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형무소 수인번호 264..."대구에 이육사기념관과 표지석 건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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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사업회 "17년간 대구에서 독립운동, 고택에 기념관 세워야" / 대구시 "10월까지 방안 내놓겠다"


대구 시민단체가 이육사 선생이 살았던 대구 고택에 기념관과 표지석 건립을 대구시에 요구했다.

시민 220여명이 참여하고 있는 '독립투사 민족시인 이육사기념사업회(상임대표 강창덕)'는 12일 대구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018년 10월 남산동에 있는 이육사 선생의 고택이 일부 철거된 것을 확인했다"며 "시민들에게 올바른 역사교육과 애국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고택 근처에 이육사기념관을 설립하고, 철거된 고택 자리에는 표지석을 세워 기념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앞서 지난 2015년 이육사 선생의 고택 일대가 '반월당 지역주택조합 사업'에 포함됐고, 최근 철거가 이뤄지면서 고택 역시 철거됐다.

'독립투사 민족시인 이육사기념관 건립 촉구 기자회견'...강창덕(93) 이육사기념사업회 상임대표가 기념관 건립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2019.8.12.대구시청 앞) / 사진.평화뉴스 한상균 수습기자
'독립투사 민족시인 이육사기념관 건립 촉구 기자회견'...강창덕(93) 이육사기념사업회 상임대표가 기념관 건립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2019.8.12.대구시청 앞) / 사진.평화뉴스 한상균 수습기자

기념사업회는 "이육사 선생은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17번이나 투옥되면서 무장독립투쟁에 헌신하다 순국한 독립투사"라며 "선생이 17년이나 살았던 대구에서, 해방된 지 74주년이 되도록 선생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올바르게 조명하거나 기념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또 최근 일본의 경제보복과 관련해 "일본 군국주의 세력이 과거를 부인하며 이웃나라에 침략 야욕을 드러내고 있다"며 "이육사 선생의 고귀한 나라사랑과 희생정신을 교훈삼아 국가적 위기를 극복해야한다"고 했다.

강창덕(93) 이육사기념사업회 상임대표는 "기념사업회를 지금 하는 것은 만시지탄일지도 모른다"며 "하지만 우리 대구에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이육사기념관을 만드는 것이 우리 사업회의 과제"라고 의지를 다졌다.

사진 출처. '이육사문학관'(경북 안동) 홈페이지
사진 출처. '이육사문학관'(경북 안동) 홈페이지

이육사 선생의 호적상 본명은 이원록이다. 이육사문학관(경북 안동)과 기념사업회에 따르면, 이육사는 1904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1920년 가족들과 함께 대구 남산동 662-35번지로 이사해 1937년 서울 종로로 이사를 가기 전까지 17년 동안 대구에서 살았다. 선생은 또 백학학원(영천)과 교남학교(현 대구 대륜고등학교)를 다녔으며, 1923년 백학학원에서 9개월간 교편을 잡은 뒤 중외일보와 조선일보 대구지국에서 기자로 근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육사 선생은 대구에서 독립운동단체 '조선의열단'에 가입했고,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의거'에 연루돼 대구형무소에 2년 여간 수감됐다. 이 때의 수인번호 '264'를 자신의 이름으로 썼다. 또 출소 후 에는 자신의 첫 문학작품 '말'을 지어 '조선일보'에 발표했다. 이처럼 이육사 선생의 항일운동과 문학활동의 시작이 '대구'였다.

