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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차 인티파다와 팔레스타인 문제의 국제무대 재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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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서남아시아 전쟁과 팔레스타인 난민의 역사 ⑥
- 성상희(변호사. 생명평화아시아)

 

1차 인티파다의 배경과 원인

1967년 이스라엘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점령한 후 군정을 실시하고 팔레스타인인의 권리를 억압하는 통치를 펼쳤다. 전쟁으로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서 인근 아랍국가로 피난을 간 약 30만 명의 난민들은 고향으로 귀환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난민들이 남기고 간 토지는 이스라엘 정부가 징발했다.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는 시민권이 부여되지 않았으며 정치적 권리와 이동, 표현, 언론의 자유가 제한되었다. 이스라엘 군정은 이스라엘 안보를 위협하는 혐의를 받은 사람을 임의로 추방하였으며, 주택 파괴와 재판 없는 구금 등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이스라엘은 또한 1967년 전쟁에서 점령한 영토에서 철수할 것을 요청하는 국제사회의 촉구를 무시하고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 대한 역사적 영유권을 주장했으며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해 자국민을 대규모로 이주시켰다. 

  인티파다 발발 시점에는 팔레스타인인 인부 40% 이상이 이스라엘에서 일하고 있었다. 여기에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토지 몰수, 서안 및 가자지구의 높은 출산율로 인하여 좁은 지역에 많은 인구, 높은 실업률 상황이 발생했다. 인티파다 시점에 학위를 갖고 있는 사람 중 8분의 1 정도만이 학위와 관련된 일을 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 노동당 소속으로 국방부 장관인 이츠하크 라빈은 1985년 8월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을  제압하기 위한 '철의 주먹' 정책에 강제추방 방안을 추가했다. 이후 약 4년에 걸쳐 50명이 추방되었으며, 경제적 통합과 이스라엘 정착촌 확대가 이루어졌다. 서안 지구에서 유대인 인구는 1984년 약 35,000명에서 1988년 64,000명으로 두 배가량 증가했으며, 1990년대 중반에는 130,000명에 달했다. 1980년대 주류 매체에 출연한 이스라엘 정치인들은 팔레스타인 인구를 영토 밖으로 내보내는 정책을 공공연히 언급하였으며, 이로 인해 팔레스타인에서는 추방에 대한 공포감이 형성되었다.

   한편 1982년 레바논 전쟁 이후 팔레스타인의 저항운동은 힘을 잃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강압으로 레바논에서 축출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튀니스를 비롯한 각 아랍국 수도에서 성과없는 망명 활동에 갇혀 힘을 잃었다. 팔레스타인 출신의 뛰어난 저술가인 라시드 할라디는 해방기구가 미국과 이스라엘로부터 대화상대로 인정받기 위하여 결실 없는 시도에 에너지를 쏟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튀니스의 해방기구 지도부는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서 살아가는 동족들이 처한 복잡한 사회, 정치적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고, 현장과 유리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인티파다 진행 초기인 1988년 4월 해방기구의 전략가 아부 지하드가 이스라엘 비밀정보기구 모사드에 의해 암살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1차 인티파다는 위와 같이 이스라엘에 의한 점령과 조직적 학대가 팔레스타인인들의 목을 죄어 오고, 팔레스타인인의 대표자 격인 PLO는 지도력과 신망을 잃어 팔레스타인 민중들이 희망을 잃고 있던 1987년 말에 터져 나온 것이다.  

인티파다의 발생과 진행 경과 

1986년 12월 4일 가자 지구의 비르제이트 대학교 학생 2명이 캠퍼스에서 이스라엘 군인에 의해 사살된 사건 이후 팔레스타인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였을 때, 이스라엘은 즉결 체포, 구금, 구타 등 강경 조치를 취했다. 1987년 10월 1일과 6일에는 이스라엘군이 매복을 통해 가자 거주민 7명을 사살했다. 며칠 후에는 17살 여학생이 가자 지구 정착민에 의해 학교 운동장에서 등에 총을 맞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987년 11월 암만에서 열린 아랍 연맹 회담에서는 이란-이라크 전쟁이 주로 다루어졌으며, 팔레스타인 문제는 주변으로 밀려났다.

