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오보 역사, 멀쩡한 빌 게이츠 피살부터 성폭행범 만들기

미디어오늘 정철운 기자
  • 입력 2015.05.10 17:3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간에 쫓겨서…", "취재원을 너무 믿었다"…잊지 말아야 할 오보의 역사

 
오보는 대한민국의 굴곡진 언론사史를 관통한다. 기자들은 취재원 말만 믿었다가 뒤통수를 맞고, 정부 발표만 받아쓰며 대국민 사기극에 동참했다. 왜곡방송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는가 하면, 권력자의 입장만 대변하며 스스로 오보를 자초했다. 미디어오늘이 주요 오보 20선을 정리했다. 선배들의 ‘오욕의 역사’가 후배들에게 계승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잊지 말아야, 되풀이하지 않는다. <편집자주>

①1956년 한국일보 ‘견통령’

한국일보는 1956년 3월 12일자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이승만 견통령으로 내보냈다. 大統領을 뽑는다는 것이 犬統領을 뽑았고 교열에서도 이를 잡아내지 못했다. 당시에는 납 활자를 쓰던 시대여서 식자과정에서 공무국 직원이 大자를 犬자로 잘못 뽑은 것이라는 설과 大자 위에 이물질이 끼었다는 설이 돌았다. 대통령을 하루아침에 개로 만들어버린 이 사건으로 ‘큰 위기’를 겪은 한국일보는 이후 大統領이란 글자를 하나로 묶어 고정 활자로 만들어 썼다.

②1980년 동아일보 ‘한국산 호랑이’

동아일보는 1980년 1월24일자 1면에서 “멸종됐던 것으로 알려졌던 한국산 호랑이가 발견돼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며 우람한 호랑이 사진을 내보냈다. 동아일보는 시민 박아무개씨가 1979년 12월 29일 경북 경주 부근 대덕산 기슭에 등산을 갔다가 호랑이를 발견해 두 장의 사진을 찍었다며 입수배경을 보도했다. 58년만의 한국산 호랑이 등장에 동물학계는 뒤집혔다. 하지만 다음날 한국일보는 사진 속 호랑이가 어린이대공원에 살고 있는 벵골산 호랑이라고 보도했다. 동아일보가 박씨를 추궁한 결과 “어린이대공원에서 촬영했다”는 실토를 받아냈다. 동아일보는 당시 교수 코멘트까지 겻들이며 한국산 호랑이가 틀림없다고 보도했는데, 한국산 호랑이도 아니었다. 취재원의 거짓정보에 언론사가 농락당했다. 박씨가 일반카메라로 어떻게 호랑이가 뚜렷하게 나올 만큼 근접촬영을 할 수 있었는지, 상식적인 의문을 갖지 않았던 결과였다.     
 

③1986년 조선일보 ‘김일성 사망’

1986년 11월 16일 조선일보에 김일성이 피격․사망했다는 보도가 등장했다. 이후 보도는 경쟁적으로 등장했다. “북괴 김일성이 14일쯤 북괴의 反김세력에 의해 피습, 사망한 것이 확실시 된다”, “김정일도 부상을 당했거나 사태를 통제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은 것으로 관측된다”, “16일 오후 판문점의 북괴선전마을에 조기가 게양됐다”…. 하지만 11월 20일자 신문은 살아있는 김일성 앞에서 일제히 오보를 인정해야 했다. 언론은 오보책임을 “북괴의 작태”로 돌리며 민망함을 피했다. 당시 오보는 일본과 미국 정보당국에서 비롯된 착각을 조선일보가 그대로 받아쓴 결과 일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일보는 김일성 사망을 제일 먼저 단정적으로 보도한 반면, 중앙일보는 ‘김일성 피살설’이라 보도하며 종합일간지 중 유일하게 오보를 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④1991년 국민학생의 여동생살인사건 

