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아픔 보듬은 원유술 신부..."더 낮은 곳, 더 가난한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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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사제' 원유술 대구 삼덕성당 주임신부, 44년 사목 '은퇴'
80~90년 노동사목, 사할린 선교...대구경북 40여개 NGO 힘보태
윤석열 정권 비판 "지켜보기 무참...시민 고통에도 아파하지 않아"
시민사회에 쓴소리 "안온함에 익숙...더 낮은 곳, 진리에 앞장서라"


"내 이야기 들을 게 뭐가 있다고...이제 말할 것도 없다"

시대의 아픔을 보듬은 원유술(69.야고보) 대구 삼덕성당 주임신부가 44년 만에 은퇴했다. 

원 신부는 대구 중구 삼덕동 삼덕젊은이성당에서 지난 27일 오후 은퇴 미사를 집전했다. 많은 신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난 44년 동안의 사제생활을 마무리하는 강론을 펼치고 성당을 나섰다. 

이틀 뒤인 지난 29일 삼덕성당에서 만난 원 신부. 여전히 가톨릭 사제복인 까만색 셔츠에 하얀색 로만칼라를 입고 있다. 거리에서 알아보는 사람이 많다. 원 신부는 이름이나 별명을 부르며 "이제 떠나니까 마지막으로 내 얼굴을 실컷 보라"는 농담을 던진다. '거리의 사제'답게 누구와도 격이 없다. 
 

   
▲ 44년 만에 은퇴한 원유술 신부가 삼덕성당 인근 식당에서 대화를 하고 있다.(2023.12.29)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 가톨릭 신자들과 인사를 나누는 원유술 신부(2023.12.29)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 지역 시민운동 대부격인 원 신부는 40년간 시대의 아픔과 고통을 지켜봤다. 정치적, 사회적 목소리를 서슴없이 냈고, 곁을 내주었다. 하지만 최근 윤석열 정부를 지켜보는 노(老) 신부의 마음은 착잡하다. 그는 윤석열 정부를 향해 직격 발언을 했다. "한마디로 검찰 정부다. 아무나 잡아들이고, 죄를 덮어씌울 수 있다"며 "나라 전체가 법원이 됐다. 법과 돈 타령만 하는 시대가 됐다"고 비판했다.

특히 "세월호 참사나 10.29 이태원 참사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희생자를 '사고자'라고 표현하고, 참사를 '사고'라고 말하는데 책임지지 않는 태도"라며 "국가가 참사에 대해서 책임지지 않고, 고통에도 아파하지 않는 것은 거꾸로된 사회다. 지켜보기 무참하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럼에도 끝까지, 하는데까지 해봐야 한다. 싸우고, 말하고 모여야 한다"고 말했다. 

◆ 자연스럽게 최근 시민사회를 지켜보는 심정을 밝혔다. 역시 쓴소리가 나왔다. 원 신부는 "전태일,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이런 말들이 다 옛날 이야기가 됐다"면서 "물질적인 풍요 속에 사회의 가치가 '돈, 돈, 돈'으로 바뀌었다. 내가 지금 이 세상을 바라보면 그저 막막하다"고 말했다. 
 

   
▲ 대구 중구 삼덕성당에서 열린 원유술 주임신부의 은퇴 미사(2023.12.27) / 사진.천광호
   
▲ 은퇴 미사를 지켜보는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2023.12.27) / 사진.천광호


이어 "시민단체? 요새 시민단체가 있는가. 우리 자체가 힘듦을 싫어한다. 편안함과 안온함에 익숙해졌다"며 "힘들게 살지 않으려 한다. 시대가 정부가 잘못해도 그게 당연한 것처럼 그냥 지나간다. 그들의 목소리들이 들리지 않는다. 모이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다. 참 답답하다"고 전했다.

운동에 대한 '허무'가 없냐는 질문에 "전쟁의 역사는 기록돼도 평화의 역사는 잘 안쓰여져서 그렇지 돌이켜보면 꼭 그렇진 않다"고 했다. 이어 "시민사회는 더 낮은 곳, 더 가난한 곳으로 가고 진리에 앞장서야 한다"면서 "일본에 쓰나미가 터졌을 때 소방관과 사회복지사, 공무원들은 쓰나미쪽으로 향하고 사람들은 산 위로 올려보내 목숨을 구했고, 미국 9.11 테러 때도 사람들은 내려보내고 소방관들은 건물로 올라가 목숨을 바쳤다. 감동을 주는 삶이 시민운동에 있었는지 돌아봐야 한다"고 했다. 
 

이라크 파병 반대 행진(2004.7.25), 4대강사업 저지 시국미사(2010.4.10) 원유술 신부 / 사진.평화뉴스
이라크 파병 반대 행진(2004.7.25), 4대강사업 저지 시국미사(2010.4.10) 원유술 신부 / 사진.평화뉴스


◆ 이제 그는 은퇴한다. 하지만 사목자로서의 삶을 이어간다. 경북 고령군 친형제들 곁으로 가 터를 잡는다. 그리고 부산에서부터 서울까지 전국 방방곡곡의 노숙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가장 가난하고, 낮은 곳으로 간다는 것이다. 원 신부는 "나를 만나려면 동대구역이나, 서울역, 지하철역으로 와라. 그 사람들 어째 사는가 봐야지. 사회적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했다. 

◆ 2024년 새해 소원은 "모두가 좀 희망적인 삶을 살길 바란다"고 밝혔다. 그는 "올해 매일 나쁜 소식, 나쁜 뉴스가 많았는데 새해에는 좀 좋은 뉴스, 희망적인 소식이 많아지길 바란다"고 기원했다.
 