  이스라엘의 지배에 대한 분노와 저항은 1987년 12월 가자지구 북부에 위치한 자발리아 난민촌에서 이스라엘군 장갑차가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이 탄 차량과 충돌해 노동자 4명이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폭발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차량 충돌 사고를 며칠 전 가자 지구에서 유대인이 살해된 것에 대한 보복이라고 주장한 반면, 이스라엘은 충돌이 고의적이거나 사전에 계획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다음 날 순찰차에 화염병을 던진 사건이 일어나자, 이스라엘은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과 실탄을 발사하여 1명을 죽이고 16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팔레스타인은 시위, 시민 불복종으로 대응하였다. 이스라엘이 고의로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을 살해했다는 소문이 퍼지며 항의 시위가 일어났고,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에 있는 이스라엘군 시설에는 팔레스타인인의 돌팔매질, 화염병 투척 등이 일어났다. 총파업, 서안 및 가자 지구의 이스라엘군 민정 기구에 대한 보이콧, 납세 거부, 이스라엘 정착촌에서의 노동 거부, 이스라엘 물품 불매운동, 이스라엘 면허를 받은 팔레스타인 차량 운전 거부 등 민간 영역에서 다양한 저항이 있었다.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이 이스라엘 군대와 장갑차제 맞서 돌멩이를 던지며 싸운 1차 인티파다 '돌들의 혁명'(1987년~1992년) / 사진 출처. Abarrategi - Karya sendiri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이 이스라엘 군대와 장갑차제 맞서 돌멩이를 던지며 싸운 1차 인티파다 '돌들의 혁명'(1987년~1992년) / 사진 출처. Abarrategi - Karya sendiri

    반이스라엘 시위는 이스라엘군의 실탄 사격으로 사망자가 발생하자 대대적인 민중봉기를 의미하는 인티파다(intifada)로 발전했다.  자발리아에서의 시위 진행 와중에 17살 소녀가 화염병을 던지다가 사살되었다는 사실이 전해졌으며, 시위는 서안 지구와 동예루살렘으로 빠르게 확대되었다. 시위대는 난민 수용소를 쓰레기, 돌, 타이어로 바리케이트를 쌓아 막았고, 뚫고 들어오는 군인들에게 화염병을 던졌다. 팔레스타인 상점가는 문을 닫았고, 노동자들은 이스라엘로 근무하러 가기를 거부하였다. 이스라엘은 이 활동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법과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발표하였다. 팔레스타인에는 시위와 상업적 파업이 빈발하였다. 군사용 차량, 이스라엘 버스, 이스라엘 은행 등 점령과 관련된 특정한 목표물이 겨냥되었으며, 인티파다 초창기에는 이스라엘 정착촌에 대한 공격이나 이스라엘 측 사상자 발생이 없었다.  이스라엘군은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곤봉, 야경봉, 최루제, 물대포, 고무탄, 실탄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으나 시위는 갈수록 번졌다.

  이후 점령지 전역에서 돌팔매질, 도로 점거, 타이어 방화가 일어났다. 12월 12일에는 팔레스타인인 6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다쳤다. 다음 날에는 시위대가 동예루살렘의 미국 영사관에 휘발유 폭탄을 던졌으나 사상자는 없었다.

고무 타이어에 삽입된 쇠못, '즉석 타이어 펑크 장치'다. 팔레스타인 청년들이 제1차 인티파다 동안 요르단강 서안 점령 지역의 주요 도로에 흩뿌린 임시 무기다. /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공용문서
고무 타이어에 삽입된 쇠못, '즉석 타이어 펑크 장치'다. 팔레스타인 청년들이 제1차 인티파다 동안 요르단강 서안 점령 지역의 주요 도로에 흩뿌린 임시 무기다. /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공용문서

  첫해에만 24시간 통금령이 1600회 이상 발효되었다. 팔레스타인 공동체는 물, 전기, 연료가 제한되었으며, 한때는 팔레스타인인 2만 5천 명이 가택에 동시에 연금되기도 하였다. 팔레스타인의 농장에서는 나무가 뿌리채 뽑혔으며, 농작물 판매가 금지되기도 하였다. 첫해에 팔레스타인인 1천 명가량이 집을 철거당하거나 점거당하였다. 팔레스타인인은 세금 납부를 거부하였으나, 이스라엘은 재산 몰수, 새 차량 세금 도입, 가족 중 돌팔매질에 참여한 인원이 있는 경우 무거운 벌금 부과 등으로 대응하였다.