1991년 10월 7일 충격적 사건이 보도됐다. 10살짜리 국민학생 권아무개군이 여동생을 살해한 뒤 집에 불을 질렀다는 내용이었다. 언론은 경찰의 입을 빌려 권 군이 오락실에서 놀다 늦게 들어온 뒤 동생이 대들어 싸우다 홧김에 배를 찔렀다고 보도하며 권 군을 범인으로 단정했다. 10살짜리 어린이가 이런 끔찍한 범행을 저지를 수 있는가에 대해선 의문을 던지지 않았다. 범행동기를 면밀히 취재하지도 않았다. 1993년 재판부는 “경찰이 강압수사 후 오빠를 범인으로 단정, 발표하는 등 국가의 불법행위가 인정되므로 국가는 8천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사건직후 권군이 화상을 입고 연기에 질식해 병원에서 산소호흡까지 받는 등 스스로 불을 지른 것으로는 보기 어렵다”며 권군을 살해범으로 볼 수 없다고 밝혔다. 당시 언론은 “권 군이 교과서도 읽지 못할 정도로 교육을 부실하게 받았으며 폭력비디오에 빠져 모방범죄를 했다”고 보도했다. 소설이었다.
    

⑤1993년 한겨레 ‘서해 훼리호 백선장 생존’

1993년 10월10일 전북 부안군 위도면 앞바다에서 서해훼리호가 풍랑에 휩쓸려 침몰, 292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전 언론을 장식했던 훼리호 참사 보도 당시 한겨레는 “선장 백운두씨가 살아있다”고 보도했다. 한겨레는 12일 “구조작업에 나선 유진호 선장 최문수씨는 백씨가 소맷자락 하나 젖지 않은 채 구조어선에서 내리는 것을 봤다”고 보도했다. 이후 백씨의 행방을 놓고 “백선장 육지로 도주한 듯”(조선일보) “백선장 군산 오식도에 있다”(서울신문) 등 온갖 추측성 기사가 쏟아졌다. 검찰도 백씨가 도피중인 것으로 보고 백씨를 찾는데 수사력을 모았다. 하지만 10월 15일, 백 선장의 사체가 인양됐다. 백 선장은 가장 먼저 도망친 파렴치범이 아니었다. 최문수씨가 본 백선장은 백선장과 외모가 비슷한 인물이었다. 한겨레 기자는 “입이 열이라도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⑥1990년 국민일보 ‘육영수 여사 피격 진범은’ 

국민일보는 1990년 5월 육영수 여사 암살 진범이 문세광이 아닌 청와대 경호원이라 보도했다. 국민일보는 “이아무개 당시 서울시경 감식계장 역시 문세광이 4발을 발포했다고 증언했고 문이 쏜 4발 중 1발은 오발, 2발은 연설대, 3발은 태극기, 4발은 천장에 탄흔이 나타났다”며 “경호원이 육여사를 향해 뛰쳐나감과 동시에 또 한 명의 경호원이 육 여사를 향해 총을 발사했다는 충격적 사실이 포착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암살음모 관련자로 이름이 거명된 신아무개씨는 육 여사 사망 당시 청와대 본관 근무를 하고 있었다며 국민일보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결국 국민일보는 오보를 인정해야 했다. 당시 국민일보 기자는 “신씨를 만나 취재하려 했으나 소재파악을 못해 다른 취재원 증언을 토대로 기사를 쓴 게 잘못”이라고 밝힌 뒤 “기사 전반의 내용에 대해선 아직도 진실이라는 확신이 있다”고 주장했다.
    

