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의 의미와 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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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 칼럼] 거대하고 지속적인 일그러짐, 우리에게 전하는 의미는

 
세월호 참사 100일이 지났지만 세상은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대통령이 국민에게 사과하면서 책임지고 문제해결을 약속했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지난 100일 동안 청와대와 정부 여당이 고작 한 짓이라곤 국민을 상대로 한 유언비어 유포 정도다. 세월호 국정조사 위원장 심재철 의원은 “학교 수학여행을 가다가 희생된 사건을 특별법을 만들어 보상해 달라는 것은 이치에도 어긋나는 것”이며, “안전사고로 죽은 사망자들을 국가유공자들보다 몇 배 더 좋은 대우를 해달라는 것이 세월호 특별법”이라는 문자메시지를 유포했고, 새누리당 주호영 정책위원장은 세월호 참사는 “손해 배상 관점에서 보면 기본적으로 교통사고”라는 폭언을 하였으며, 정홍원 총리는 실종자 가족들에게 “내 자녀, 가족이 몸을 바쳐서 세상을 바꿨다고 위안을 삼아 달라”는 망발을 일삼은 것이 전부다. 그나마 세월호 참사 규명 특별법도 안개 속이다. 오죽했으면 유가족이 나서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요청하는 지경까지 왔을까.

세월호가 ‘세상을 바꿨다’고? 정말 세상이 바뀌었는가? 불행히도 세상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300여명을 죽음으로 내몰고도 문제해결을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하는, 아니 취하지 않는 정부와 국회를 가진 대한민국이 바뀌었다고 다 잊으란다. 다 잊고 일상으로 돌아가란다. 정작 바뀌어야 할 사람들은 아무런 반성 없이 계속해서 국민들을, 유가족들을 훈계하고 질책한다. 어제는 전 국회의장 김형오가 중앙일보에서 국민과 실종자 유가족들에게 “많이 힘들겠지만 우리 아이들을 그만 놓아주시기,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노란 리본을 옷깃에서 가슴 안으로 옮겨 달고 이제 그만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며 아주 점잖게 충고까지 한다.

<경향신문> 2014년 7월 24일자 1면
<경향신문> 2014년 7월 24일자 1면

그런데 한번 물어보자. 세월호 참사가 정말 잊을 수 있는 일인가? 그렇게 쉽게 다 잊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일인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기록해야 한다.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인들이 유대인종 말살 기획으로 유럽 유대인 3분의 2를 살해한 홀로코스트라는 중대한 사건을 기억한다. 독일인 가해자는 수시로 유대인을 잔인하게 구타하고, 유대교 회당에 몰아넣고 산 채로 불태워 죽이고, 기도복 숄을 입은 사람들에게 휘발유를 들이부어 불을 붙이고, 부모가 보는 앞에서 아이들의 머리를 벽에 찧고, 소위 생체해부를 통해 의학실험을 자행하고, 무덤을 직접 파도록 한 뒤에 기관총으로 난사해 그 무덤을 가득 채우고, 노인들의 수염을 잡아 뜯어 뽑고, 유대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조직적이고 무자비한 방법으로 죽이고, 그 과정에서 그들의 인격을 완전히 파괴하고, 일말의 희망과 부분적 협조를 유지하기 위해 동부지역에 재정착하게 해주겠다는 거짓말을 하고, 기차역에서 가스실까지 벌거벗긴 채 걷게 하고, 그 거리를 ‘천국으로 가는 거리’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이러한 죽음의 행렬을 기록한 목록은 끝이 없다. 이와 유사한 경험을 우리는 한국전쟁을 통해서 겪기도 했다.

