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평화를 누가 깨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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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서남아시아 전쟁과 팔레스타인 난민의 역사 ①
- 성상희(변호사. 생명평화아시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2개 국가 해법은 누가 거부하고 있는가

 

이스라엘 정부 수립과 팔레스타인인의 비극

2023년 10월 7일 팔레스타인 하마스군에 의하여 시작된 팔레스타인 – 이스라엘 전쟁은 6개월째인 24년 3월 현재 팔레스타인 땅인 가자지구에서 지속되고 있다. 이스라엘국가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각각 통치를 하고 있는 지역, 즉 현재의 이스라엘 영토로 알려진 부분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양쪽을 합하여 전체 영토가 원래 ‘팔레스타인’이라고 불려지던 땅이었다. 이 팔레스타인 땅에 국가권력이 들어선 것은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정부 서립 선포였다. 이스라엘 정부가 들어서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그 구체적 과정은 생략한다. 다만 여기에서는 1차대전에서 오스만투르크와 전쟁을 벌이던 영국이 오스만 제국에게 억압을 받고 있던 아랍인들의 호감을 얻어 전쟁에서 자국을 지지하도록 하기 위하여 팔레스타인 지역에 아립인을 위한 국가를 세울 것이라는 맥마흔선언을 한 후 전쟁 끝무렵인 1917년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국가를 세워주겠다는 밸푸어 선언을 하여 모순되는 두 약속을 한 것에서부터 비극이 본격 시작되었다는 것만 확인한다. 

 제1차 세계대전은 영국,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고, 중동의 거대한 오스만 투르크 영토는 현재의 튀르키에 쪽만 남기고 나머지 서남아시아 지역(중동) 지역 전체를 영국과 프랑스가 그들의 뜻에 따라 분할하여 지배하거나 독립을 시키게 된다. 

홀로코스트로 큰 비극을 겪은 세계 각지의 유대인들 사이에 시오니즘 운동이 일어났고, 시오니즘의 투자이민이 상당히 성공하여 1930년대 인구 구성분포를 보면 아랍인 60만에 유대인 10만 정도가 팔레스타인 땅에 살고 있었다. 미국 대통령 해리스 트루먼의 비호를 받는 유대인들은 각종 로비와 여론몰이 선동에 나섰고, 점차 팔레스타인 지방의 사태가 심각해지자 결국 1947년 UN이 나서서 결의안을 만들어 낸다. 그 주요하 내용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에게 각각의 나라를 세워주고  분쟁이 심한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은 UN이 관리하겠다”’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적극적으로 환영하였고, 팔레스타인인들은 UN결의안을 거부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의 뜻을 무시하고 1948년 5월 14일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언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그들이 다수를 이루면서 소수의 유대인과 더불어 살고 있던, 그래서 사실상 자신들의 영토로 생각하고 있었던 팔레스타인 땅에 그들의 나라와 더불어 유대인국가를 세운다고 하니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과정을 역사에서 살피는 비판적 견해들은 당시 2국가 해법을 제시한 유엔이 팔레스타인의 비극을 가져오게 되었다고 본다. 사실 당시에는 팔레스타인 영역에서 유대인과 아랍인들이 무리없이 공존하고 있었으므로 통합된 국가를 세우는 것이 가능한 상황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다수의 견해로 보인다. 그런데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연합이 유대인을 위한 국가를 선물하면서 좁은 땅에 2개의 국가 혹은 민족집단이 나타나게 되고 전쟁과 분쟁의 씨앗을 뿌린 것이었다. 

  이스라엘 정부 수립 직후 요르단 등 인접 아랍국가들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1차 팔레스타인 전쟁이 일어난다. 당시 아랍국가들이 오판을 하여 이스라엘을 가볍게 여기고 침공을 하였다가 패배를 한 결과 고통을 당하게 된 것은 그들 나라의 인민이 아니고 팔레스타인인들이었다. 그 전쟁 이후로 지금까지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 영토 내에서는 이등국민으로 살아가고 있고, 팔레스타인 나머지 지역에서는 점령지 혹은 사실상 점령지에 가까운 환경에서 피압박 민족으로 살아가고 있거나, 인근 아랍 국가를 중심으로 고향을 등진 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비록 이스라엘의 건국이 폭력적이고 지역 평화를 깨는 잘못된 정책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였지만, 승패의 전망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무력을 동원하여 해결하려고 한 것은 평화의 가치를 깨트릴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 최악의 경우를 초래하여 팔레스타인 인민들에게 고난과 치욕을 가져다 준 큰 원인이 되었다. 

(중동이라는 지역 인식은 유럽인들의 시각에서 근동, 혹은 중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던 것이고, 객관적으로 보면 그 지역을 가까운 동쪽 혹은 동쪽의 중간이라 할 수 없다. “중동이라는 용어는 유럽 제국주의자들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 할 수 있다. 세계지도를 놓고 보면 서남아시아가 가장 근접한 표현이 될 것이다. 그래서 글쓴이는 이 전쟁들을 ‘서남아시아 전쟁“ 혹은 ”팔레스타인 전쟁“이라 부른다.) 

