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스의 전쟁범죄 이스라엘에 대한 기습 침공 당일부터 하마스는 이스라엘 민간인들을 대규모로 학살하고 여성들은 강간하며 집집마다 찾아가 일가족을 몰살시키는 행위를 하였다. 하마스는 그러한 공격장면을 담은 영상을 다양한 사회적 연결망 공간에 올렸다. 하마스는 공식적으로 자신들의 전쟁 범죄를 부인하고 있다. 하마스 정치외교부서 책임자인 배셈 나임 박사는 Sky News와의 인터뷰에서 하마스 대원들의 민간인 살해 사실을 부정했다. 주요한 민간인 학살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개전 당일인 10월 7일 이스라엘 남부 레임 키부츠 근교에서 하
전쟁의 배경과 발단 2023년 10월 7일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이끌고 있는 무장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 영토에 로켓 공격과 함께 지상군 침투 공격을 하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 무차별 공습과 대규모 지상군 공격을 하게 된 것이 2023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다. 글쓴이는 이 전쟁을 이스라엘이 서남아시아 지역 국가들 혹은 준국가에 해당한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상대로 벌인 전쟁, 즉 서남아시아 분쟁과 갈등의 역사를 조망하면서 제7차 서남아시아 전쟁이라 부른다. 학계와 상식인들이 알고 있는 1차에서 4차까지 중동
전쟁의 배경과 발단 2차 이스라엘-레바논 전쟁은 2006년 여름 레바논 무장 정파 헤즈볼라가 이스라엘 병사 2명을 체포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2006년 7월 13일 이스라엘이 전투기와 탱크를 이용하여 레바논의 도시를 공격한 사건이다. 이스라엘에서는 '2차 레바논 전쟁', 아랍권에서는 '7월 전쟁‘이라고 부른다. 글쓴이는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한 서남아시아 지역 전체의 역사적 맥락에서 ’제6차 서남아시아 전쟁‘이라고 부른다. 7월 12일 헤즈볼라가 이스라엘 영토를 침입하여 8명의 군인을 살해하고 2명을 체포하였다. 이스라엘은 유엔
미첼위원회의 활동과 아리엘 샤론의 집권 2000년 10월 17일, 클린턴 대통령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이 폭력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로 국제진상조사위원회(미첼위원회)를 설립하는 데 동의했다고 발표함으로써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봉쇄 해제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클린턴의 대통령 임기가 끝나는 시점이었으므로 팔레스타인 사태에 적극적이지 못했다. 22일에는 인티파다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샤름 엘 셰이크에서 열린 아랍정상회담 역시 각국의 이익이 얽혀 아랍 민족주의의 대의를 살리지 못하고 팔레스타인 민중봉기에 따른 경제적 손실을 충당
들어가는 글 1987년 12월에 시작된 제1차 인티파다는 팔레스타인들의 6년간의 생존과 독립을 위한 투쟁이었으며 세계에 팔레스타인 문제를 상기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 결과 오슬로 협정이 체결되었다. 2000년 10월부터 시작된 2차 인티파다는 여러 면에서 이와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1987년의 경우는 이스라엘의 점령지 외부, 즉 요르단, 레바논, 튀니지 등 인접 아랍국가에 근거지를 두고 전개되어 온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이 점령지 내부에서도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었으며, 이 운동이 대중운동의 형태를 띠고 전개되었다는 점에
오슬로 선언의 배경이스라엘은 캠프데이비드 회담에 의한 이집트와의 화해로 어렵게 조성된 중동지역의 평화 분위기를 외면하고 1980∼1981년 기간동안 1967년과 1973년 전쟁에서 점령한 동예루살렘과 가자지구 및 골란고원을 자신의 영토로 공식 합병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7년 12월 이스라엘의 점령 지역에서 인민봉기(인티파다)가 발생하였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평화회담을 제의하였으나,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1991년 4월 이를 거부하면서 유엔 감독 하의 국제회의 개최를 제의하였다. 그 이전에 1988
