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페서 옹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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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 칼럼] "학자들이 나서지 않으면 한국의 개혁은 요원하다"

      
  요즘 폴리페서 비판이 난무한다.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언론은 일제히 폴리페서에 대한 포문을 열고 있다. 때가 때인지라 연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각 선거캠프에 교수들이 몰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신문은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세 진영을 돕고 있는 교수들을 합하면 5백명이나 된다고 보도하고 있다. 하나도 놀랄 일이 아니다. 정확한 숫자는 아마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필자는 대통령 선거가 있던 2002년 가을 노무현 후보를 아주 조금 돕고 있었는데 대구에 사는 사람이라 서울의 선거캠프에는 갈 일이 거의 없었다. 캠프의 공약 회의에 딱 두 차례 참석한 일이 있는데, 참석자가 대략 25명 정도 되었다. 나는 그게 적은지 많은지 몰랐다. 한참 지난 뒤 알게 된 사실은 2002년 대선 때 이회창 후보를 돕던 학자들이 5백명이었다는 것이다(25명이 500명을 이겼으니 다윗과 골리앗이라 할 만하다). 대선 직전 이들이 이회창 후보와 함께 서울 시내 모 식당에서 회식을 하고는 각자 한명씩 따로따로 후보와 기념촬영을 했다고 한다. 사진사는 5백 차례 셔터를 누르느라 애를 먹었을 것이고 사진모델이 된 후보 역시 피곤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여론조사가 이회창 대세론을 뒷받침해주던 때가 아닌가. 승리를 눈앞에 두고 모두 고무되어 피곤한 줄도 몰랐을 것이다.

  이때만 해도 폴리페서란 말은 없었다. 폴리페서란 말이 처음 나온 것은 아마 참여정부 기간이었지 싶다. 참여정부에서 일한 교수들의 숫자가 역대 어느 정부보다 많았고, 게 중에는 필자처럼 지방대학 교수들도 꽤 있었는데 이는 해방후 역사에서 처음 보는 현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 자문 각종 위원회가 설립되고 거기 속한 자문위원까지 포함하면 지식인의 현실참여는 가히 봇물을 이루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러자 보수언론이 시비를 걸고 나왔는데, 그때 생긴 신조어가 폴리페서다. 그리고 위원회공화국, 토론공화국, NATO(no action talk only)정부에 대한 비아냥이 이어졌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토론이 뭐 나쁜가.

  물론 과거에도 폴리페서란 치졸한 영어 조어는 없었지만 비슷한 뜻의 ‘정치교수’란 말은 있었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에 반대하는 지식인, 대학생들의 시위, 서명이 맹렬해지자 박정희 정권은 본보기를 보인답시고 상당수 주동 교수들을 대학에서 해직시켰는데, 그때 내세운 죄목이 ‘정치교수’였다. 어쨌든 정치교수는 어감상 좋지 않은 뉘앙스를 풍긴다. 폴리페서도 비슷하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폴리페서가 과연 나쁜 것인가? 보수언론이 걱정하는 것은 다수 교수들이 선거캠프에 들락거리면 수업이 부실해지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선거에 이기면 정부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혹시 지면 학교에 돌아오면 되니 양다리 걸치기라는 것이다. 후자는 별로 문제될 게 없고, 전자는 좀 문제가 될 수 있다. 그건 교수들 하기 나름이다. 정말로 교수라는 본업을 뒤로 한 채 정치라는 부업에 더 열심히라서 학교 수업이나 연구를 소홀히 하는 교수들이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하면 된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정부에서 일하고 돌아온 교수들은 책에 없는 생생한 지식을 학생들에게 전해줄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교수들이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경향은 내각책임제를 취하는 유럽, 일본에서는 거의 볼 수 없고 주로 대통령제를 취하는 미국, 한국에서 발견된다. 미국 대통령은 취임하면 1,000명의 자리에 사람을 임명한다고 하며, 한국 대통령은 그만큼은 안 되도 꽤 많은 사람을 임명한다. 전문성, 도덕성을 가진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모자랄 지경이다. 미국에서는 워싱턴에서 일하고 온 교수를 더 우대하는 경향이 있다. 인문, 사회분야 교수들이 평생 상아탑을 지키는 것도 아름답지만 때로는 정계에 진출해서 경험을 쌓고 대학에 돌아오는 것이 연구와 교육에 분명 이점이 있을 것이다. 

  필자가 30여년 전 하버드대학에서 공부할 때 경제학과에 두 명의 university professor가 있었는데 한 명은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케네스 애로우 교수였고, 다른 한 명은 과거 노동부 장관을 지낸 존 던롭 교수였다. university professor란 대학 전체에 몇 명 안 되는 최고의 명예로운 교수직인데, 노동부 장관을 지냈다는 것이 이렇게 대접받는 것이다. 물론 던롭 교수는 장관을 했다는 사실 이외에 좋은 책과 논문을 쓴 기여도 물론 크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와싱턴에서 일한 경력을 좋게 보면 보았지 결코 나쁘게 보지는 않는 것 같다.

  한국이나 중국, 일본에서도 과거에 그랬다. 이들 나라를 지탱한 사대부란 게 무엇인가. 사대부는 왕과 평민 사이에 위치하는 계급으로서 글 읽는 사(士)와 벼슬하는 대부(大夫)가 한 몸이란 뜻이다. 평소에 글을 읽고 학문을 닦다가 나라가 부르면 가서 벼슬을 하되, 자기 소신에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직언을 하고 사직상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향리에서 책을 읽고 아이들을 가르치다가도 정부에서 잘못하는 게 있으면 언제든지 비판을 했다. 심지어 내 말이 틀렸으면 바로 내 목을 치라는 뜻으로 도끼를 옆에 끼고 대궐문 앞에 엎드려 상소를 하기도 했다(持斧上訴). 이런 직언을 하는 선비들이 있었기 때문에 부패한 조선왕조가 그대로 완전히 썩지 않고 버틸 수가 있었다. 그런 뜻에서 사대부는 우리 전통사회의 소금이었다.

  요즘 말하는 폴리페서가 무엇인가? 바로 사대부다. 폴리페서는 politics + professor의 합성어인데, 앞에 말은 大夫이고, 뒤에 말은 士이다. 말의 배치만 앞뒤가 바뀌었을 뿐, 말의 뜻은 정확히 사대부다(그래서 구태여 영어 합성어를 쓰자면 polifessor 보다는 procrat가 맞다고 본다). 예전에는 사대부를 높이 평가하고 나라의 기둥으로 삼았는데, 오늘날 보수언론은 왜 이리 사대부를 눈엣가시로 여기는가? 그 이유는 이들 중 상당수가 개혁파로서 보수언론의 잠재적 적수이기 때문이다(물론 캠프의 5백명 교수들이 다 개혁적이란 뜻은 아니다).

  폴리페서가 나서지 않으면 한국의 개혁은 요원하고 희망이 없다. 개혁적 학자들이 책을 일시 물리고 나랏일을 걱정하는 것은 권장할만한 일이지 결코 비난할 일이 아니다. 이들의 전문성은 정책 생산에 긍정적 효과를 가져온다. 그러니 이제 폴리페서 운운하며 비아냥거리는 나쁜 풍조는 없애야 한다. 앞으로 폴리페서란 말은 쓰지 말자.






[이정우 칼럼 7]
이정우 /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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