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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나는 죽음의 행렬 '기억전쟁'
[김윤곤 칼럼] 10월항쟁, 이념에 의해 희생된 삶들에 대한 마지막 예의
2015년 03월 09일 (월) 10:36:38 평화뉴스 pnnews@pn.or.kr

역사학자 한홍구는 “한국 현대사는 죽음조차 죽여버린 잔인한 역사”라고 했다. 그러면서 “80년대 민족민주운동의 원천은 분명 광주였다. 처절하게 패배한 싸움인 광주가 왜 한국의 민주화운동사에서 독보적인 규정력을 갖는 것일까? 그 답은 죽음에 있다. 광주를 통해 죽음이 우리 곁에 온 것”이라고 했다.

죽음은 더 오래 전 우리 곁에 왔다. 피로 물들어 빛나는 영향력과 규정력으로 온 것이 아니다. 주로 야밤을 틈타 검은 천 용수 씌워 아무도 모르게 데려간 목숨을 서둘러 파묻어버린 죽음. 삶의 지워짐이 죽음이라면 죽음조차 지워진 죽음, 죽음조차 죽임당한 죽음으로 왔다.

“한국현대사는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와 연관된 정치적 죽음에 대해서는 애도할 수도 기억할 수도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리죽음을 한 사건에 대해서 유가족조차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 흔한 추모비 하나 세울 수 없었다.” 짧은 한국현대사는 한홍구의 말처럼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언급조차 할 수 없었던 시절이어서 길었다.

"죽음조차 죽여버린 잔인한 시대"

흔히 해방기라고 불리는 1945-1948년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아주 특별한 시기였다. 이 시기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 차원에서 이념이나 체제의 선택이 자유로웠을 뿐 아니라 이상으로나마 미래에 대한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던 ‘희망의 시대’였다. 물론 ‘혼란의 시기’이기도 했다.

해방이란 풀려나고 놓여난다는 뜻이지만 엄밀한 사회과학 용어도 아니고 실제와 들어맞는 말도 아니었다. 김달수의 소설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간파했듯 1945년 8월 15일의 ‘해방’은 사실상 식민통치의 지속 상태였다. 미군은 해방군으로 오지 않았다. 맥아더가 한반도에 발을 들여 놓으며 공표한 포고문은 “나의 지휘 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를 점령한다”고 끝맺었다.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의 말 본새였다. 해방이 됐다는데 군정이 들어선 아시아 유일의 나라였다.

 8월 15일 이후 물가는 거의 매일같이 뛰었다. 성냥 한 갑이 10원으로 폭등했다. 10원이면 책 3권 이상을 살 수 있고 버스 18~20구간을 탈 수 있는 돈이었다. 미군정은 오락가락했다. 자유판매제였다가 다시 통제되기 시작한 쌀값은 한 말에 1천원이 넘었다. 전년보다 4~5배나 뛰어오른 것. 매점매석 단속은 힘없는 일반 도소매상을 대상으로 한 것일 뿐이었다. 

패전국 일본 내부의 식량사정이 악화되면서 쌀값이 폭등하자 품질 좋은 조선쌀을 일본으로 밀수출해 떼돈을 벌려는 큰손들이 공공연히 매점매석을 했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식량파동과 기근의 실질적인 범인들인 큰손들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나마 폭등한 쌀을 시중에서 구할 수가 없었고 양식을 구하지 못해 굶던 시민들은 급기야 기민(飢民)시위를 벌였다.

사회주의는 독립운동 구심, 당시의 양심


징용이나 징병 등으로 해외로 나갔던 사람들과 일본이나 만주 등지로 이주했던 사람들이 귀국하고 월남하는 사람들로 330만 명의 인구가 는 탓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미군정의 실패였다. 무엇보다 기가 막힌 것은 전범이나 반민족행위로 처벌 받을까 두려워 일제히 도망갔던 친일 부역자들이 일제히 각종 권력 전면에 재등장했다는 사실이었다.