  1988년 4월 16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지도자 칼릴 알 와지르가 튀니지에서 이스라엘 특수부대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스라엘은 칼릴 알 와지르가 '저항 운동을 원격으로 통제하는 주요 인물'이라고 주장하였다. 공식적인 전쟁이 발생한 것이 아닌 상황에서 민중의 투쟁을 지휘 내지 배후조종한다고 하여 살해하는 것은 암살에 해당하며, 관련자는 자국 국내법에 의해서 살인죄 혹은 그 교사범, 방조법으로 처발받아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자국이 처벌하지 아니할 경우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소추와 재판의 대상이 되어 처벌받아야 한다.

   이어진 가자 지구에서의 대규모 시위 중에 이스라엘군은 모스크 두 곳을 급습하여 최루탄을 살포하고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칼릴 알 와지르의 사망 이후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에서 각각 11명, 15명이 시위 중 사망하였다. 같은 해 6월 아랍 연맹은 인티파다를 경제적으로 지원하기로 결정하였으며, 1989년 회담에서도 경제적 지원을 재확인하였다.

  1990년 10월 8일, 성전산(Temple Mount) 폭동 중 팔레스타인인 22명이 이스라엘 경찰에 의해 사망하였다. 이로 인해 팔레스타인에서는 더 과격한 저항방식을 사용하기 시작하여, 2주 후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군인 1명과 민간인 3명이 칼에 찔려 사망하였으며, 이후로도 칼에 찔리는 사건은 계속 발생하였다. 팔레스타인 저항그룹의 자살 폭탄 공격은 1993년 4월 16일 메홀라 교차로 사건을 시작으로 인티파다 종료까지 이어졌다.

1차 인티파다의 결과와 하마스의 등장 

이스라엘군과 팔레스타인인의 충돌로 1987년부터 1993년까지 팔레스타인인 1,204명이 사망했다. 이스라엘에서도 약 200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팔레스타인 내부에서 서로를 이스라엘과 내통하였다고 주장하며 폭력이 발생하기도 했으며, 이로 인해 팔레스타인인 822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인티파다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서 억압에 맞선 대중적 저항의 탁월한 사례였다고 평가된다.(라시드할라리 저, 유강은 번역, “팔레스타인 백년전쟁”, 2021년.  253쪽) 

 일부 폭력적 저항방식이 없지는 않았으나 비무장, 비폭력 방식이 압도적인 주류를 이루었다. 1936년 봉기와 달리 1차 인티파다는 폭넓은 전략적 전망을 가진 통일된 지도부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인티파다는 팔레스타인인들을 단합시키는 효과가 있었고, 폭력을 자제한 까닭으로 이스라엘과 세계 여론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된다.  

  인티피다는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자발적인 봉기였으며, 튀니지에 있던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지도부는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지도부의 공백 상황에서 가자지구의 이슬람주의 종교 지도자인 아메드 야신(Ahmad Yassin)은 1987년 하마스(Hamas)를 조직했다. 하마스는 초기에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약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이스라엘이 신중하게 지원을 했다고 한다. 

