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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삶이 도달한 마지막 삶
김동은 / 『만남, 죽음과의 만남』(정진홍 저 | 궁리 펴냄 | 2003)
2012년 10월 05일 (금) 14:06:29 평화뉴스 pnnews@pn.or.kr

어릴 적 어머니를 따라 서문시장에 가는 일은 기쁨과 두려움을 동시에 갖게 했다. 좋아하는  꿀떡을 얻어먹는 일은 기뻤지만 시장 맞은편 병원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병원 영안실이 무서웠다. 그 두려움은 외할아버지께서 그 병원에서 말기 암으로 투병하시다 돌아가시는 모습을 본 뒤 생겨났다. 그때 시작된 병원 근처를 지날 때 눈을 감는 습관은 그 이후에도 꽤 오래갔다. 이것이 나의 첫 번째 ‘죽음과의 만남’이었지만 나에게 죽음에 대해 설명을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두 번째 죽음을 만난 곳은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어느 날 의과대학 해부학 실습실이었다. 포르말린 소독약 냄새가 가득한 해부 실습실의 차가운 해부용 테이블 위에는 의대생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기증한 분들의 주검이 있었다. 두려움 같은 건 느낄 겨를이 없었다. 해부한 시신의 구석구석을 관찰하며, 외우고 또 외워야 했다. 유급하지 않기 위해서... 의사가 되기 위해서...
 
그러나 해부학 실습을 마치고 가진 ‘시신 기증인 합동 추모식’ 장에서는 잊고 있었던 죽음을 떠올리게 되었다. 우리가 해부했던 차돌같이 굳어있던 주검은 단란했던 한 가족의 아버지였고, 갑자기 세상을 떠나 부모님의 가슴에 묻힌 씩씩한 한 가정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유족들과의 만남에서 나는 아무 말도 건네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의과대학 6년 동안 죽음에 대해 배운 기억이 거의 없었다.

죽음에 대한 진정한 고민은 주치의를 맡은 환자가 죽어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시작되었다. 수술, 항암치료, 방사선 치료... 현대의학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살릴 수 없는 환자도 있었다. 이런 상황이 되면 환자가 가장 고통스럽지만 의사도 무력감을 처절하게 느낀다. 환자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말을 하는 건 의사로서 가장 큰 고통이다. 더 힘든 일은 임종을 앞둔 환자를 매일 대해야 하는 일이다. 회진을 돌때 그 병실 앞에만 서면 왠지 발걸음이 무겁다. 손은 꼭 잡아드렸지만,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매우 형식적이었고 매일매일 거의 똑같았다. 차라리 호스피스 병동의 자원 봉사자들이 의사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생각을 더듬어 보니 의사가 되기 위한 수련기간 동안에도 임종을 앞둔 환자의 죽음에 대해 교육 받은 기억은 거의 없었다.

   
▲『만남, 죽음과의 만남』(정진홍 | 궁리 | 2003)
지난해 봄, 11개월간 투병하던 한 환자의 임종을 지켜보던 날, 슬프고도 답답한 마음에 시내 서점을 찾았다. ‘죽음’에 대한 책을 읽고 싶었다. 인문학 코너에는 죽음에 대한 책들만 따로 꼽혀있었다. 수 십 권의 책 중 내 눈에 들어 온 책이 바로 정진홍 교수님의 <만남, 죽음과의 만남>이다.

 ‘죽음’은 가장 확실한 헤어짐인데 ‘만남’이란 말 사이에 ‘죽음’이라는 말을 배치한 저자의 역설에 관심이 갔다. 솔직히 제목에 먼저 반했지만, 책을 읽으며 내용에 점점 빠져 들었다. 행간을 통해 읽히는 죽음에 대한 저자의 고민이 내 가슴속에 작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읽었던 죽음에 관한 글이나 책들은 하나같이 무겁고 어려웠다.

그러나 <만남, 죽음과의 만남>은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저자가 내 곁에서 소곤소곤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았다. 이처럼 무거운 주제인 죽음을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지만, 책을 덮을 때의 느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저자인 정진홍 교수는 많이 알려진 종교학자다. 그러나 책에서 말하는 죽음은 전혀 종교의 색깔을 나타내고 있지 않다. 신학을 공부한 종교학자면서도 자신의 종교를 뛰어 넘어 죽음 그 자체를 그리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이 더 많은 공감을 불러오는지도 모른다.

저자가 이 책에서 가장 먼저 던지는 메시지는 바로 ‘죽음 물음’이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 스스로 미리 물어보라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물음이 있어야 그 답이 있는 자리에서 삶에 대한 물음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라고 저자는 묻고 있지만, 그 물음 안에는 ‘삶이란 무엇일까?’란 또 하나의 물음이 숨어있다.

죽음은 삶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있는 삶의 현실입니다. 죽음은 ‘삶이 도달한 마지막 삶’입니다. 우리는 출생과 더불어 이미 죽음을 잉태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삶의 과정은 결국 죽음을 해산(解産)하기 위한 죽음 회임(懷妊)의 기간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21p)

사람들은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죽음과의 거리를 멀게만 느낀다. 장례식장에 조문을 갈 때 잠시 죽음을 생각하지만, 나오면서 기억에서 지워버린다. 이처럼 죽음에 대한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자신의 죽음이 닥쳐오면 어쩔 줄을 모른다. 그제서야 철학이나 종교를 찾는다. 그러나 철학이나 종교가 마련해 둔 죽음에 대한 ‘학습된 해답’은 결코 ‘살아있는 해답’일 수가 없다고 저자는 단언한다.