'독립투사 민족시인 이육사기념관 건립 촉구 시민토론회'(2019.8.12.대구시의회) / 사진 제공. 이육사기념사업회
'독립투사 민족시인 이육사기념관 건립 촉구 시민토론회'(2019.8.12.대구시의회) / 사진 제공. 이육사기념사업회
'독립투사 민족시인 이육사기념관 건립 촉구 시민토론회'(2019.8.12.대구시의회) / 사진.평화뉴스 한상균 수습기자
'독립투사 민족시인 이육사기념관 건립 촉구 시민토론회'(2019.8.12.대구시의회) / 사진.평화뉴스 한상균 수습기자

기념사업회는 기자회견에 이어 대구시의회에서 시민토론회도 열었다. 이 자리에서 김우철(55) 기념사업회 공동대표는 "이육사 선생은 1904년에 태어나 1944년에 돌아가셨는데 40년의 짧은 생애에 17년을 대구에 사셨다"며 "그 자체만으로도 역사적인 의미가 존재한다"고 했다. 김태형(45) 달서구의원은 "윤동주 시인과 정지용 시인이 재학했던 일본 도시샤대학에서도 시인들의 시비를 세웠다"며 이육사를 기념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기념사업회는 또 김호섭 대구시 문화체육관광국장과 간담회도 가졌다. 기념사업회에 따르면, 김호섭 국장은 간담회에서 "표지석 설치는 반월당 지역주택조합 측과 협의를 거쳐 원만히 해결되도록 할 것"이라며 "기념관이 될지 고택복원이 될지는 모르지만 기념사업회와 소통하여 10월까지 방안을 내놓도록 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육사 선생 연표>