원유술 야고보 신부 퇴임 사진전 중 소신학교 등 학창시절 모습 / 사진.원유술 신부 소장
원유술 야고보 신부 퇴임 사진전 중 소신학교 등 학창시절 모습 / 사진.원유술 신부 소장


원 신부는 1954년생으로 대구에서 7남매 중 6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앞산 근처 소신학교 성모중고등학교에 입학해 10대부터 사제의 꿈을 꿨다. 1970년대 대건신학대학(현 광주가톨릭대)에 입학해 1979년 졸업하고 사제품을 받았다. 박정희 유신 독재정권, 1979년 10.26, 전두환 신군부의 12.12 군사 쿠데타가 모두 이 시기다. 그리고 고향 대구로 돌아와 수성성당, 대봉성당, 남산성당 보좌 신부를 거쳐 도동성당, 죽전성당, 동인성당, 성김대건성당 주임신부, 범어성당 사목을 맡았다.
 
'거리의 사제'의 삶을 살게 된 것은 1986년 운명의 해에서 시작된다. 사회사목으로 가톨릭노동청년회(JOC)를 맡으며 노동자들의 실제 삶을 처음 봤다. 당시 대구는 섬유도시였다. 많은 청년들은 공장노동자를 비하하는 말인 '공돌이', '공순이'로 불렸다. 냉난방 시설 없는 일터에서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빵과 음료수가 나오는 날에는 철야가 당연했다. 손가락, 손목이 절단된 채 찾아오는 이들도 있었다. 사장님은 뭐가 문제냐며 오히려 화를 냈다. 산업재해라는 말이 통용되던 시기가 아니였다. 국민학교(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10~20대 청춘들이 스러져갔다.

사제의 길만 줄곧 걸어온 원 신부에게 세상은 처참했다. 사목활동은 '노동운동'으로 번졌다. 원 신부와 힘을 합친 지역 대학가 청년들은 야간학교(야학)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산재 부당성 등을 교육했다. 국가의 주요 관찰 대상이 됐다. 당시만해도 노동운동, 노조활동은 '빨갱이', '용공단체'로 몰렸다. 알몸수색도 당하고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안기부 요원들이나 경찰과도 여러차례 싸웠다. 이 과정에서 가톨릭노동청년회가 '용공단체'로 몰려 뉴스에 나오자 당시 천주교대구대교구장 이문희 대주교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원 신부는 "알겠다. 그러면 나는 내 양심에 어긋나는 것은 따르지 않겠다. 소신껏 살아야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때부터 외골수 인생이 시작됐다"고 기억했다. 이어 "나름대로 나팔바지도 입고 멋도 아는 사람이었는데, 노동자들의 실제 삶을 보면서 나도 똑같이 살아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살고 있다"고 말했다.
 

선교 활동 중인 원 신부의 모습 / 사진.원유술 신부 소장
선교 활동 중인 원 신부의 모습 / 사진.원유술 신부 소장

    
노동자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다보니 자연스럽게 사회운동으로 활동 영역이 넓어졌다. 1981년 5월 5.18운동 1년을 맞아 광주 시국미사에 참석해 제일 앞에 십자가를 들고 행진했다. 이어 대구에서 처음으로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서 5.18 항쟁의 진실을 알리는 사진전을 열었다.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박종철 열사가 신군부의 강압 수사 중 고문 치사로 사망하자 진실규명을 촉구하며 2주간 단식투쟁을 벌였다. 그리고 '국민운동본부'를 발족시켰다. 이후 민족통일연대 등 40여개 NGO(시민단체)를 만들고, 협업하며 사회운동을 펼쳤다. 성당이 원천 봉쇄되면 거리로 나가 시국미사, 장례미사를 펼쳤다. 동료 사제들도 원 신부를 조용히 거들었다. 함세웅, 지학순 신부 등과 함께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정의구현사제단을 만들었다. 1세대 사제단은 그렇게 출범했다. 

1987년 6.29민주화 선언으로 직선제가 되자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해 구소련으로 사목을 떠났다. 러시아 사할린이 목적지였다. 근현대사 역사에서 러시아로 강제징용된 우리 동포들의 어려움을 돕기 위해서다. 대구에서 공산권으로 사목을 간 최초의 사례다. 아무 것도 없는 불모지에서 2년여만에 '성야고보성당'을 지어 15명에게 세례를 줬다. 그리고 1995년에 다시 고향 땅 대구로 돌아왔다.  

성김대건성당, 범어성당에 이어 경북 포항 오천성당, 죽도성당, 대구대교구 제4대 대리구장 등 경북에서도 12년을 보냈다. 돌아온 한국은 떠날 때와는 영 딴판이었다. 1990년대 후반, 한국은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국민들의 삶은 빈부격차, 양극화가 심각해졌다. 1997년 IMF(외환위기)까지 터졌다. 

시민운동 계기가 됐다. 대구참여연대를 창립해 오래 공동대표를 맡았다. 낙천낙선운동본부에서도 활동했다. 6대 종단(천주교, 기독교, 불교, 원불교, 천도교, 유교) 대표들을 모은 종교인평화회의도 만들었다. 주한미군 장갑차 효순이 미순이 여중생 사망 사건 촛불집회, 2004년 이라크 파병반대 도보행진을 했다. 이어 4대강 저지 대구생명평화미사를 했고, 포항환경운동연합도 창립했다. 2013년에는 '국정원 대선개입 규탄 민주주의 수호 시국선언문'에 이름을 올렸다. 2014년 세월호 참사가 터졌을 때는 포항에서 자비로 북부해수욕장에 분향소를 차리고 위령제를 지냈다. 올해 8월 7일에는 '친일매국 검찰독재 윤석열 퇴진 주권회복 월요시국기도회'에서 미사 주례를 했다.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윤석열 정권에 이르기까지 시대의 아픔에 목소리 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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