⑦2003년 MBC ‘빌게이츠 피살’

2003년 4월 4일 오전 9시 37분 MBC를 통해 비롯된 오보는 전 언론사로 순식간에 퍼졌다. MBC는  ‘마이크로소프트 빌게이츠 회장 피살’ 이란 자막을 내보냈고, 2분 뒤 아나운서가 “빌 게이츠가 피살됐다고 CNN이 보도했다”고 보도했다. 빌 게이츠 회장이 한 행사장에 참석했다가 총알 2발을 맞고 인근 병원에 실려 갔으나 숨진 것으로 판명됐다는 내용이었다. 해당 보도를 YTN SBS 조선닷컴 인터넷한겨레 오마이뉴스 등 많은 매체가 받아썼다. 하지만 MBC는 불과 16분 뒤인 9시 53분 ‘빌 게이츠 사망설 사실 무근’이란 자막을 내보냈다. 빌 게이츠는 살아있었다. MBC는 CNN닷컴이란 문구가 찍힌 팩스를 받은 뒤 기사화했는데, 해당 팩스에 보기 좋게 속은 것이었다. 이무렵 매일경제는 CNN허위사이트의 빌 게이츠 피살설 해프닝을 보도한바 있다. 인터넷이 등장하고 속보를 초단위로 다투면서 사실 확인과정이 부족했던 결과였다.

⑧2005년 황우석 입만 바라본 황우석 보도

2005년 MBC <PD수첩>은 11월 22일 ‘황우석 신화와 난자의혹’편을 방송했다. 파장은 컸다. 취재윤리문제가 불거졌다. YTN은 김선종 연구원 인터뷰를 내보내며 <PD수첩>팀이 ‘황교수를 죽이러 왔다’는 발언을 한 것으로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PD수첩> 방송으로 줄기세포 관련 분야에서 일본에 세계 첫 논문을 뺏겼다고 보도했다. 두 보도 모두 오보였다. 언론은 황 교수팀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으로 보이는 정보를 관계자발로 보도했다. 황 교수의 사이언스 논문에 대한 검증은 부족했다. 황 교수의 논문조작으로 드러나자, 황 교수를 옹호하던 언론은 일제히 방향을 전환했다. 한학수 MBC PD는 “대다수 언론이 황 교수가 저명한 과학 잡지에 논문을 게재했다는 명성과 권위에만 주목하고 업적과 성과에 대해 엄밀한 검증을 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⑨1986년 평화의 댐 사기극에 동참한 언론

1986년 10월 31일. “북한이 강원도 휴전선 북방에 대규모 댐을 건설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는 보도가 일제히 쏟아졌다. 전두환정권은 “댐이 무너질 경우 서울이 물바다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언론은 정부 주장을 그대로 인용하며 “댐이 붕괴될 경우 84년 한강홍수의 10배에 달하는 물이 한강 전 유역을 가공할 수마로 뒤덮이게 만든다”고 보도했다. 방송은 컴퓨터그래픽을 동원해 63빌딩 허리까지 물에 잠기는 화면을 내보냈다. 언론은 몇 달간 평화의 댐을 집중 보도했다.

정부는 1986년 11월 ‘북괴의 수공에 의한 적화야욕을 무력화하기 위해 국민들이 성원을 보내달라’며 평화의 댐 건설 성금 모금을 시작했다. 1988년 평화의 댐 1단계공사가 완공될 때까지 모인 국민성금은 744억여 원이었다. 그러나 1993년 감사원 특감 결과 평화의 댐은 야당의 개헌주장을 봉쇄하기 위한 전두환‧장세동의 합작품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정부의 대국민사기극에 언론이 동참한 꼴이었다. 1993년 KBS는 “5공 당시에는 모든 정보를 권위주의 정부만이 독점하고 있었고 언론이 정부의 판단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고 밝혔다. 뒤늦은 사과였다.

