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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터서 벌인 외딴 실험극 ‘공생농두레농장’
'농사꾼 철학자' 천규석④ / 농사꾼, 제대로 된 길을 걸으면...
2010년 11월 10일 (수) 09:21:36 평화뉴스 pnnews@pn.or.kr

"농사꾼 아버지도 아들에게는 농사짓기를 말리죠. 전 아들에게 생각이 있으면 농사지으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아들은 창녕에서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다만 아들은 저 같은 악착스런 농사꾼이 아니라 힘든 건 피해가는 기계 농사꾼이지요. 한마디로 얼치기 농사꾼이지요."


40여 년 전,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맨손으로 농촌에 돌아왔을 때 그의 아버지는 실망하는 빛이 역력했습니다. 어렵게 대학공부까지 마치고 뼈 빠지는 농사일을 하겠다는 아들이 안쓰러웠을 것입니다. 지금 꼭 같은 아버지의 위치가 된 그는 농삿일을 말리는 대신 아들을 위해 농업전문학교에 다니도록 권유하고 배려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농촌을 찾은 귀농 당시를 떠올렸다고 합니다. 1965년, 그가 귀농했을 때는 박정희 군사정부가 농업근대화에 손을 막 대기 시작한 때입니다. 농촌에서는 양식 때문이 아니라 돈을 벌기위해 분업과 상업 작물의 중요성이 강조됩니다. 한편으로는 도시화와 맞물려 이농도 걸음마를 떼는 시점이었습니다.

그는 창녕에 오자마자 농사를 짓지는 못했습니다. 집안 형편상 농사지을만한 땅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돈을 모아 땅을 살 생각으로 영산에 신설된 여자중학교의 교사를 2년 동안 합니다. 그리고는 농삿일에 본격적으로 뛰어듭니다. 4․19 직후 결성한 교원노조 창녕군 부위원장을 지낸 중학교 은사 등이 이끄는 농민단체 ‘경화회’와 가톨릭 농민회에도 참여합니다.

   
▲ 천규석(72)님

그 즈음 서울에서 사업하다 6.25전쟁으로 귀향한 선배가 일본의 농업교본을 참고해 양파농사를 짓습니다. 돈이 되는 것을 본 농민들은 순식간에 양파농사를 따라 짓습니다. 한때나마 창녕은 한국 양파 재배의 메카로 떠오릅니다. 그도 양파 농사에 뛰어들어 양파협동조합을 만들어 조합운동을 펼칩니다.

그리고 가톨릭농민회를 만들어 농사동지들과 함께 양파 채종에 손을 댑니다. 그는 단순히 양파를 재배해 얻는 소득보다 가장 좋은 양파를 골라 다시 심기를 되풀이 해 종자를 받는 채종에서 큰 소득을 올릴 수 있다고 봤습니다. 그런 그의 예상은 맞아 떨어졌습니다. 양파를 재배하는 데 20년, 채종하는 데 10년을 바친 대가로 얼마간의 돈을 벌어 땅을 삽니다. (천규석 님은 이 부분에 대해 "당시 창녕의 가톨릭농민회 동지는 7명이었으며, 이들만이 양파채종을 한 것도 아니고 또 양파채종을 하기위해 가톨릭농민회를 만든 것도 아니다. 가톨릭농민회 창녕본회는 1979년에 만들어졌고, 그 훨씬 전인 1960년대부터 창녕에서 양파채종은 이미 상당규모로 하고 있었고 우리도 그들 중의 일부였다"고 알려왔습니다 - 편집자)

“눈 질근 감고 대충대충 속여 판 사람들은 큰 돈 벌었지요. 제대로 된 길을 걸으면 외롭고 가난하게 산다고 그러잖아요.” 채종은 가장 나은 것을 골라 씨앗을 받아야 합니다. 아무렇게나하면 종자가 퇴화되고 맙니다. 그래야만 이전보다 훨씬 나은 새품종이 만들어지는 ‘선발육종’이 이루어집니다. 양파 채종을 하면서 그는 생명 순환의 원리와 자연의 질서를 배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농촌 땅에서 공동농장을 통해 도‧농공동체의 꿈을 실현하기위한 발걸음을 뗍니다. 바로 ‘공생농두레농장’ 입니다. 1995년 창녕 남지에 사단법인 형태로 ‘공생농두레농장’을 만든 것입니다. 지인들을 중심으로 1억 8천만 원의 적지 않은 회비를 모아 8천여 평의 땅을 사고 집을 지었습니다.

처음에는 젊은이들이 10여 호 가까이 모여들어 공동마을의 기틀을 잡아 가는듯했습니다. 2~3년 뒤 IMF가 터져 반짝 귀농 붐이 불 때도 그런대로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이내 힘겨운 비전과 버거운 농장 일 앞에 사람들은 하나둘 떠납니다. 그 또한 대구한살림에다 공동농장까지 꾸려가려니 힘에 부치고, 그러다보니 점차 활력을 잃고 맙니다. 말하자면 ‘공생농두레농장’은 실험중인 과제로 남고만 것입니다.

그는 농사꾼이면서도 30년 전부터 아침밥을 먹지 않습니다. 1979년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 생긴 버릇입니다. 딸 셋, 아들 하나를 거두며 농삿일을 하려니 아침밥을 먹을 겨를이 없었다고 합니다. 천성적으로 부지런한 농사꾼의 모습이거나 아니면, 선뜻 다가가기 힘든 일상에서의 꼿꼿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몸가짐이 그를 헷갈리지 않는 선명한 농사꾼으로 만든 듯합니다.

   


[박창원의 인(人) 33]
일곱 번째 연재 '농사꾼 철학자' 천규석④
글.사진 / 평화뉴스 박창원 객원기자


'곡주사 이모'와 '하회마을 뱃사공', 노동운동가 '장명숙 세실리아', '장승쟁이 김종흥',
'고서 일생 박창호', '사주쟁이 기자 우호성'에 이은 <박창원의 인(人)> 일곱 번째 연재입니다.
친환경농산물과 그 가공품을 협동조합 방식으로 직거래하는 대구 한살림 천규석(72)님의 이야기 입니다.
도농공동체를 꿈꾸는 농사꾼 천규석님과 사연 있으신 독자들의 글도 함께 싣고자 합니다.
- 사연 보내실 곳 : 평화뉴스 pnnews@pn.or.kr / 053-292-6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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