1차 인티파다의 배경과 원인1967년 이스라엘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점령한 후 군정을 실시하고 팔레스타인인의 권리를 억압하는 통치를 펼쳤다. 전쟁으로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서 인근 아랍국가로 피난을 간 약 30만 명의 난민들은 고향으로 귀환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난민들이 남기고 간 토지는 이스라엘 정부가 징발했다.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는 시민권이 부여되지 않았으며 정치적 권리와 이동, 표현, 언론의 자유가 제한되었다. 이스라엘 군정은 이스라엘 안보를 위협하는 혐의를 받은 사람을 임의로 추방하였으며, 주택
치욕스럽고 생경한 '갈릴리의 평화 작전'1982년 레바논 전쟁은 이스라엘에서 갈릴리의 평화 작전(Operation Peace for Galilee)이라고 불린다. 예수의 탄생지인 나자렛이 있는 갈릴리라는 지명에 평화라는 단어를 조합한 이 이름은 참으로 치욕스럽고 생경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1982년 6월 시작된 전쟁은 10주를 끌다가 8월 12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베이루트 철수를 위한 최종 조건이 타결되고, 8월 말부터 9월 1일 사이에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전사들 수천명이 베이루트를 떠나면서 끝이 났다. 1982년 6월 6일, 이
캠프데이비드 협정의 체결캠프 데이비드 협정(Camp David Accords)은 미국 대통령 별장 캠프 데이비드에서 12일간 비밀 협상에 이어 1978년 9월 17일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에 의하여 조인되었다. 2개의 협정은 백악관에서 조인되었고,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중개하고 입회하였다. 캠프데이비드 회담은 1967년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 사이의 제3차 서남아시아(중동) 전쟁과 1973년 제4차 서남아 전쟁 이후 교착되었던 중동정세에 화해의 가능성을 열었다. 이슬람 아랍국가가 이스라엘을 인정하
제3차 서남아시아 전쟁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사이의 관계는 제1차, 2차 서남아시아(중동) 전쟁 이후 안정화된 적이 없었다. 1967년 6월까지 이스라엘과 주변국 사이의 긴장은 높아졌다. 이스라엘은 티란 해협에 대한 봉쇄는 전쟁 명분이 될 것이라 말하며 이집트에 압박을 가하였다. 5월 말 가말 압델 나세르는 이스라엘 선박에 대해 해협이 봉쇄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후 이집트는 이스라엘과의 국경을 따라 군을 전진시켰고, 6월 5일 이스라엘은 이집트 공군기지에 공군기에 의한 공습으로 선제공격을 하였다. 이집트는 기습에 당했고, 이스라엘
서남아시아 전쟁의 개요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들어서면서 주변 아랍국가들과 이스라엘은 모두 네차례의 전쟁을 치른다. 이스라엘 건국 다음날 발생한 1차 서남아시아 전쟁, 1956년 이집트의 낫세르 대통령이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자,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공격한 2차 서남아시아 전쟁, 1967년 이스라엘의 기습공격으로 6일만에 팔레스타인 주거지역인 서안지구와 가자지구가 이스라엘에 점령된 것으로 끝나는 3차 서남아시아 전쟁, 1974년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의 선제공격으로 발생한 4차 서남아시아 전쟁이
이스라엘 정부 수립과 팔레스타인인의 비극2023년 10월 7일 팔레스타인 하마스군에 의하여 시작된 팔레스타인 – 이스라엘 전쟁은 6개월째인 24년 3월 현재 팔레스타인 땅인 가자지구에서 지속되고 있다. 이스라엘국가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각각 통치를 하고 있는 지역, 즉 현재의 이스라엘 영토로 알려진 부분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양쪽을 합하여 전체 영토가 원래 ‘팔레스타인’이라고 불려지던 땅이었다. 이 팔레스타인 땅에 국가권력이 들어선 것은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정부 서립 선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