1904년 5월 18일(음 4.4)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천동(당시 원촌동) 881번지에서 진성 이씨 이가호(李家鎬, 퇴계 이황의 13대손)와 허형(許蘅)의 딸인 허길(許吉) 사이에 차남으로 출생, 어릴 때 이름은 원록(源祿), 두 번째 이름이 원삼(源三), 자는 태경(台卿)
1909년  5세 조부 치헌(痴軒) 이중직(李中稙)에게서 소학 배우기 시작
1916년 12세 조부 별세, 가세가 기울기 시작, 한문학 수학, 이 무렵 보문의숙에서 수학
1919년 15세 도산공립보통학교(보문의숙을 공립으로 개편) 1회 졸업
1920년 16세 영천군 화북면 오동(梧洞) 안용락(安庸洛)의 딸 일양(一陽)과 결혼. 안동군 녹전면 신평동 듬벌이로 이사, 부모를 비롯한 가족 모두 대구(남산동 662번지)로 이사.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에게서 그림을 배움. 동생 원일(源一)은 글씨를 배워 일가를 이룸.
1921년 17세 처가에서 가까운 백학학원(1921 설립)에서 수학(보습과 과정 - 1922년까지), 둘째 이름 원삼을 사용.
1923년 19세 백학학원에서 교편 잡음(9개월 동안)
1924년 20세 4월 학기에 맞추어 일본 유학
경찰기록 - 도교쇼오소쿠(東京正則)예비학교, 니뽄(日本)대학전문부,
검찰신문조서 - 킨죠우(錦城)고등예비학교 1년간 재학
1925년 21세 1월에 귀국, 대구 조양회관을 중심으로 활동, 이정기ㆍ조재만 등과 어울리며 베이징 다녀오다.
1926년 22세 7월 베이징 쭝구어(中國)대학 상과에 입학하여 7개월 재학(혹은 2년 중퇴)
1927년 23세 여름에 귀국, ‘장진홍의거(10월 18일)’에 얽혀 구속됨
1929년 25세 5월에 증거불충분으로 면소되어 풀려남(12월 무혐의로 종결)
1930년 26세 1월 3일 첫 시(詩) <말>을 조선일보에 발표(이활), 아들 동윤(東胤) 태어나다.(만 2세에 사망) 광주학생항일투쟁이 파급되자 1월 10일 대구청년동맹 간부로서 붙잡히고, 19일 풀려남. 2월 중외일보 대구기자로 임용. 3월 대구경찰서에 붙잡혔다가 풀려남.
8월 조선일보사로 전근, 대구지국 근무. 10월 《별건곤(別乾坤)》에 이활(李活), 대구이육사(大邱二六四) 이름으로 '대구사회단체개관(大邱社會團體槪觀)' 발표
1931년 27세 1월에 ‘대구격문사건’으로 붙잡히다. 3월 석방되다. 잦은 만주 나들이. 8월 조선일보 대구지국으로 옮기다. 만주에 3개월 머물다 연말에 귀국하다.
1932년 28세 3월 조선일보사 퇴사. 4월 혹은 5월 펑티엔으로 감, 7-8월 베이징과 텐진에 머물다. 9월 베이징에서 난징으로 이동하고, 10월 20일에 난징 근교 탕산에서 문을 연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 학원(學員)으로 입교하여 군사간부 교육을 받다.
1933년 29세 4월 20일 1기생으로 졸업(26명), 졸업식에 연극 공연하다. 4월에 국내에서 《대중(大衆)》 창간임시호에 평문 '자연과학(自然科學)과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 게재하다.(미리 투고한 원고), 같은 책에 「게재되지 못한 글 목록」에 ‘李戮史’ 이름의 <레닌주의철학의 임무>가 등장하다. 5월에 상하이로 이동, 6월 상하이에서 루쉰(魯迅) 만남. 7월에 서울로 잠입하다.
1934년 30세 3월 20일 군사간부학교 출신 드러나 경기도경찰부에 구속됨(동기생이자 처남인 안병철이 자수한 후 졸업생 연이어 검거됨). 6월 기소유예 의견으로 석방(8월 기소유예 확정), 시사평론 다시 집필 시작.1935년    31세정인보 댁에서 신석초 만나 친교, 다산 정약용 서세 99주기 기념 《다산문집(茶山文集)》 간행에 참여, 신조선사(新朝鮮社)의 《신조선(新朝鮮)》 편집에 참여, 본격적으로 시(詩) 발표.
1936년 32세 7월 동해송도원(포항 소재)에서 휴양, 8월 경주 남산 옥룡암에서 휴양.
1937년 33세 서울 명륜동에서 거주, 평문의 성격 바뀜(시사에서 문학으로)
1938년 34세 가을 신석초ㆍ최용ㆍ이명룡 등과 경주 여행, 가을에 신석초와 부여 관람, 12월 부친 회갑연
1939년 35세 종암동 이사, 8월 《청포도(靑葡萄)》발표
1940년 36세 시 《절정》, 《광인의 태양》 등 발표
1941년 37세 2월 딸 옥비(沃非) 태어나다. 4월 부친상(서울 종암동 62번지), 가을에 폐질환으로 성모병원 입원하다.
1942년 38세 2월 성모병원 퇴원, 경주 기계 이영우 집에 머물다. 7월 신인사지(神印寺址, 옥룡암玉龍庵)에서 요양, 서울 수유리 거주
1943년 39세 1월 신정에 석초에게 베이징행 밝힘, 한글 사용 규제 받자 한시(漢詩)만 발표. 4월에 베이징으로 감, 충칭과 옌안행 및 국내 무기 반입 계획 세움. 7월 모친과 맏형 소상에 참여하러 귀국, 늦가을에 붙잡혀 베이징으로 압송됨, 베이징주재 일본총영사관 경찰에 구금된 것으로 추정됨.
1944년 40세 1월 16일 새벽, 베이징 네이이구(內一區) 동창후뚱(東廠胡同, 일제시기에는 東昌胡同) 1호에서 순국하다.(이곳에는 당시 일제의 문화특무공작기관인 동방문화사업위원회가 있었다.) 동지이자 친척인 이병희(여)가 시신 거두어 화장하고, 동생 원창에게 유골 인계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됨(1960년에 고향 원촌 뒷산으로 이장)
1945년 동생 원조가 유시(遺詩) 《꽃》, 《광야(曠野)》가 소개됨
1946년 동생 원조가 《육사시집(陸史詩集)》을 출판함.
1968년 건국훈장 애국장(건국포장에서 1990년 기준 변화로 바뀜) 추서
2004년 탄신 100주년, 순국 60주기 맞추어 이육사문학관 개관, 생가 복원.

(자료 출처. 이육사문학관/경북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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