우리는 이 참혹한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서양 문명의 정점에 도달한 나라였고, 칸트, 괴테, 헤겔, 베토벤 등을 낳았던 나라가 어떻게 한 민족을 말살하려 했고, 그렇게 잔인하고 집요하게 인종말살 계획을 추진하였으며, 그토록 불편한 증오를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한 인간의 리더십에 동의할 수 있었던 것일까. 직접 경험할 수 없었던 우리는 역사학자나 사회학자들이 그 원인을 추적하고 밝혀 기록한 증거물을 통해 그 사건을 이해하고 기억한다. 현재의 독일인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홀로코스트는 우리가 기억하거나 추모하는 정도 이상의 의미를 가진 중요한 사건이다. 홀로코스트는 그것을 기억하고, 끊임없이 괴로워하며 추모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하고, 슬픈 눈물을 흘리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 사건이다. 홀로코스트는 서구 기독교 전통이 상상했던 인간의 타락, 즉 아담과 이브의 타락과 맞먹는 사건이다. 인류의 상황과 위상에 철저하고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다. 인간이 원죄를 갖게 된 에덴동산의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믿지는 않지만, 그와 유사한 일이 인류 역사 속에서 홀로코스트란 이름으로 일어난 것이다. 오늘날 개개인의 현재 위상이 어떻든지 홀로코스트는 인류 전체에게 근본적으로 새로운 상황과 위상을 만들었고, 그것은 예수의 희생으로도 치유할 수 없고 치유하기로 예정되어 있지도 않은 사건이었다. 인류의 완벽한 타락이다. 현재 한때 피해자였던 이스라엘이 가해자가 되어 팔레스타인인을 학살하는 폭력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인류는 영원히 이런 타락 상태에 머물까? 인간은 인간 자신을 구속할 수 없을까? 혹시 인간 집단이 인류의 역사적 비극에 대해 함께 참회하고 향후 수백 년 동안 평화와 선함을 유지한다면 타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어쩌면 지금 당장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보다 훌륭한 다른 생물종의 탄생을 돕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을 변화시켜, 타인이 고통당할 때 함께 불행해지고 고통을 함께 겪는 존재로 거듭 태어나거나, 적어도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거나 그들의 고통을 야기할 때 또는 그런 가해를 방관하고 허락할 때 함께 고통을 겪는 존재로 거듭 태어나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야만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고통의 양이 확실하게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류를 구속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어쩌면 누군가에게 어떤 고통이라도 가해질 때, 누군가가 어떤 고통을 느낄 때 우리 자신이 고통을 겪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동안 서구 문명을 대표해 온 기독교는 예수가 인류의 고통을 짊어지고 인류를 구속했다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에게 예수를 따르라고만 가르쳤지, 사람들도 예수처럼 구속을 위해 고통을 짊어져야 한다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 점에서 홀로코스트는 구속의 문제를 우리 앞에 새롭게 제기한 셈이다.

홀로코스트는 주변의 모든 것을 일그러뜨리는 거대한 지각 변동이다. 가끔 물리학자들은 중력 질량에 의해 주변의 편편한 물리적 공간이 뒤틀리고 일그러지는 현상들을 설명한다. 중력이 클수록 일그러짐도 커진다. 홀로코스트는 인간의 공간에서 일어난 거대하고 지속적인 일그러짐이다. 그 소용돌이와 뒤틀림은 아주 멀리 퍼져나가고,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다. 히틀러 역시 그의 주변 사람들, 즉 그의 추종자들, 그의 희생자들 그리고 그를 쓰러뜨려야 했던 사람들의 삶을 일그러뜨린 힘이었다. 그가 만들어낸 소용돌이는 아직도 잦아들지 않고 있다.

세월호 참사는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에서 일어난 거대하고 지속적인 일그러짐이다. 이처럼 세월호 참사가 남다르게 읽히는 것도 홀로코스트의 의미와 많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철저한 타락이다. 100일이 지난 지금도 세월호 참사는 우리 주변을 뒤틀리게 하고 일그러뜨리는 거대한 소용돌이다. 그 여파는 우리의 삶 전체를 파고들고 있고, 삶에 간섭하고 있다. 남의 고통이 아니라 나의 고통이며, 남의 슬픔이 아니라 나의 슬픔임을 일깨우며. 결국 세월호가 우리에게 전하는 의미는 ‘우리의 삶과 삶에 내포되어 있는 것은 지속 가치가 있는 인간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임을 깨우치게 하는 데 있다.






[평화뉴스 이재성 칼럼 52]
이재성 / 계명대 교양교육대학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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