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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고려인의 한 서린 역사 '블라디보스톡'
이윤채령 / 독립운동의 거점, 20만명이 넘는 고려인 강제이주..."잊혀진, 내 나라의 역사"
2018년 09월 07일 (금) 11:22:39 평화뉴스 pnnews@pn.or.kr

연해주는 역사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한국과 아주 밀접하게 닿아있는 지역이다. 러시아 여객기를 타면 1시간 30분 안에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지만, 북한 영공을 가르지를 수 없는 우리 국내선은 먼 바다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3시간이 조금 넘게 걸린다. 그래서인지 정서적으로 유럽국가나 동남아의 섬들 보다 더 멀게 느껴지고, ‘러시아인들은 불곰을 맨손으로 때려잡는다더라’, ‘러시아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보드카를 한 병씩은 거뜬히 해치운다더라’, ‘러시아인은 전부 백인아니냐’ 등 얼음왕국을 둘러싼 무수한 전설이 존재한다. 그래서 고백하건데 이번 블라디보스톡 여행을 준비하면서 문득 러시아가 이렇게 가까운 나라였구나 하고 화들짝 놀랐다.

블라디보스톡에 대한 첫 기억은 흡사 병동을 연상케 한 공항이다. 유난히 길고 티끌 하나 없이 반짝이는 통로들과 찰나의 머뭇거림도 용납하지 않는 출입국 직원들의 냉담함, 삭막하고 스산하기 까지 한 미색의 건물 내벽은 대단히 엄격한 아버지와 같은 권위를 발산하고 있다. 따라서 여행의 설렘에 상기된 이방인들은 공항을 나서기도 전에 곧장 주눅이 들고 이 베일에 싸인 나라를 대할 때에 일종의 경건함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공항에서 택시 기사와 한참을 흥정한 뒤(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건 세계 어느 곳이나 다르지 않은 듯싶다.) 숙소가 있는 ‘포킨 제독 거리Admirala Fokina Street’(흔히 아르바트 거리라 불린다)까지 오십 분을 달렸다. 끝도 없이 펼쳐진 황무지를 양 옆구리에 끼고 달리던 택시는 이내 울창한 숲을 가로질러 장장 삼십분을 달리더니 탑승객들이 꾸벅꾸벅 졸아대기 시작할 무렵에 새삼스레 여기가 극동의 항구도시구나! 하고 입이 떡 벌어질만한 아름다운 바다를 보여준다. 다리를 기준으로 한 편은 겨울이 되면 꽁꽁 얼어붙고 다른 한 편은 파도가 친다니 참 불가사의한 바다다. 함께한 동료 활동가들 모두 여행 직전 까지 쉴 틈 없이 업무노동과 양육노동에 시달렸기 때문에, 짐을 풀고 해양공원 까지 산책하는 것으로 첫 날의 일정은 가볍게 마무리했다.
 
   
▲ 독수리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블라디보스톡 앞 바다 / 사진. 이윤채령
   
▲ 노을 지는 포킨 제독 거리(아르바트 거리) / 사진. 이윤채령

조선인-독립운동가-고려인이 걸었을 거리를 걸어봅니다

올 여름은 러시아에도 견디기 힘든 무더위가 찾아왔다고 하던데,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려 공기가 서늘하고 숙소를 나서는 걸음이 가벼웠다. 포킨 제독 거리를 사이에 두고 우리 숙소의 건너편에는 철문이 굳게 닫힌 건물이 하나 있는데, 유심히 살펴보지 않는다면 풍경 속으로 사라질 정도로 볼품이 없었다. 그곳은 혹독한 겨울의 땅에서 ‘뻬쯔카печка’(난로)라 불리던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의 거주지로 추정되는 곳이었다. (아직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정부에서 나서서 보존 작업을 할 수는 없고, 민간 여행사에서 임시 표지판을 부착하여 최재형 선생의 거주지임을 알리고 있다.) 우수리스크의 생가에는 1919부터 1920년 4월 참변으로 돌아가시기 전 까지 잠시 거주하셨을 뿐, 대부분의 독립운동은 블라디보스톡을 거점으로 전개되었다고 한다. 최재형 선생의 출신에 대한 설은 아직도 분분한데 러시아인 양부모에게 입양되어 러시아군인으로 복무했다고 한다. 군 제대 후에 방산물자를 관리/판매하는 일을 통해 벌어들인 재산을 평생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했으며 정작 자신과 식솔들은 끼니 걱정을 한 날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1909년의 그 유명한 하얼빈 의거도 블라디보스톡의 최재형 선생의 집에서 준비된 것이라고 한다. 거사 3년 전부터 안중근 의사는 최재형 선생에 몸을 의탁해 함께 지내면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할 계획을 세우고 단지했다.