  2차, 3차, 4차 서남아시아 전쟁을 통하여, 특히 3차 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점령정책을 강화하면서 팔레스타인 민족(인민)이 살아가는 땅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로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나마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 이스라엘 군이 철수를 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이 어느 정도 독립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1993년 오슬로협정 이후에 이루어진 일이다. 

사진 출처. KBS 뉴스 [특파원 현장] 휴전 불발 속 시작된 라마단…동예루살렘은 긴장 고조(2024.03.11) 방송캡처
사진 출처. KBS 뉴스 [특파원 현장] 휴전 불발 속 시작된 라마단…동예루살렘은 긴장 고조(2024.03.11) 방송캡처

1964년에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를 결성하여 이스라엘에 맞섰고, 1969년에 아라파트가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의장이 되면서 무장투장을 포함하여 강력한 반이스라엘 투쟁을 벌이게 된다. 1987년에는 이스라엘의 억압에 맞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에서 봉기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군의 공격으로 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1차 인티파다'(봉기)이다. 인티파다는 아랍 말로 '반란' 또는 '봉기'라는 뜻이다. 2000년 아리엘 샤론의 예루살렘 팔레스타인 지역 방문으로 인한 충돌이 계기가 되어 2차 인티파다가 일어났고, 수년간 충돌이 지속되었다. 2005년에는 마흐무두 압바스가 자치정부의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2006년에 의회 선거에서 급진 정파 하마스가 승리하여 집권을 하게 된다. 이후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가자지구는 하마스가 지역민의 대표자로서 통치를 하고, 서안지구는 파타가 대표자로서 통치를 하는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분할이 일어났다. 

오슬로협정(Oslo Accords) 과 2국가 해법

1991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해결을 위한 마드리드 평화회담(Madrid Peace Conference)이 개최되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1993년 1993년 9월 13일 이스라엘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총리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 의장이 평화를 위한 역사적인 합의를 이루었다. 오슬로협정이다. 협정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이 서로의 합법적인 존재를 인정하는 최초의 합의였다. 이스라엘은 PLO를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공식적인 기구로 인정하였으며, PLO는 무장투쟁을 중단하기로 약속하고 이스라엘이 평화롭게 살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였다.

 2국가 해법에 기반한 평화 프로세스 정착을 위해 체결한 협정이다. 공식적인 명칭은 '임시 자치 협약에 관한 원칙선언(Declaration of Principles on Interim Self-Government Arrangements)'이다. 오슬로협정은 1967년 전쟁 이후 점령당한 팔레스타인 영토에서의 이스라엘 철수를 골자로 하는 UN 안보리 결의안 242호와 1973년 중동전쟁 이후 결의안 242호를 재확인한 UN 안보리 결의안 338호의 내용을 기반으로 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향후 5년 내에 팔레스타인을 통치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lestine Authority)를 세우는데 합의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한 조치로써 가자지구 및 예리코 지역에서의 이스라엘군 철수,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대한 권한 이양,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권한에 관한 내용 등의 조항을 포함하였다. 오슬로협정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공존이라는 2국가 해법을 사실상 인정한 첫 합의라고 평가된다. 그러나 이후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라빈이 이스라엘의 극우 세력에 의해 암살되고, 팔레스타인에서는 하마스가 집권하면서 대이스라엘 강경투쟁을 지속하고, 이스라엘의 정착촌 건설 확대 등의 악재가 겹치며 오슬로협정은 더 이상 진척을 이루지 못하였다. 현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대체로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인정하는 반면에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수립을 반대한다. 사실상 라빈의 암살 이후 그들이 약속하였던 2국가 해법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보면서 원칙적인 입장을 지키는 팔레스타인 사람들, 특히 이 분야의 전문적 식견을 가진 학자들은 오슬로 협정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짜그러진 영토에서라도 그들의 평온한 공간, 즉 팔레스타인 국가의 건국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까지가 2국가 해법의 역사이다. 즉 이스라엘 건국 당시에 팔레스타인인들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 국가가 세워지는 것을 수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수차례의 전쟁에서 그들의 우호세력인 아랍권이 패배하면서 점령과 축출, 억압이 일상화되고, 인간 존엄성의 한계를 경험하는 극단적 억압 상황에서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처음에는 수용할 수 없었던 이스라엘 국가의 존립을 인정하고 현저히 줄어든 영토에서 그들의 독립국가 수립을 원하는 내용으로 그들의 생존전략을 변경한 것이다. 평화의 가치에 합당한 태도이다. 

반면 이스라엘은 그들이 건국 당시에 그렇게 애절하게 원하였고, 오슬로 협정에서 굳게 약속하였던 2국가 해법을 부정하고 팔레스타인 지역 전체가 그들의 땅이라는 배타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세계 각국의 시민들이 팔레스타인에 우호적이고 연대감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최강대국 미국이 이스라엘의 손을 확실히 들어주고 있는 상황이어서 이스라엘의 약속위반과 안하무인의 태도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기고]  성상희 / 변호사. 생명평화아시아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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