PLO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향력이 약화된 상황에서 가자지구의 이슬람주의 세력은 강력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고, 인티파다를 계기로 고조된 팔레스타인의 분노에 호응해 이스라엘에 대한 적극적 저항을 표방하기 시작했다. 하마스는 PLO가 이스라엘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비판했고,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과 공존할 수 없으며 무력 투쟁을 통해 이스라엘을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티파다의 전개 과정에서는 하난 아스라위, 파이살 후세이니, 하이달 아브델샤피가 이끄는 공동체 위원회가 주로 저항운동을 이끌었으며, 독립적인 교육, 의료, 식량 체계를 구축하려고 하였다. 인티파다 초기에는 폭력을 자제하자는 공동의 약속이 있었고, 이스라엘군의 발포로 사태가 악화된 이후에도 인티파다는 결정적인 폭력투쟁으로 나아가지 않고 평화적 저항에 주력하였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또한 이스라엘과의 협상을 염두에 두고 비폭력 전략을 채택했다. 투쟁의 목표 설정에서도 '팔레스타인 전체'의 해방이라는 기존의 수사적인 문구를 버리고,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라는 제한된 지역에서의 팔레스타인 국가 설립을 촉구하였다.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 또한 초기 이스라엘군에 대한 공격 외에는 무력사용을 자제하였다. 이러한 흐름이 세계 여론에도 영향을 미쳐 미국이 팔레스타인 평화 정착을 위한 노력을 좀 더 기울였고, 그 결과가 오슬로 선언이라 할 수 있다. 

국제사회의 이스라엘 비판과 팔레스타인 문제의 국제문제 재등장

   제1차 인티파다 당시 팔레스타인 사상자가 많아 이스라엘은 국제적인 비난을 받게 되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제607호와 제608호 결의안을 통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 추방 중단을 요구했다. 1988년 11월 유엔 총회에서 이스라엘은 인티파다에서 취한 행동에 대해 비판받았으며, 결의안은 몇 년간 반복되었다. 1989년 2월 1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스라엘이 안보리 결의안을 위반한 것과 제4차 제네바 협약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해 규탄하는 결의안 초안을 제시했으나, 미국의 거부권 행사로 무산되었다. 

   미국은 6월 9일과 11월 7일 2번째 및 3번째 초안도 거부했다. 1990년 10월 14일, 이스라엘은 통곡의 벽에 있는 유대인들에 대한 공격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을 이유로, 결의안 제672호를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선포하였다. 이스라엘은 유엔 사무총장 대표단의 입국을 거부했으며, 이후 결의안 제673호는 실질적인 효과 없이 표류하였고, 이스라엘의 유엔 대표단 방해는 계속되었다.

   1988년 11월 15일 알제리에서 열린 팔레스타인 국민 회의에서 아라파트는 과반수를 득표하여, 이스라엘 국가의 인정, 1947년 11월 29일 이후 모든 유엔 결의안, 특히 안보리 242호 결의안을 인정, 팔레스타인 땅 전체에 대한 소유권의 공식적 포기와 양국 방안을 받아들인다는 결정을 내렸다. 요르단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대중적 지지도가 전면적으로 높아져, 서안 지구와의 행정 및 경제적 관계를 단절했다. "철의 주먹" 정책의 실패, 이스라엘의 외교적 이미지 실추, 요르단의 서안 지구와의 관계 단절, 미국의 팔레스타인인 대변 기구로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인정한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츠하크 라빈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의 대화를 통해 폭력 사태를 마무리하라는 압박을 받았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전략적 판단능력의 결여로 인하여 1990년 이라크 지지와 걸프 전쟁 반대라는 큰 실수를 범하였다. 이를 계기로 해방기구는 국제외교 무대에서 고립되었고,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가 해방기구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중단하였으며, 팔레스타인인 30만~40만 명이 전쟁 전후로 쿠웨이트에서 추방되었다. 

  1967년 이후 이스라엘의 점령 통치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저항 운동에 부딪혔지만, 이스라엘 정부는 "철의 주먹" 정책의 일환으로 추방, 집 철거, 연좌, 통행 금지령, 정치 기구 탄압 등으로 저항 여력을 소진시키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인티파다의 발발로 저항 운동이 붕괴할 것이라는 예상은 잘못된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1차 인티파다는 1993년 오슬로 선언으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에 평화의 기운이 돌면서 종료되었다. 

[기고]  성상희 / 변호사. 생명평화아시아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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