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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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홍철 칼럼] 청소년들의 죽음 앞에서 ‘학생인권’을 생각한다


경쟁과 폭력에 희생되는 청소년들

청소년들의 자살이 잇따르고 있다. 얼마 전 “입시제도가 싫다”는 유서를 남기고 대구시 동구의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데 이어, 바로 며칠 뒤에는 오랫동안 학생들간 폭력에 시달려온 경산의 고등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경쟁’과 ‘폭력’이 지금의 학교를 지배하는 가장 큰 힘이라는 것이, 잇따른 두 청소년의 자살 사건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그런데 이런 소식은 하도 자주 들어 모두들 무감각해져 버린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제는 뉴스거리도 못 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우리집 애만 아니면 된다”는 지독한 이기주의 덕분에 이러한 죽음의 릴레이 앞에서도 모두들 쉬쉬하면서 넘어가고 있는 것뿐이라는 것을. “청소년 사망률 원인 1위가 자살”이고 “청소년 자살률이 가장 높은 사회”라고 하는 것은 이 사회가 이미 뿌리까지 완전히 망가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소위 전문가들과 관료들이 이 문제를 대하는 관점과 태도의 한심스러움에 대해서는 길게 말하고 싶지도 않다. 학교 창문이 다 열리지 않도록 고치고 CCTV를 교체하는 데 예산을 투자하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들하고 더 이상 무슨 진지한 이야기가 되겠나.

학교, 강제수용-노동 공간

이미 지금의 학교는 평화로운 ‘배움의 공간’의 의미를 완전히 잃어버린 곳이다. 국가와 사회, 기성세대가 일방적으로 만들어 놓은 경쟁 체제, 죽임의 문화, 폭력의 법칙만이 지배하는 ‘노예들의 공간’으로 전락해 버린 지 오래다. 지금의 학교와 교실을 ‘지켜야 한다’고 믿는 어른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지금의 학교야말로 제대로 된 배움과 교육이 불가능해져 버린 곳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어쩌면 교육 관료들과 교사, 학부모들도 이미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과 굳어버린 생각, 또는 허망한 욕심과 ‘본전 생각’ 따위 때문에 그런 ‘교육 불가능의 상황’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학생들은 경쟁과 죽임의 문화, 폭력의 법칙만이 지배하는, ‘학교’라는 이름의 강제수용소에서 ‘학습노동’을 끊임없이 강요당하는 ‘노예’에 불과하다. 그것은 ‘강제수용-노동’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감옥, 군대와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노예’들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지배권력에 저항해서 그것을 깨뜨리든가, 그러지 않으면 자신들의 분노와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자신들 내부의 약자를 골라 희생양으로 삼음으로써 비참한 생존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군대와 감옥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폭력을 생각해 보라. 그것은 그런 ‘강제수용-노동’ 공간이 존재하는 한 결코 없어질 수 없는 ‘노예들의 비루한(비겁한) 생존 방식’에 다름 아니다.

어떻게 이 비참한 상황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있을까? 가장 근본적인 ‘대책’은 지금까지 얼굴도, 목소리도 가지지 못한 ‘노예’들(청소년-학생들)에게 ‘시민권’을 주는 것이다. 폭력의 철저한 피해자이자 (노예로서 생존하기 위해 부득이) 상대적 약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던, 그래서 늘상 ‘폭력’에 엮임으로써만 살아왔던 청소년-학생들에게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계획하고 자신들의 공동체를 스스로 꾸려갈 수 있는 힘을 돌려주는 것만이 이 문제 해결의 해법이다.

'노예'가 아닌 '시민'으로

자신의 삶,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스스로 계획하고 꾸려갈 수 있는 진정한 힘을 가진 존재들은 결코 다른 사람, 자신보다 약한 존재들을 괴롭히거나 못살게 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힘은 평등과 서로간의 존중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결코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내부에서 일시적으로 힘의 불균형이 발생하고 불평등한 관계에서 ‘폭력’이 발생하더라도, 평등과 상호존중이 바탕이 된 권력이 철저하게 보장된다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스스로 그것을 민주적으로 해결하게 된다. 그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로서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감각해질 수가 없다.

따라서 집단따돌림과 학생간 폭력을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처방의 첫걸음은 바로 학생들이 민주주의와 인권의 ‘주체’로 설 수 있도록 온 사회가 지원하고 연대하는 것이다. 어른들의 시각과 힘으로써 학생들을 보호하고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경찰권력이 나서서 더 높은 수준의 강제력으로 감시하고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학생들에게 스스로를 돌보고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정치적 기회(시민권)를 주는 것만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학생인권조례’는 비록 만병통치약은 결코 아니지만, 그러한 민주주의와 인권, 상호존중의 힘을 학교 안에 싹 틔우기 위한 작은 씨앗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싹튼 민주주의의 나무는 점점 자라나 학교라는 강제수용소의 콘크리트 구조물을 평화적인 힘으로, 즉 비폭력적인 힘으로 무너뜨려 버릴 것이다. ‘민주주의가 꽃피는 학교’는 마치 ‘민주주의가 꽃피는 감옥’, ‘민주주의가 꽃피는 군대’처럼 형용모순이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이 말은 바꾸어 말하면, 참된 민주주의와 자치가 보장되는 학교라면, 우리가 생각하는 강제수용소로서의 학교는 더 이상 아니게 될 것이고,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삶-배움의 공동체가 될 것이라는 말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연대

이것은 학교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보아도 마찬가지다. 지금 우리 사회 내부의 정치적 경제적 불평등과 약자에 대한 차별, 타인의 고통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과 무감각, 서로에 대한 무형-유형의 폭력은 결국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제대로 된 ‘권력’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즉 어른들도 청소년-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경제성장(발전)’이라는 오직 한 가지 목적에 강제로 ‘동원’되고 있는 ‘노예’들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경제성장(발전)’이라는 굳어버린 생각(이데올로기)만이 지배하는 세상에는 민주주의도, 진정한 시민의 권력도 있을 수 없다. 오직 ‘입시’와 ‘성공’이라는 학교 안의 유일 지배 이데올로기와, ‘경제성장(발전)’과 ‘돈’이라는 사회 전체의 유일 지배 이데올로기는 본질적으로 완전히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 점에서 청소년-학생과 어른들은 모두 다 ‘구조적 폭력’의 희생자이자 서로간의 가해자일 뿐이다. 똑같이 ‘폭력’의 사슬에 묶여 있는 존재인 주제에, 어른이랍시고 청소년-학생들 앞에서 목에 힘을 잔뜩 주고, 처벌이니 감시니 보호니 관리니 하고 떠드는 것은 참으로 딱하고 위선적인 꼬락서니 아닌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학생간 폭력의 가해자들을 처벌하는 것만이, 그리고 통제와 감시를 강화하는 것만이 능사라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현실성이 없는 해법이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강화된 폭력에 노출된 ‘노예’들은 내부의 약자에 대한 공격(폭력)을 더욱 교묘하고 잔인하게 이어가게 될 것이다.

가장 현실적인 해법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청소년-학생들을 민주주의와 인권, 평등과 상호존중, 우정과 너그러움의 주체로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함께 연대하는 것이다.






[변홍철 칼럼 20]
변홍철 / <하이하버연구소> 소장,  전 《녹색평론》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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