   
▲ 블라디보스톡 최재형 선생 거주지 / 사진. 이윤채령
   
▲ 우수리스크 최재형 선생 생가 / 사진. 이윤채령

최재형 선생 생가에서 해양공원 방향으로 걸어가다 포킨 제독 거리가 끝나는 곳에서 우측으로 몸을 돌려 경사진 길을 내려가면 1세대 한인 이주민들이 거주했던 ‘개척리’와 이후 이동하여 군집을 이룬 ‘신한촌’에 닿을 수 있다. 이 지역은 원래 중국 땅이었으나 베이징조약(1860) 이후 러시아 국토가 되었다. 그러나 정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귀족들은 초기에 이주를 꺼렸고, 살기 위해 조선 국경을 넘어 러시아로 흘러들어온 고려인들이 먼저 이주해 터를 잡고 척박한 땅을 개척해갔다. 이들은 1911년 이주 명령을 받아 신한촌(불과 3km 정도 떨어진 거리)으로 옮겨가기 전 까지 계속 개척리에 살았다. 고려인들은 발이 닿는 곳은 어디든 부지런히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사람이 살만한 마을을 만들어내는 마법 같은 생명력을 발휘했다. 이들은 애정을 가지고 삶을 가꾸어 나갔으며, 일제 강점기를 전후하여 독립운동가들과 농민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블라디보스톡에 거주하는 고려인은 20만이 넘어섰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이 하나 둘 이주해오고 드디어 러시아 도시의 완성이 도래하자, 이 땅의 개척자였던 고려인들은 문제적 이방인으로 그 신분이 격하되었다. 그리고 1937년 9월 1일, 러시아 당국은 고려인들에게 가구별 분산집합을 명령했으며, 몸에 걸친 한 벌의 옷과 3일치 식량이 담긴 가방을 제하고는 어떤 짐도 가져가지 못하게 했다. 예정된 날 블라디보스톡 기차역에 이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도착한 것은 사람이 타는 열차가 아니었다. 분뇨가 가득한 가축수송열차였다.

시간이 흘러 아주 어린 시절에 부모와 함께 강제이주를 당했다는 한 할머니의 이야기가 슬픈 노래처럼 전해졌는데, 처음에 그 꼬마는 소풍을 가는 것 같아 아주 들뜨고 행복했다고 한다. 열차가 오고 가는 것을 멀찍이서 바라보기만 했지 그 열차를 타고 어디로든 자유롭게 다녀온다는 것은 당시의 조선인들에게 허용되지 않는 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온 가족이 함께 열차를 타게 된 것이다! 게다가 책 한권은커녕 여벌옷도 가져갈 수 없는 형편이었으므로 부모들은 블라디보스톡을 떠나기 전에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가장 맛있는 음식을 해 먹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어느 순간 이 열차여행이 대단한 비극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어느 날인가부터 매일 사람들이 기차 밖으로 던져졌기 때문이다.

이십만 명이 넘는 조선인 가운데 떠나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도착할 땅이 어디인지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묻지도 못한 채, 비위생적인 열차칸 안에서 굶주림과 추위, 병마에 의해 수많은 가족들이 죽어나갔고, 얼마나 더 가야할지, 언제쯤 열차에서 내려 땅을 밟을 수 있을지 알 도리가 없었던 사람들은 자신의 손으로 가족의 시신을 열차 밖으로 던져야했다. 묘비도 곡소리도 없고, 다시 찾아올 수도 없는 곳에. 최근에야 한 차례 고려인 강제이주에 대한 정부차원의 사과가 있었지만, 과오에 대한 부끄러움을 회피하기 위해 희생의 규모를 축소하는 등 부당한 왜곡이 더해졌다.

사실 세계가 이 역사적 비극을 명명하는 단어만 놓고 보더라도 이미 피해자에 대한 엄격한 타자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주’라 함은 이후의 삶이 약속된 말처럼 들린다. 혹 이주라는 단어 속에 국가적/민족적 대규모 가해, 학살이라 칭해도 모자라지 않을 사건이 축소되어왔던 것은 아닐까. 우리 한국인들조차 홀로코스트에는 그토록 예민한 감수성을 발휘하면서, 한국인이 아닌 ‘고려인’, 지리적 공간의 변경으로서의 ‘이주’ 같은 단어를 통해 먼 나라 이방인의 지나간 슬픔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 1864년을 공식적으로 처음 이주한 해로 정하여 2014년 한인이주 1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 / 사진. 이윤채령

미래로 달리는 열차

그러나 블라디보스톡 기차역에서 비극적 과거만을 마주한 것은 아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종착역이자 출발역인 극동의 기차역에서 앞으로 우리가 얼마나 확장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가능성과 미래를 볼 수 있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최남단으로 내려오면 부산역이 있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톡 서쪽의 이르츠쿠츠에서 아래로 내려오면 하얼빈이, 더 아래로 내려오면 신의주 옆에 위치한 단둥역이 있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가 내 지리적 위치라고 배워왔다. 그러나 북한과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단절된 현실 속에 중국과 러시아, 더 나아가 유럽으로 연결되는 육로에 대한 접근권을 완전히 박탈당한 고독한 섬나라에 살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자연히 우리의 사고는 대륙으로, 세계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일본과 중국 사이를 표류하고 있다.

