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이 망해야 ‘보릿고개’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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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꾼 철학자' 천규석⑤ / "염무웅, 김윤수, 김종철…정지창도 떠나려나?"


#1. "월급은 대구서 받아○먹고 그만두면 얼씨구나 하고 서울로 ○간다."
그는 수십 년을 가깝게 지낸 이들의 이름을 나열하다 애써 조선시대 사례까지 끄집어냅니다. 퇴계 이황을 중심으로 형성된 영남학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관직으로 서울에 있다가도 퇴직하면 고향으로 내려오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는 조선 시대의 학풍을 수긍하지 않지만 은퇴 뒤 지역으로 돌아오는 모습만은 좋게 비친다는 것입니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권력이나 돈을 서울 다가지고 가면 그게 지역 수탈이 지 뭐냐는 것입니다. 인간평등 못지않게 지역평등도 중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보통사람이야 시비 걸 이유가 없지만 그래도 지역사회로부터 인정받고 혜택 받은 이들은 좀 달라야 한다는 것이지요. 은퇴 뒤 지역에 살면서 이런저런 일을 하는 것은 아름답게 보이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염무웅, 김윤수, 김종철…정지창도 떠나려나?"
녹생평론의 김종철 선생은 지난 95년 공생농두레농장을 만들 때 4천만 원의 가장 많은 회비를 냈습니다. 이렇듯 절친한 벗들이 서울로 올라갔으니 섭섭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이들을 두고 이런 거친 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이들 또한 절절한 사정이 있었을 테니 말입니다. 더구나 폐쇄성이나 끼리끼리 문화가 유독 강한 대구의 특성을 알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천규석(72)님
천규석(72)님

#2. "애비도 서울대 나오고 자식도 서울대 갔으니 대대로 교수 해○먹고 살겠네."
몇 해 전 어느 저녁자리에서 그가 염무웅 선생에게 내뱉은 말입니다. 당시 염 선생의 아이가 서울대에 입학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잠시 축하의 인사가 오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축하인사 대신에 고깝게 들릴 수 있는 직설적인 소리를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염 선생은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고개를 끄덕여 되레 그를 머쓱하게 했습니다.

기실 그가 농민운동을 할 때부터 만난 염 선생은 끈끈한 인연을 맺어왔습니다. 특히 염 선생이 해직 당하고 고초를 당할 때 자주 보면서 정이 들었습니다. 지난 1991년 그의 딸이 교대에 입학할 때는 등록금 19여 만원을 직접 은행에 가서 내주었습니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했지만 평생 잊지 못할 일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그런 그가 모진 소리를 한 것은 정말로 축하하기 싫어서가 아닙니다. 그나마 세상이 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최고와 출세만을 쫓으며 허덕거리는 모습이 짜증난 때문입니다. 모여 앉아 누구누구의 자식이 고시에 붙었다, ○○에 들어갔다고 자랑하고 부러워하는 소리를 심심찮게 듣는다고 합니다. 현실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요리하고 농사지으려는 아이들이 왜 주눅 들어야 하느냐는 것이지요.

#3. "영화도 안보고, 낚시도, 여행도 안하고, 책을 보는 것은 당연하고…취미가 없는 게 취미지 뭐, 허허."
굳이 취미를 찾는다면 젊은 후배들이 찾아와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가 농사짓는 창녕 남지만 하더라도 70여 호의 전체보다 그의 집에 오는 손님이 더 많은 편입니다. 대구 한살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원칙적 소리는 인간관계를 서먹하게 만든 적이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주변에 사람이 끊어지지 않는걸 보면 그의 말대로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소농주의’ 같은 그의 뚜렷한 생각은 여러 권의 책으로도 세상 사람들에게 진한 울림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 땅덩이와 밥상’(1993)을 시작으로 ‘땅 사랑 당신 사랑’, ‘돌아갈 때가 되면 돌아가는 것이 진보다’, ‘쌀과 민주주의’,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 ‘소농 버리고 가는 진보는 십 리도 못가 발병난다’로 쉼 없이 이어집니다. 또 올 초 낸 ‘윤리적 소비’서는 ‘자급자족소비’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욕심을 버려야 (큰)덕(㥁)이 온다.’ 욕심을 버리기가 쉽지 않지만 스스로 자기다짐을 한다고 합니다. 농사를 짓고, 대구 한살림을 하면서 순간순간 다가왔던 갈등도 욕심을 줄이면서 헤쳐 나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버리고 싶지 않은 욕심이 꼭 하나 있습니다. 바로 ‘우리 땅’-농사짓기-을 지키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욕심조차도 머지않아 버려야 할듯합니다. 이대로 가다간 농업을 버린 대가로 우리의 생명줄을 남의 손에 목매고 살아야 할지 모르니 말입니다.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을 안다.’ 논어 자한편(子罕篇)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훗날 한국에서는 이런 경구 대신 새로운 말이 퍼질 것 같습니다.
'농업이 망한 뒤에야 보릿고개의 눈물을 안다.'



[박창원의 인(人) 34]
일곱 번째 연재 '농사꾼 철학자' 천규석⑤
글.사진 / 평화뉴스 박창원 객원기자


'곡주사 이모'와 '하회마을 뱃사공', 노동운동가 '장명숙 세실리아', '장승쟁이 김종흥',
'고서 일생 박창호', '사주쟁이 기자 우호성'에 이은 <박창원의 인(人)> 일곱 번째 연재입니다.
친환경농산물과 그 가공품을 협동조합 방식으로 직거래하는 대구 한살림 천규석(72)님의 이야기 입니다.
도농공동체를 꿈꾸는 농사꾼 천규석님과 사연 있으신 독자들의 글도 함께 싣고자 합니다.
- 사연 보내실 곳 : 평화뉴스 pnnews@pn.or.kr / 053-292-6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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