일본 식민지 재생산체제에 철저히 편입돼 외부의 원료와 시장에 의존하던 산업은 쇠퇴하거나 마비상태였다. 실업난이 심각했고 민중의 빈곤은 가속화했다. 그들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원조에 의존해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기아선상에서 허덕였다.

1956년 3월 31일 진보당추진위원대표자회의에서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조봉암은 특권정치, 특권경제를 쇄신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여러분은 모든 피압박 민중의 대표”라고 말했다. ‘피압박 민중’이란 일제강점기와 동의어였던 ‘피압박 민족’을 연상케 하는 말이었다.

당시 미군정기 여론조사에 따르면 1946년 당시 정부 형태에 있어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선호가 전체의 85%를 차지했다. 경제체제에 있어서는 사회주의를 원한다는 입장이 전체의 70%였다. 중도 또는 좌익을 지지한다는 사람이 전체 조사대상자 8,476명 가운데 70%인 5,979명(4,577명과 1,402명)이었다. 1930년대 이후 좌익 세력들이 민족해방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됨에 따라 해방정국에는 전반적으로 사회주의와 좌익 이데올로기가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일제가 가장 철저히 탄압했던 세력이 사회주의자와 좌익세력이었다. 이들은 독립운동의 구심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사회주의운동은 곧 독립운동의 다른 이름이었다. 사회주의는 당시의 상식이자 양심이었다. 이들이 10월 항쟁을 이끌었고 이후 이와 관련 재소자, 국민보도연맹원, 그리고 예비검속자로 대구형무소에 수감돼 있었다.

전쟁의 와중에 이들은 이송을 핑계로 끌려가 학살됐다. 군경은 이를 은폐했다. 정확히 몇 명이 희생됐는지는 모른다. 1,400여 명 또는 그 이상으로 추정할 뿐이다. 201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 학살에 관한 진상보고서를 냈다.

   
▲ 대구 중부경찰서 내 경찰역사체험관의 전시물. 중부경찰서는 1946년 10월 1일 일어난 '10월 항쟁'에 대해 "영남폭동사건", "조선공산당의 지령과 선동으로 대구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대구 10.1폭동사건이라고도 한다"고 설명했다.(사진 위, 2015.3.5 / 사진. 평화뉴스) 그러나 '대구10월항쟁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10월항쟁유족회)의 항의를 받고 이 부분을 수정하기로 약속한 뒤 임시조치로 해당 전시물을 가림막으로 가렸다.(사진 아래. 2015.3.5 / 사진 제공. 10월항쟁유족회)
   

10월항쟁을 위한 기억투쟁, 상식투쟁


학살의 책임자인 경찰이 반성은커녕 버젓이 10월항쟁을 ‘10월폭동’이라고 매도하다가 시민의 눈에 들켰다. 대구 중부경찰서 내 경찰역사체험관 사진 전시물의 설명 내용이 문제였다. 중부서는 10월항쟁유족회와 한국전쟁전후경산코발트광산민간인희생자유족회의 항의를 받고 이 부분을 시정하기로 약속하는 한편 임시조치로 해당 전시물을 가림막으로 가렸다.<평화뉴스 / 10월항쟁이 '영남폭동'?...대구 중부경찰서의 "역사왜곡">

세상이 변하기는 변했나 보다. 유족회의 항의에 경찰이 제꺽 움직이는 걸 보면 말이다. 이만한 세상을 만들기까지 고통과 분노와 슬픔의 날들을 의연히 견디며 열과 성을 다한 유족회원들께 경의를 표한다.

땅속에 묻혔던 유골들이 속속 발굴되면서 진실이 살아 돌아오고 있다. 존엄하고 정의롭고 때로는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던 삶들은 땅속 육탈한 유골로만 남았다. 이 땅에는 억울한 죽음들이 너무 많다. 진정한 ‘기억투쟁’은 지금부터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정권이 함부로 동원한 이념에 의해 희생된 삶들 앞에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예의를 표하려는 ‘역사투쟁’이며, 인간이 인간에 대한 마지막 예의를 다하려는 ‘상식투쟁’이기도 하다.

   





[김윤곤 칼럼 5]
김윤곤 / 시인.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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