사고와 문화뿐 아니라 먹고 사는 일 또한 그렇다. 실제로 중국은 본토에서 생산한 기계의 부품이나 산업 물자들을 배나 비행기가 아닌 열차를 이용해 러시아 내륙, 그리고 유럽 까지 한 번에 운송하고 있으며, 운송료의 절감 덕분에 파격적인 가격경쟁력으로 세계 시장의 선두로 올라서고 있다. (어쩌면 한반도 통일을 가장 염원하는 이는 다름 아닌 삼성그룹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열차가 북한을 지나 횡단열차로 연결된다면, 제조업뿐만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노동에 대한 접근성과 기회가 현재의 무시무시한 실업난을 해결할 돌파구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기차역에 걸린 횡단열차 노선도와 기차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보니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슴이 부푸는 듯 했다.

러시아 또한 세계로의 문을 열기 위해 새로운 도전들을 해나가고 있다. 블라디보스톡 기차역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와 달라진 것은 딱 두 가지인데, 첫째는 간판이고 둘째는 시간이다. 밤에도 기차역이 눈에 띄도록 전선이 들어간 큼지막한 간판을 새로 달았고, 올해 8월 1일자로 모스크바타임을 버리고 세계시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붉은 광장에 잠들어 있는 레닌의 미이라 만큼이나 꿈쩍도 하지 않던 러시아가 바로 지금,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 블라디보스톡 기차역 / 사진. 이윤채령
   
▲ 승객들이 내리고 있는 열차 / 사진. 이윤채령

우수리스크, 강제이주 이후의 삶

사실상 여행의 마지막 날, 블라디보스톡 시내에서 차로 한 시간 이십 분 가량 떨어진 우수리스크에 다녀왔다. 우수리스크는 최초의 임시정부인 전로한족중앙총회(이후에 상해로 넘어갔다.)가 결성되고 고려인들을 위한 학교가 있었던 지역인데, 지금도 많은 고려인들이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다. 현재 우수리스크에 사는 고려인의 90%이상은 스탈린 사후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재이주해온 사람들이다. 우수리스크에서 고려인들은 러시아 종교를 받아들이는 대가(세례 받음)로 땅을 받아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종교적 마찰은 차치하더라도 옛 조선의 문화를 보전(돌잡이, 제사 등)하는 민족적 특성 때문에 후에 한국에서 기독교 선교사들이 방문했을 때에 굉장한 곤란을 겪었다고 한다. 아무튼 원래 러시아인들은 비타민 섭취량이 적어서 치아가 쉽게 삭고 피부병이 잦았는데, 고려인들이 정착해 오이 등의 작물을 심고 산에서 나는 고사리를 캐다 먹는 법을 가르쳐주면서 건강상태가 좋아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고려인문화센터를 운영하고 계신 고려인 후손 김발레리아 선생님께서 러시아인들이 고사리의 존재를 미리 알았더라면 전쟁기간에 굶어죽는 사람이 훨씬 적었을 것이라고 농담이 절반 섞인 목소리로 말해주셨다.

   
▲ 전로한족중앙총회 결성장소. 어째서인지 러시아 정부에 의해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 사진. 이윤채령
   
▲ 우수리스크에 살던 고려인들이 다녔던 학교건물. 지금은 예술대학이 되었다. / 사진. 이윤채령

2003년 노무현 정부 이전에는 사실 고려인 2, 3세들 대부분이 독립운동 때문에 러시아로 이주해오게 된 가족의 역사를 몰랐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의 뿌리가 어디서부터 기원했는지, 동양인의 외양을 하고 왜 러시아 땅에 살고 있는지, 조선어는 어떤 것인지, 솟아오르는 의문에 대한 답을 부모로부터 전해 듣지 못한 채 소수민족 콤플렉스를 간직하고 살아야 했다. 그러나 정부 차원에서 소통을 장려하고 강제이주 역사의 공론화를 시도하면서 많은 고려인들이 정체성에 대해 긍지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최근에는 많은 한국인들이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를 방문해 역사적 문제에 대한 책임의식을 보이면서, 러시아의 소수민족 사회 내에서도 고려인들의 긍지를 높이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한다. 전혀 몰랐던 이야기들을 들어 부끄러움을 느끼고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된 것은 우리 여행객들인데, 김발레리아 선생님께서 한국인들의 방문에 고마워하고 여행을 축복해주셔서 어쩐지 죄송한 마음이 들고 무언가 북받치는 것도 같았다.

