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은 교장의 '비판적 학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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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 / 『왜 학교는 불행한가』(전성은 씀. 메디치미디어 펴냄. 2011.5)


노무현 정부 시절, 대통령 직속기관인 교육혁신위원장을 역임한 전성은 전 거창고 교장이 《왜 학교는 불행한가》라는 책을 냈다. 41년간 교사와 교장의 경험이 묻어난 훈훈한 회고담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의 책은 교육사회학의 ‘갈등이론’에 지적(知的) 뿌리를 두고 있다. 딱딱한 이론을 담담하게 풀어놓으려 문장을 갈고 다듬은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다. 글을 쓸 때 감정을 억누르려 어금니를 꽉 깨물었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자신이 얼마나 아이들을 사랑하는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연륜으로, 머리로, 사랑으로, 상식으로 길러냈던 제자들과 그들의 미래에 대해 고백하지 않는다. 대신 ‘학교는 필요와 목적, 운영에 있어 그 출발부터 철저하게 통치 집단에 의한, 통치 집단을 위한, 통치 집단의 기관이었을 뿐 아이들을 위한 기관이 아니었다’고 썼다. 평생을 학교와 살아온 그의 체험적 학교론은, 학교를 부정하는 쪽에 가까웠다. 심지어 ‘학교교육은 국가가 기획하고 집행하여 생겨난 산물’, ‘국가주의 도덕이 히틀러유겐트와 가미가제 특공대를 낳았다’고 썼다.
 
 
 
20세기 이후 세계의 모든 국가가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나 아직도 학교교육정책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통제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형식과 수준에 따라 통제의 정도와 방법이 다를 뿐이다.(p63)

인류 역사 속에서 제일 무서운 교육이 학교에서의 도덕교육, 정신교육, 그리고 가치관교육이었던 이유는 학교교육이 바로 통치 계급의 독점물이었기 때문이다.(p90)

학교교육은 아이들의 다양한 재능, 소질, 관심에 따른 다양한 교육을 해야 한다. 국가는 그렇게 해야할 책무가 있다. 그것이 국가의 도리다. 그러자고 국가가 있는 것이다.(p141)


숫자로 표시된 수능점수와 같은 것으로 아이들을 선발하지 말고 재능, 소질, 관심을 위주로 선발해 학생이 가진 능력을 최대화시켜주어야 한다. 그리고 중간에 언제든지 진로를 바꿀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p143)

전성은 선생은, 학교가 지배집단에 유리한 기존질서를 유지하는데 기여하며,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유지․심화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 교육과 사회개혁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라는 점을 드러내려 한다.

선생의 학교관은 ‘경제적 재생산론’(학교는 자본주의의 불평등한 사회적 생산관계를 매개하고 재생산하여 정당화하는 역할을 담당한다.)과 ‘문화적 재생산론’(학교교육은 지배계급이 선호하는 문화영역을 통해 계급적 불평등을 유지하고 심화시키는 재생산적 기구다.)을 아우르는 듯 보이지만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다. 글쓴이의 절제가 행간에서 느껴진다. 그러면서 새로운 학교를 꿈꾼다.

이제 ‘짐이 곧 국가다’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국가의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시대의 막이 오르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새 시대에 걸맞은 연출을 하자. 아이들 재능과 소질과 관심을 무시하고 학교 공부를 한날한시에 평가하여 등급을 매기고, 그 등급에 의해 계층과 계급을 결정하는 것이 정의라고 우기는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언제까지 허용할 것인가.(p72)

국가가 만들어준 교과서로, 국가가 만들어준 교육과정으로, 국가가 만들어 놓은 평가(입학시험) 방식으로, 국가가 강제하는 교육 활동을 통해서는 우리가 추구하는 교육을 할 수 없었다.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자. 자유로운 교육이 가능한 학교를 만들어보자. 학교 인가를 반납하자. 교과서와 교육과정도 우리가 만들자. 교육활동도 우리가 기획하자.(p208)


갈등이론에 바탕을 둔 그의 학교관은, ‘학교는 산업사회의 기술인력 배출 산업사회의 핵심장치’라는 기능이론과 대척점에 서 있다. 교육을 통한 지위 및 소득의 상승, 교육을 통한 계층상승의 가능, 교육의 기회확대는 사회평등에 기여한다는 관점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다만, 전성은 선생이 바라보는 학교관은, 학생들을 수동적인 존재로 보는 듯하다. 학생들은 그저 통치 권력의 뜻대로 좌지우지 되는 존재인지, 묻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미국의 교육사회학자인 애플(Michael Apple)과 지루(Hernry Giroux)는 “학습자는 교육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일상적인 삶의 경험 속에서 스스로 체득한 세계관을 통해 지배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극복할 수 있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바라봤다.

애플과 지루의 주장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중 한 사람인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와 다르다. 그람시는 “사람들은 자기가 속한 사회정치 세계의 이데올로기 구조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된다”며 인간을 수동적인 존재로 보았다.

애플과 지루는 그람시의 주장을 거부하며 “피지배집단의 사람들은 사회구조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의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지루는 ‘비판적 인간’이란 개념을 교육학에 도입했는데, 비판적 인간이란 ‘정의와 해방을 추구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을 뜻한다. 세상을 비판적이고 반성적인 시각으로 읽어내는 눈, 나아가 세상을 실제로 변화시키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비판적 인간이다.

등수를 매겨 줄을 세우고, 지력만 앞세운 학교교육을 받았지만 학생들은, 시키는 대로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불합리한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분노할 수 있는 존재가 학생들이다. 군사정부 시절, 국민윤리 교육을 철저히 받은 ‘7080 학번’ 젊은이들이 민주화 시대를 앞당겼지 않는가. 그러고 보니, 전성은 선생은 학교 현실에 대한 학생들의 각성을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불필요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학생 대신 교사들의 깨어있음을 당부한다.

교사도 감정을 가진 인간이다. 소위 ‘학업이 우수하고 품행이 방정한’ 학생을 좋아하고 반대로 말썽을 자주 부리는 학생을 싫어하게 되어 있다. 피눈물 나는 노력을 통해 그런 감정의 폭을 넓혀야 한다. 어떤 이유에서도 학생들을 차별하면 안된다.(p197)

어떤 과목을 가르치든 아이들이 반역사적인 삶을 살도록 영향을 끼치는 교사가 되어서는 안된다. 검은 것을 희다 하고 흰 것을 검다고 하는 교사가 되어서는 안된다.(p197)


선생은 국가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국가 주도로 이뤄지는 ‘인재양성교육’에는 반대한다. 학교나 국가는 본질적으로 ‘학생이라는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기관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입장에서 학생을 위한 학교교육을 실현하기 위해 다양한 학교와 학제, 교육과정이 생겨야 한다고 믿고 있다.

선생이 41년간 몸담은 거창고(같은 재단인 샛별초등, 샛별중학교를 포함해)에서 이뤄낸 교육적 가치를 유감스럽게도 필자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왜 학교는 불행한가》라는 책을 통해 그 당당함과 열정을 짐작케 만든다.
 
 
 





[책 속의 길] 20
김태완 /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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