⑩2012년 KBS ‘유치원생 학대’ 

KBS는 2012년 7월 25일 <뉴스9>에서 “유치원 교사가 원생을 학대하는 CCTV 장면이 또 공개돼 원성을 사고 있다”고 보도했다. KBS는 CCTV화면을 보여주며 “밥을 먹이던 교사가 갑자기 아이를 밀어버립니다”, “겁에 질린 아이를 밖으로 데려갔다 다시 돌아온 교사, 이번에는 옆에 있던 여자 아이의 머리까지 쥐어박습니다”, “어린 원생들을 발로 밀면서 줄을 맞추게 하고, 아이가 떨어뜨린 옷을 발로 차버립니다”라고 보도했다. 보도 이후 해당 유치원은 폐업 위기에 놓이며 소송을 제기했다. 서울남부지법은 2014년 1심 판결문에서 KBS가 CCTV영상을 내보내며 3개 장면의 재생속도를 2배 빠르게 돌려 실제로는 가벼운 신체 접촉 장면이 마치 아이를 때리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며 KBS측에 정정보도와 함께 4000만원 배상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사실을 다소 과장한 게 아니라 왜곡한 정도에 이르렀다고 봐야 한다”고 판시했다.

⑪1991년 ‘노사분규 0건’ 보도자료 받아쓰기

1991년 9월5일 전후로 “6․29선언 후 처음으로 전국에 노사분규가 사라졌다”는 보도가 쏟아졌다. 언론은 “9월 3일 이후 진행 중이거나 신규로 발생한 분규가 한 건도 없어 1526일 만에 무분규일을 기록했다”는 노동부 발표를 그대로 보도했다. 하지만 오보였다. 노동부가 무분규일이라고 밝힌 3일만 해도 숭실대에서 노조원 70여명이 단체교섭 결렬로 업무거부에 들어갔다. 경남 거제에선 삼성중공업 해양사업본부, 서울 구로공단에선 백산전자 노동자들이 농성과 작업거부에 나섰다. 기자들은 노동부의 믿기 힘든 보도 자료를 그대로 인용했다. 노동운동을 탄압하던 정부의 국면전환 노림수에 아무런 저항도 없었다. 1985년 김주언 한국일보 기자가 폭로했던 ‘보도지침’의 망령이 여전히 기자들을 옭아매고 있었던 장면이다. 

⑫2012년 MBC ‘신경민 의원 막말’

2012년 10월16일 MBC <뉴스데스크>는 “신경민 민주통합당 의원이 특정 방송사 간부들에 대해 막말을 쏟아냈다”고 보도했다. 특정 방송사 간부는 MBC였다. 2년 뒤인 2014년 10월 15일, 대법원은 MBC가 정정보도와 함께 신 의원에게 2000만원의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고 확정 판결했다. 재판부는 “출신지역과 지방대학 출신임을 비하하는 듯한 발언도 있었다”는 MBC뉴스의 사실적 주장이 왜곡됐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 사건 방송에는 MBC자신의 사익적 목적이나 동기가 상당 부분 내포되어 있다”며 명예훼손혐의를 인정했다. 당시 문제의 보도를 주도했던 인사들은 여전히 MBC에서 핵심 보직을 맡고 있다.

⑬1994년 강명도의 “북한 핵 보유” 기자회견

언론은 1994년 북한에서 귀순한 강명도씨 기자회견을 대서특필했다. 강씨는 북한이 핵탄두 5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핵폭탄급 주장을 펼쳤다. 그는 “강성산 북한정무원 총리를 장인으로 둔 덕분에 고급정보를 들을 경우가 많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파문이 커지자 일부 언론이 발언의 진위여부에 의문을 제기했고, 미국 정부는 강씨의 발언내용을 부인했다. 결국 정부는 기자회견을 주최한 안기부에 책임을 돌렸고, 안기부는 미확인 사실이라며 꼬리를 내렸다. 노광선 전 미디어오늘 편집국장은 해당 보도를 두고 “안기부관련 이슈는 키우기, 북한 핵문제는 일단 쓰고 보기, 타사에서 키우면 같이 키우기, 첫 보도가 잘못되면 후속보도로 얼버무리기 등 전형적인 대북보도 태도가 노출됐다”고 지적했다. 강명도씨는 현재 TV조선 등 종합편성채널에서 북한전문가로 활발히 출연하고 있다.