책 전체를 관통하며 저자가 지속적으로 권하는 것은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다. 죽음은 늘 여유를 갖고 찾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내 삶을 살 듯 그렇게 죽음을 살 것을 권한다. 각자 자신 죽음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대신 나의 죽음을 살아줄 수 없다. 이러한 나의 죽음에 대한 논의는 자연히 ‘내가 나의 죽음을 살기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대해 저자는 세 가지 ‘죽음 맞이의 윤리’를 제시한다. ‘지금 여기서 삶은 완결해야 하는 일’이 그 첫 번째이고, ‘실현되지 않은 꿈’에 너그러워야 하는 것이 두 번째 이다. 그러나 저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죽음 맞이의 윤리’는 바로 ‘죽음 사랑’이다.

사랑의 진술을 바탕으로 하여 죽음을 맞으면, 죽음은 그대로 삶의 완성입니다. 마침내 죽음은 삶이 짐작하지도 못한 위로이고 평화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면서 사랑 이전에는 꿈꾸지도 못한 위로와 평화를 경험하면서 살았습니다. 죽음이 그러할 것입니다. 죽음은 그래서 내 존재 양태가 바뀌는 통과 의례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존재의 출현을 긋는 희망과 꿈의 계기가 죽음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그러한 계기로 살았습니다. 사랑하면서 우리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죽음이 그러할 것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이 끝나고 새로움이 비롯하는 처음 순간일 것입니다. 내 죽음은 내 되 태어남의 계기일 것입니다. 사랑은 그러한 신비였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그렇게 사랑해야 합니다. 죽음을 내 품안에 품을 수 있어야하고, 내가 그 품 안에 안길 수 있어야 합니다. (p305)


추석 연휴 한 TV 방송의 장수 프로그램을 보니 여든을 넘긴 어르신이 ‘구구팔팔이삼사’라고 외친다. 아흔아홉(99)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틀(2)만 앓고 사흘(3)째 죽고(4) 싶다는 뜻이었다. 연세 많으신 어르신들의 한결같은 소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에도 병원 중환자실에는 온갖 의료기에 둘러싸인 채 고통 속에 죽어가는 환자들이 적지 않다. 사랑하는 가족들 곁이 아니라 낮선 병원에서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죽음을 맞고 있는 것이다. 이틀 앓고 삼 일째 죽는 것이 아니라, 인공호흡기의 도움으로 몇 개월을 그렇게 고통 속에 삶을 연장한다. 가족들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효도라고 생각하지만,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기계에 의존해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존엄성을 높이는 일인지 고민해 봐야한다.

이러한 연명 치료가 지속되는 데는 의사들의 책임도 물론 있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체질적으로 죽음을 싫어한다.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자신의 환자를 살려내려고 한다. 이것이 ‘히포크라테스 정신’의 실천이라고 생각한다. 더욱 첨단화된 현대 의학에 힘을 얻은 의사들은 이제 죽음까지 해부하고 죽음에 도전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살려내기 힘든 말기 환자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회복 불능 상태가 확실하다면 모든 방법을 동원해 끝가지 치료하는 것보다, 환자의 상태를 최선으로 유지하다가 자연스럽게 임종을 맞도록 하는 완화치료가 더 인간적인 치료가 아닐까? 완화치료가 힘을 얻기 위해서는 말기 환자의 죽음은 결코 의사의 실패가 아니라는 인식을 의사 스스로 가져야 한다. 아울러 서울 대형병원의 심장 수술 명의뿐만 아니라 환자의 죽음에 동행하는 시골의 요양병원 의사도 존경을 받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이처럼 의미 없는 연명 치료를 막기 위해서라도 많은 사람들이 죽음과 만나야 한다. 의사와 환자는 잘 죽는 죽음에 대해 터놓고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서도 불필요한 연명 치료를 거부하는 ‘사전의료 의향서 받기 운동’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어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죽음과 미리 만나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도 '죽음'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아주 어릴 때부터 생겨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따라서 선진국처럼 초중등 학생들에게도 죽음에 대해 가르쳐야 한다. 어릴 때 죽음을 제대로 배워야 생명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제대로 배운다면 자신이 얼마나 귀하게 태어난 생명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의과대학에서도 사람을 살리는 의학만 가르칠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해 체계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인간이 태어날 때도 의사의 도움이 필요 하지만, 생의 마지막 길목에 섰을 때도 환자들은 의사의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저자는 ‘죽음과의 만남’을 이렇게 마무리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긴 이야기, 그 죽음 물음의 끝말은 의외로 쉽고 단순 합니다. 삶을 초조해 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을 초조해 하지 않습니다. 삶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삶을 감사하는 사람은 죽음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죽음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p310)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삶 전체가 죽음에 대한 준비’라고 했다.
깊어가는 이 가을, ‘죽음과의 행복한 만남’을 가져 보는 건 어떨까?     

   




[책 속의 길] 82
김동은 / 의사. 계명대 동산의료원 이비인후과.
대구경북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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