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독립운동가들의 옛집 터...'재개발'로 또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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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이육사' 남산동 고택 철거→올해 '의열단' 이종암·'태극단' 서상교 선생 옛집 터도 위기
후손·광복회 "대구시와 중구청, 역사적 가치 고려 없이 무분별한 개발" / "인근에 표지 등 고민"

 
대구지역 독립운동가들의 옛집 터가 아파트 재개발 구역에 포함돼 또 사라지게 됐다.

대구시·중구청·광복회 대구광역시지부에 지난 21일 확인한 결과 독립운동가 이종암(1896~1930) 선생과 서상교(1923~2018) 선생 옛집 터가 있는 대구 중구 남산동 일대(4만8,330㎡)가 '명륜지구주택재개발정비사업'에 포함됐다. 명륜지구 재개발 구역은 남산동 계산오거리에서 남문시장까지다. 구도심인 이곳에는 재개발이 끝나면 28층짜리 아파트 15개 동이 들어선다. 2006년 재개발추진위원회가 승인돼 2016년 2월 정비구역으로 지정돼 주민들을 대상으로 조합설립 동의서를 받고 있다.

하지만 재개발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지역 독립운동가들 옛집 터가 개발사업으로 인해 계속 사라지고 있는데도 지자체가 보존방안이나 어떤 대책도 내놓지 않고 손을 놓고 있는 탓이다.
 
<신한민보> 1927년 1월 6일자 1면 4단...'전중(일본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을 저격하였다는 죄로 이종암 등에게 징역 선고'
<신한민보> 1927년 1월 6일자 1면 4단...'전중(일본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을 저격하였다는 죄로 이종암 등에게 징역 선고'
 
독립운동가 이종암 선생 옛집 터 (2020.05.21.대구시 중구 남산동) / 사진.평화뉴스 한상균 기자
독립운동가 이종암 선생 옛집 터 (2020.05.21.대구시 중구 남산동) / 사진.평화뉴스 한상균 기자
 
특히 두 애국지사 모두 지역의 대표적인 항일운동가로서 그 흔적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이종암 선생은 항일단체 '의열단' 창단 주역으로 부단장을 맡았다. 1922년 중국 상해에서 일본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 義一) 암살을 시도했다. 서상교 선생은 대구상업고등학교를 재학 중이던 1942년 동급생들과 항일학생결사 '태극단'을 창단하고 체육국장을 맡아 단원들 교육을 감독했다.

광복회대구지부에 확인한 결과 이종암 선생은 1896년 대구 남산동 621-1번지에서 태어났고, 서상교 선생은 1923년 경상북도 대구시 남산정(현재 대구시 중구 동산동 동산아파트 자리)에서 태어나 이듬해 남산동 407-1번지로 이사해 이곳에서 10여년을 살았다는 게 후손의 증언이다. 중구청도 지난해 이 두 곳에 선생들의 옛집 터임을 알리는 표지를 붙였다.
 
대구시 중구청은 지난해 이종암 선생 옛집 터에 표지판을 붙였다 (2020.5.21) / 사진.평화뉴스 한상균 기자
대구시 중구청은 지난해 이종암 선생 옛집 터에 표지판을 붙였다 (2020.5.21) / 사진.평화뉴스 한상균 기자
 
다만 현재 남산동 '621-1번지'와 남산동 '407-1번지'에 있는 집들이 당시 선생들이 살았던 집 그대로 보존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100여년간 이어진 주소 개편으로 인해 인근 다른 집이 고택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지자체·광복회·후손 모두 재개발 사업 구간에 두 애국지사의 옛집 터가 포함된 것으로 보고 있다. 때문에 재개발로 아파트가 들어서면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는 사라지게 된다.

지난해에는 시인 이육사(1904~1944) 선생 남산동 고택이 '반월당지역주택조합사업'으로 철거됐다.
 
<태극단 자료집>...'체육국장'에 이름을 올린 서상교 선생 / 자료 제공.광복회 대구광역시지부
<태극단 자료집>...'체육국장'에 이름을 올린 서상교 선생 / 자료 제공.광복회 대구광역시지부
 
독립운동가 서상교 선생 옛집 터(2020.5.21.대구시 중구 남산동) / 사진.평화뉴스 한상균 기자
독립운동가 서상교 선생 옛집 터(2020.5.21.대구시 중구 남산동) / 사진.평화뉴스 한상균 기자
 
서상교 선생 아들인 서보혁(68)씨는 "아버지 '생가터'에는 이미 아파트가 생겨 흔적도 찾을 수 없다"며 "옛집 터 자취도 사라진다고 하니 아쉽다. 작은 표지라도 세워 아버지를 기억해달라"고 호소했다. 노수문 광복회 대구지부장은 "남산동에는 독립운동가와 문화예술인이 많이 살았던 곳으로 보존 가치가 높지만, 대구시와 중구청은 역사적인 가치를 고려하지 않고 또 무분별한 개발을 반복하고 있다"며 "앞으로 개발을 하기 전에는 반드시 문화유산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에 대해 김용술 대구시 도시정비과장은 "재개발을 중지하거나 옛집 터만 따로 남겨서 보존할 수는 없다"며 "아파트와 함께 지어지는 근처 공원에 표지를 세우는 등의 보존방안을 고민하겠다"고 밝혔다.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에 따르면 이종암 선생은 1896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대구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농림학교, 부산상업학교를 다니다 학비가 부족해 중퇴했다. 1916년 대구은행에 입사해 출납계 주임을 맡았다. 1917년부터 만주를 오가다가 1919년 11월 중국 길림성에서 김원봉, 이성우 선생 등과 '의열단'을 조직해 부단장을 맡았다. 1922년 상해에서 일본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의 암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1925년 경북 달성군으로 갔다가 경찰에 붙잡혀 이듬해 12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살인미수 등 혐의로 징역 13년형을 선고 받고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30년 6월 순국했다. 선생은 1962년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서상교 선생은 1923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1942년 5월 대구상업고를 다니다가 동급생들과 항일학생결사 '태극단'을 조직했다. 태극단은 전국 학교와 지역별 조직을 만들어 항일투쟁을 이어가는 것을 목적으로 한 단체다. 서상교 선생은 체육국장을 맡아 단원들 교육을 했다. 하지만 1943년 5월 태극단이 발각돼 서상교 선생은 대구경찰서에서 모진 고문을 받았다. 1944년 1월 대구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등 혐의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인천소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으로 출옥해 2018년 숙환으로 별세했다. 서상교 선생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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