⑭2008년 SBS ‘찐빵소녀’

SBS 고발프로그램 <긴급출동SOS24>는 2008년 9월 ‘찐빵 파는 소녀’라는 제목으로 휴게소 주인집 가족이 한 소녀에게 가해행위를 하고 앵벌이를 시켰다는 취지의 방송을 했다. 이 방송은 3회에 걸쳐 휴게소 주인가족이 정신질환이 의심되는 소녀를 데려다 상습적으로 폭행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보도피해자는 법정 구속돼 6개월 간 실형을 살다가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대법원은 SBS에게 3억 원의 손해배상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SBS제작진이 미리 사실과 결론을 끌어내고 줄거리를 구상한 다음 이에 맞춰 취재‧촬영‧편집‧제작한 악의적인 프로그램”이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제작진이 찐빵소녀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킨 과정에 강제성이 동원됐으며 치료 목적이 아닌 의도하는 진술을 얻어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시했다. 의도적 편집을 통한 사실왜곡도 지적됐다. 보도피해자는 2013년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거대 방송사가 한 가족을 순식간에 범죄자로 만들어 버렸고, 조작된 방송으로 인해 지금까지 가족‧지인들과 단절된 채 죄인으로 살고 있다”고 말했다.     
 

⑮2012년 조선일보 1면 성폭행범 사진 

2012년 9월 1일, 조선일보는 평범한 시민을 어린이 성폭행범 고아무개로 착각해 1면에 얼굴을 내보내는 최악의 오보를 냈다. 조선일보는 웃고 있는 20대 남성 사진을 성폭행범의 사진이라고 소개했으나 이 남성은 코미디언 지망생 전지현씨였다. 데스크가 범인의 사진을 빨리 확보하라며 압박한 결과 기자들이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착각하고 사진을 송고했다. 범죄자에 대한 신상털이식 보도와 자극일변도의 취재경쟁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참사다. 조선일보는 사과문을 내고 정권현 사회부장을 경질했다. 정권현 부장은 그러나 2013년 채동욱 혼외자식 보도를 지휘, 사내 1급 특종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신문사가 문을 닫아야할 만큼 큰 오보 사건은 이렇게 지나갔다.

⑯2004년 6월 23일 故김선일씨 “생존”  

2004년 6월 21일 이라크 무장단체가 김선일씨를 납치, 그의 생명을 담보로 이라크 파병군 철수를 요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언론이 피랍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23일 새벽 1시45분경 이슬람방송 ‘알자지라’를 통해 ‘김씨 사망’은 사실로 확인됐다. 하지만 23일자 일간신문은 김씨가 생존하고 있다거나 석방가능성에 무게를 실은 추측보도로 가득했다. 조선일보는 급히 배달판 1판을 전면 교체했지만, 한겨레‧경향신문 등은 관련기사를 교체하지 못했다. 해외취재인프라 부족과 외신받아쓰기 관행이 되풀이 된 결과였다. 남재일 경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언론은 적은 팩트로 많은 기사를 빨리 만들어내야 했다”며 당시 상황을 지적했다. 

⑰2014년 세월호 “단원고 학생‧교사 전원구조”

4월 16일 오전 11시경. 언론은 “경기 안산 단원고등학교 사고대책본부는 세월호에 타고 있던 2학년 학생과 교사 전원이 구조됐다고 오전 11시 5분 해경으로부터 통보받았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그러나 오후 2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탑승객 477명 중 368명을 구조했다고 밝혔다. 오후 3시, 중대본은 368명이 아닌, 180명을 구조했다고 정정했다. 보도를 믿고 있던 실종자가족들의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언론은 중대본을 비판하며 자신들의 ‘사실확인’ 책임을 비껴갔다. 오후 4시, 탑승인원 476명, 생존자 174명으로 잠정 집계됐다. 속보경쟁이 빚은 ‘오보참사’였다.

