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 구지에서 앞산까지, 대구에서 가장 긴 600번 시내버스의 새해 첫 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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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 막차 100km 달려 1일 자정 하차
승객 대부분 대리기사·자영업자·이주민·택시
"빚 갚느라 투잡, 잘 살았으면"..."70번 수술, 건강"
"일흔돼도 일했으면", "나보다 당신이 행복하길"


한해의 마지막을 닫을 막차가 밤길을 달린다. 
 
어두컴컴한 대구 달성군 구지면 국가산업단지. 지난해 12월 31일 밤 10시 17분 600번 시내버스가 2023년 마지막 운행을 시작했다. 구지산단의 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을 내달리는 이날의 심야버스 운전대는 36년차 베테랑 드라이버인 사공구(65.해피투게더 현대교통) 기사가 잡았다. 

대구지역의 최장거리 시내버스 노선인 600번은 2시간 넘게 100km 남짓한 거리를 운행한다. 목적지는 남구 앞산공원 정류장이다. 한해의 막차는 2024년 1월 1일 새해를 맞이하는 첫차가 된다. 
 

   
▲ 대구 최장거리 시내버스 운행 노선 600번 막차가 텅빈 도로를 달리고 있다.(2023.12.3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 600번 시내버스 대구 달성군 구지면 국가산단 첫 정류장 출발(2023.12.3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늦은 밤 시내버스에 타는 승객은 많지 않았다. 새해 첫날을 앞두고 있어 평소보다 더 적었다. 거리는 한산했고 정류장에는 사람 한명 없이 텅텅 비었다. 버스의 헤드라이트만 도로를 비출 뿐이다.

막차에 오른 손님들은 세상을 참 열심히 살아가는 이웃들이었다. 대리운전기사, 택시운전사, 이주노동자, 자영업자, 취업준비생 등 투잡에 쓰리잡까지 하는 가장들이 많았다. 

가게 문을 닫고 대리기사를 하는 50대, 어린 아들을 둔 네팔 이주노동자, 일자리를 따라 지역으로 온 청년, 퇴근하는 택시기사. 승객 대부분은 서민들이었다. 심야버스는 평소에도 승객이 20명 남짓인데 연말은 더 손님이 없다. 그래도 버스는 달린다. 승객들은 정류장에서 버스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혼자서는 잘 살 수 없어, 지역사회가 잘 돼야 모두 잘 살아" 

한참 달리자 드디어 첫 손님이 버스에 탔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사공구 기사가 승객에게 큰 목소리로 인사하자 그도 함께 복을 기원한다. 장갑으로 콧물을 얼른 훔친 그는 양볼이 빨갛다. 50대 이승동(가명)씨는 대리운전기사다. 이씨는 대리를 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손목에 업무용 핸드폰을 고무줄로 감아놨다. 일하기 좋게 하기 위해서다. 버스에 올라서도 한참을 전화를 한다. 
 

대리운전기사를 하고 집으로 귀가하는 600번 막차 첫 승객(2023.12.3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대리운전기사를 하고 집으로 귀가하는 600번 막차 첫 승객(2023.12.3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새해소망을 묻는 질문에 이씨는 "그냥 제 소원은 우리 지역사회가 잘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저 혼자서는 잘 살 수가 없다"며 "제가 잘 되려면 대구가 잘 돼야 한다. 그래야 나도, 우리 모두가 잘 산다"고 했다. 이씨는 오늘은 여기까지 일하고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새해를 맞이한다.  