매년 여름이면 우수리스크에는 물난리가 나서 도로와 집이 잠긴다는데, 올해도 한바탕 퍼부은 직후라 이상설 선생 유허비에는 방문 할 수가 없었다.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는 곳곳에 침수피해를 입은 집들이 보였는데, 수이푼강 근처 저지대가 주로 고려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라 하니 우수리스크에서의 삶도 평탄하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생 끝에 국경을 넘어 연해주로 이주했다가, 얼어붙은 황무지로 보내져 생을 걸고 지역을 개척한 후 또 다시 새로운 땅으로 돌아와 국가도 없이, 어쩌면 눈물도 없이 매해 여름의 홍수를 겪어내며 살아왔을 고려인들의 삶을 떠올리기만 해도 온 몸이 고단해진다.

   
▲ 홍수피해를 입은 고려인 주거주지역 / 사진. 이윤채령

러시아인의 미소

여행을 하는 내내 어리둥절했던 것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사람들에게 듣던 것 보다 현지 물가가 훨씬 비싸다는 점. 그리고 다른 하나는 거리나 식당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즐거움의 반대편에 있는 것 같다는 점. 그런데 우연히 게스트하우스의 사장님으로부터 불과 몇 년 사이 블라디보스톡이 관광지로 부상하면서 물가도 함께 상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임금은 좀처럼 오르지 않는다. 2016년 자료 기준 러시아인의 월 평균 임금은 3만6000루블(현재 환율로 약 60만원)이었는데, 임금 격차가 높기로 유명한 나라이니 대다수의 사람들이 받는 임금은 평균 임금 보다 아래일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낮에 간 식당의 종업원들은 돈을 얼마나 버나요? 돌아온 대답이 충격적이었다. “식당 종업원들은 보통 25만원 언저리의 월급을 받아요. 그래서 숙소 손님들에게 주문할 때 먼저 팁을 내는 걸 추천해요. 저 사람들은 사실 소득에서 팁이 엄청 크거든요. 그런데 한국에는 팁 문화가 없으니까 한국인 손님이 가면 보통 팁을 받기 힘들겠다고 생각해서 반가워하지 않죠.” 팁을 지불할 때에 태도가 돌변하는 종업원들에게 내심 서운한 마음이 들었었던 낮 시간의 내 모습이 너무 어리석게 느껴졌다. 왜 나는 여행지에서 만나는 미소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어떤 이들에게 미소는 금기시되거나 커뮤니케이션에 불필요한 사치품 정도일지도 모르는데. 나는 러시아를 모르면서 러시아를 판단했던 것이다. 

심지어 러시아는 과거사의 상흔이 아주 깊은 국가다. 한 걸음의 혁명과 두 걸음의 후퇴 뒤 긴 겨울을 버티는 동안 러시아인들에게 웃음이란 아주 조심스러운 것이 되었을 것이다. 2차 대전이 시작된 후에는 스탈린의 전략적 패배로 1941년에서 1945년 사이에만 약 4천만 명의 군인들이 사망했는데, 그 뒤로는 웃음이란 일종의 특권이 되었을 것이다. 아직도 전쟁 사망자를 애도하기 위한 불꽃이 밝혀져 있는 러시아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든 얼굴에 미소를 띈 채 살아간다는 일은 어색할 것이다. 어느 지식인들에게 러시아는 이름만 들어도 벅찬 혁명국가지만 막상 러시아인들에게는 아직도 눈물 젖은 이름이다.

나는 이곳에 오기 전에 내 나라의 역사도 채 알지 못했고, 러시아를 방문하면서 러시아의 이야기는 더욱 몰랐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류의 인정에 대한 호소나 일상화된 서비스 노동에 길들어진 편협한 가치관을 가지고 잠시나마 타인을 판단하려 했던 좁은 시야를 반성하며 돌아오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하기 전에 보아도 좋을 영화와 책
- 김소영, <고려 아리랑 : 천산의 디바>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한 후 고려인들의 삶에 힘이 되어주었던 고려극단의 두 기둥이자 떠도는 여인들, 이함덕과 방 타마라의 삶을 추적한 영화.
- 허혜란, 오승민, <503호 열차> 1937년 구소련의에 의해 강제이주를 당한 고려인의 비극을 상상의 이야기로 풀어낸 그림책.
- 조선희, <세 여자> 조선독립운동과 한국공산주의운동사에서 거대한 축이었으나 잊힌 세 여성 혁명가의 연대기.

* 본 여행은 2018 여성단체 역량강화 지원사업을 통해 한국여성재단, 생명보험사회공헌위원회, 교보생명에서 후원해주셨습니다. - 필자

   
 






[기고]
이채령 / 대구풀뿌리여성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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