오보는 이어졌다. 4월 17일 YTN은 “오늘 낮 12시 반쯤부터 공기주입이 시도되고 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날 오후 해양수산부는 산소 공급 장치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KBS는 4월 18일 오후 4시 30분경 자막을 통해 ‘구조당국 선내 엉켜있는 시신 다수확인’이란 속보를 내보냈다. 그러나 선내진입 성공 보도는 선내진입 실패로 정정 보도됐다. 국가재난주관방송마저 실종자 가족을 농락했다. 되돌릴 수 없는 오보참사는 결국 길환영 KBS사장의 사퇴로 이어졌다.

⑱1993년 망자를 살려낸 국민일보


국민일보는 1993년 3월19일자 기사에서 뇌종양수술을 받고 쾌유한 홍아무개씨 이야기를 다뤘다. “홍씨는 감마나이프 수술을 받았다. 수술 2개월째 홍씨 뇌종양은 지름이 1cm 정도로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고 종양의 감소가 꾸준히 확인됐다. 그는 몸무게가 7kg 정도 늘었을 뿐 모든 것이 정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홍씨는 보도 당시 이미 뇌종양으로 사망한 뒤였다. 홍씨 가족은 홍씨가 사망했는데 주위에서 자꾸 살아있느냐고 물어봐 피해가 크다며 언론중재위 조정신청을 냈다. 홍씨는 보도가 나가기 20여일 전 사망한 것으로 드러났고, 국민일보는 정정보도문을 냈다. 해당 기사를 쓴 기자는 “솔직히 시간에 쫓겨 확인을 하지 않고 썼다. 홍씨는 전부터 알고 있었고 가끔 병세 확인도 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확인하지 않고 쓰는 바람에 실수를 했다”고 밝혔다.


⑲2009년 중앙일보 ‘인간광우병’

중앙일보는 2009년 6월 15일 기사에서 “검찰이 확보한 소장과 재판기록 등에 따르면 고소인인 빈슨의 유가족과 피고소인 모두 인간광우병(vCJD)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며 당시 논란이 된 MBC <PD수첩> 광우병 편 보도내용이 오보라고 보도했다. 이에 서울고법은 중앙일보측에 4000만원 배상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빈슨 유가족의 소장에서 유족이 ‘빈슨이 흔히 광우병이라 불리는 인간광우병 의심 진단을 받고 퇴원 조치되었다’는 주장을 적시했다. 의료진 일부도 이런 사정을 알고 있었다며 중앙일보 보도는 거짓”이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해당 기자는 아무런 추가취재 없이 (검찰)제보를 듣자마자 매우 막연한 확인만 믿고 기사를 작성했다”고 밝혔다. 검찰발 기사의 최후였다. 중앙일보는 그해 7월 5일자 사진기사에서 기자를 동원해 일반인이 미국산 쇠고기를 먹는 것처럼 연출한 사실이 알려져 정정보도문을 내기도 했다.

⑳1981년 원효로 윤 노파 살인사건

1981년 7월22일 ‘원효로 윤보살’로 불리던 점술인 윤모씨(71세) 등 3명이 둔기로 난타당하고 목이 졸려 숨졌다. 살인사건 용의자로 조카며느리 고아무개씨가 붙잡혔다. 언론은 “물증이 나와도 범행을 시인하지 않고 있다. 둘도 없는 끈질긴 여자다”라는 표현을 쓰며 고 씨의 현장검증 사진을 모자이크도 없이 게재했다. 살인자에게 인권은 없다는 이유로 신상을 공개했다. 경찰은 “고씨가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고 발표했고, 언론은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씨는 재판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았고,  당시 고문에 의해 허위진술을 했다는 사실이 인정돼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에서도 승소했다. 언론은 경찰자료에 의존하며 또 다른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켰다. ‘무죄추정의 원칙’만 무시하지 않았으면 될 일이었다. 
 
[미디어오늘] 2015-5-10 (미디어오늘 = 평화뉴스 제휴)

저작권자 © 평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
지금 주목 받고 있어요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