 있는 기득권 위에서 ‘보신’하다면 사회의 책임있는 구성원으로 마땅히 해야 할 ‘사색’과 ‘실천’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권리 위에 잠자고 있어도 밥그릇은 챙길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닌가?

‘침묵’하는 교수에게서 ‘침묵’하는 학생들이 나온다.
‘침묵’과 ‘무저항’은 교육되어진다. ‘취업양성소’로 전락한 대학이라 하더라도 교육의 내용까지 ‘취업’으로 뒤덮인 것은 아니다. 여전히 대학에서는 ‘인권과 민주주의’, ‘사람과 사회’, ‘과학과 기술’을 가르치고 배우고 있다. 그런데 말이다. 가르치는 자가 ‘가르치는 내용’과 ‘행하는 내용’이 다르면 어떻게 되는가?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라’고 가르치며 자신은 ‘무저항’한다면 배우는 학생들은 무엇을 배우게 될 것인가? ‘저항하라’고 가르치지 않아도 명백히 부당한 권력의 처사에 소위 ‘최고지성’이라고 하는 교수들 다수가 스스로 침묵한다면, 이것을 지켜보는 학생들에게 ‘침묵’에 대해 이보다 더 큰 교육적 효과는 없을 것이다. 이신작칙(以身作則-자기가 모범을 보임으로써, 일반 공중이 지켜야 할 법칙이나 준례를 만듦)이라 했다. 백 마디 말보다 한번 행하는 것의 ‘울림’이 있는 것인데 교수들의 침묵은 다수 학생들에게 ‘침묵’의 모범사례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토론회 이후 한 재학생과 만나 총장문제와 관련해 얘기하다 ‘대학이 죽었다’고 했더니 이 친구가 ‘선배님, 대학이 죽은지는 오래됐어요’라고 한다. 죽어버린 대학을 다니는 이 친구에게 ‘대학’과 ‘교수’는 어떤 의미일까?

 ‘대학구조조정’이라는 명목 하에 ‘예산지원’이라는 칼날을 들고 총장직선제를 간선제로 바꾸라는 교육부의 권유에 자발적으로 복종한 교수들이다. 그리고 간선제로 바꿔 처음 선출한 총장후보를 거부당한 그들이 지금 가만히 있는 것이다.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사회에서 스스로 ‘가만히 있는’ 교수들에게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 생각해보라. 배부른 지식인이 배고픈 서민을 찾아가서 그들의 고단한 일상을 들여다보지 않고, 권력의 부당함에도 저항하지 않는다. 번드르한 말로 책임을 회피하고 있고 껍데기가 알맹이를 대신하고 있다. ‘가르치는 것’이 직업인 교수가 책에 나와 있고 검색하면 찾을 수 있는 지식 그 이상을 가르치기 위해 온 몸으로 노력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 가르치는 사람이 현실의 구체적인 자기과제를 외면하고 미뤄두고 책임을 전가하는데 누가 그들에게 진짜 배우려 할 것인가? 교육부의 반교육적 행태에 교수들이 ‘말과 글’을 넘어 ‘행동’으로 가르치는 자의 ‘자격’을 가지기를 기대한다.

 사족으로 한 마디 더 하자면, 얼마 전 한국체육대의 총장으로 경북 구미 출신의 ‘친박’ 정치인 김성조 전 새누리당 의원이 임명되었다. 다섯 번의 추천 끝에 교육부의 ‘허락’이 떨어진 것이다. 경북대에서 혹시라도 교육부의 재추천 요구를 받아들여 재선거를 추진하는 교수들이 있다면 재선거보다 교육부에게 누구를 뽑아야할지 물어보라고 권해주고 싶다. 그것이 국민의 세금을 아끼는 길이다.






[오택진 칼럼] 27
오택진 / <연구공간Q+> 대표.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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