"돈 잘 벌고 건강하고 행복하게...멀리 가족들도 안녕하길"

첫 승객이 내리고 두번째 승객이 탔다. 네팔에서 온 이주노동자 라잔(35)이다. 한국에 온지 5년째인 라잔은 현풍 한 공장에서 일한다. 부인, 4살 아들과 함께 산다. 새해소망은 "부인, 아들과 함께 돈 잘 벌고 행복하게 잘 살기"다. 또 "멀리 네팔 가족들도 안녕하길 기도한다"며 "다른 것은 바라는 게 없다"고 말했다. 한참을 3명이 심야버스를 타고 달린다. 삑~버스 하차벨을 누르고 라잔이 내린다. "해피뉴이어(Happy New Year)" 라잔과 나, 사공구 기사 3명이 서로를 향해 힘차게 외친다. 
 

600번 버스를 기다리는 네팔 이주노동자 라잔(2023.12.3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600번 버스를 기다리는 네팔 이주노동자 라잔(2023.12.3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참 열심히 살았는데 힘들었던 한해...빚 갚느라 투잡·쓰리잡"

이번 손님은 50대 후반 자영업자다. 가게 문을 닫고 또 대리기사 일을 하러 간다. 투잡을 뛰는 그는 "참 열심히 살았는데 힘들었던 한해였다"며 "영화배우 이선균씨를 참 좋아했는데 그렇게 돼서 일단 너무 가슴이 아팠다. 안타까운 한해였다. 세상이 좀 덜 시끄럽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좋은 말을 많이 하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고 기원했다. 그러면서 "집 값 때문에 빚 갚느라 투잡, 쓰리잡을 뛰는 사람이 많은데 정치권이 힘을 보태 금리를 내리고 잘 살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또 "70번 수술하느라 가족들이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어했다"며 "안 아프고 사고 없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 돈이나 명예도 좋지만, 건강이 최고다. 맘 고생을 안해야 한다"고 말했다.  
 

새해맞이 행사 후 집으로 향하는 시민들(2024.1.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새해맞이 행사 후 집으로 향하는 시민들(2024.1.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심야버스에서 새해맞이..."5, 4, 3, 2, 1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대구 도심으로 접어든 버스, 그 사이 한해를 넘겨 2024년 1월 1일이 됐다. 한해의 막차는 새해 첫차가 됐다. 사공구 기사와 서로 덕담을 나눴다. 심야버스에는 둘 밖에 없다. 거리에는 새해맞이 행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거나 삼삼오오 모여 카페나 술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새해 첫차 승객이 버스에 올랐다. 직장 때문에 대구지역으로 이사온 30대 청년이다. 

"새해소망?...나보다 당신이 늘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는 교회에서 송구영신(送舊迎新) 예배를 드리고 나와 집으로 가는 길에 600번 버스를 탔다. 그는 "개인적으로 바라는 새해소망은 딱히 없다"고 말했다. 다만 "새해소망을 굳이 골라보라면 나보다 당신이, 기자님이 늘 행복했으면 하는 게 새해소원"이라고 말했다. 새해 첫차 손님도 정류장에 내렸다.
 

새해 첫날 첫 손님이 600번 버스에 탔다.(2024.1.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새해 첫날 첫 손님이 600번 버스에 탔다.(2024.1.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남명삼거리, 현충삼거리 이제 심야버스는 곧 마지막 정류장에 내린다. 더 이상 손님은 없다. 

36년 시내버스 운전기사..."일흔까지 건강히 일했으면"

앞산공원 정류장에 1일 새벽 12시를 훌쩍 넘겨 버스는 정차했다. 끝으로 사공구 기사에게 새해소망을 물었다. 그는 "안 아프고 일흔까지 건강하게 일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후배들이 더 많이 들어오는 것, 사고 없이 안전 운전하는 것, 모두가 행복 것이 최고"라고 '엄지 척' 포즈를 취했다. 
 

   
▲ 600번 심야버스 운행을 마치고 '엄지 척' 하는 사공구 시내버스 기사(2024.1.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 새해 첫 운행을 마치고 남구 앞산공원 정류장에 정차한 600번 버스(2024.1.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2시간 넘게 쉼 없이 달린 600번 시내버스는 운행을 멈췄다. 불을 끄고 다시 차고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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