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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인티파다와 팔레스타인의 비극(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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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서남아시아 전쟁과 팔레스타인 난민의 역사 ⑧
- 성상희(변호사. 생명평화아시아)

 

들어가는 글 

1987년 12월에 시작된 제1차 인티파다는 팔레스타인들의 6년간의 생존과 독립을 위한 투쟁이었으며 세계에 팔레스타인 문제를 상기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 결과 오슬로 협정이 체결되었다. 2000년 10월부터 시작된 2차 인티파다는 여러 면에서 이와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1987년의 경우는 이스라엘의 점령지 외부, 즉 요르단, 레바논, 튀니지 등 인접 아랍국가에 근거지를 두고 전개되어 온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이 점령지 내부에서도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었으며, 이 운동이 대중운동의 형태를 띠고 전개되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의의가 있다. 이스라엘 정부의 행정 조치에 대한 불복종, 이스라엘 상품 불매운동, 세금납부 거부, 파업, 상가 철시 등 그야말로 가능한 모든 대중적 방법이 동원되었다.

반면 인티파다 2000은 팔레스타인의 항의시위에 이스라엘군이 바로 발포를 하여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상호간에 비대칭적인 격렬한 무력 투쟁을 중심으로 사태가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비대칭적 무력 사이의 싸움이라는 것은 정규군 체제를 완벽하게 갖춘 이스라엘과 시민들의 저항과 하마스, 이슬람지하등 저항세력 그룹에 속한 비정규군 세력으로 이루어진 팔레스타인의 충돌이라는 것을 뜻한다. 이때의 팔레스타인이라는 용어는 원래의 뜻하는 바, 즉 팔레스타인 영토 혹은 팔레스타인 국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세워질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잠재적 국민인 팔레스타인인을 의미한다. 

   1차 인티파다는 이스라엘군의 폭력으로 큰 희생을 당하면서도 자연스럽게 형성된 지도부가 의식적으로 폭력을 자제하면서 무기를 들지 않는 시위를 위주로 항의행동이 전개되었고, 그래서 팔레스타인인의 비극적 현실이 전세계 시민들에게 생생하게 전달되고 이스라엘의 폭력적 점령 정치가 폭로되었다. 그리하여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가 이스라엘의 반발을 누르면서 오슬로 협정이라는 임시 평화체제 구축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반면 2차 인티파다는 시위대에 대한 살상이라는 이스라엘의 선제공격에 의해 촉발되었지만, 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하마스, 이슬람지하드 등의 급진세력에 의한, 특히 자살폭탄테러 등 민간인들에 대한 무장 공격이 중심을 이루면서 국제사회의 지지를 많이 잃게 되고, 결과적으로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투쟁의지와 자신감을 떨어뜨리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2차 인티파다의 배경과 원인 그리고 폭발  

 인티파다 2000은 무엇보다도 오슬로 협상 이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성립된 상황에서 그간의 평화협상에서 협상의 의지없이 강압으로 나오는 이스라엘에 완전히 끌려갔고, 그것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팔레스타인 민중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오슬로 선언 이전에는 서안지구에서 예루살렘이나 이스라엘 영토로 들어가 직업활동을 하고 귀가하는 것이 대체로 자유로웠다. 그러나 오슬로 협정 이후 팔레스타인 과도자치 정부의 고급관료 등 일부 특혜받은 집단 외에는 까다롭고 자의적인 검문 일상화되어 이동의 자유가 현저히 제한되었다. 

    지글거리는 분노에 기름을 부어 얹은 것은 사브라- 샤틸라 대학살의 배후조정자 격인 아리엘 샤론의 동예루살렘 하람알샤리프에 있는 이슬람의 성지 알아크사 사원 방문이었다. 하람알샤리프는 유대인들에게는 성스러운 산(Temple Mount)라 불려지고 있었다. 2000년 9월 28일, 이스라엘 리쿠드당 당수로서 선거운동을 하고 있던 샤론이 무장 경찰 수백 명을 대동하고 알아크사 사원을 방문해 동예루살렘의 이스라엘 주권을 주장했다. “성전산은 우리의 것이고, 앞으로도 우리 것”이라는 선언이었다. 팔레스타인 비극의 본격적 시작이 된 1948년 유엔총회 팔레스타인 분할결의에서 예루살렘은 어느 일방에 귀속되지 않고 국제적으로 관리되는 도시라는 위상을 가졌다. 그런데 이스라엘 고급 정치인들은 대부분 예루살렘이 한치의 양보도 할 수 없는 이스라엘의 완전한 주권이 미치는 배타적 영토라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이러한 입장이 유엔헌장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법을 완전히 무시하고 국제평화를 위협하는 폭력적 사고임을 모두가 알고 있다. 그래서 세계각국은 주이스라엘 대사관을 예루살렘이 아니라 원래의 수도 텔아비브에 두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보안 요원들이 우파 야당 지도자 아리엘 샤론을 예루살렘 구시가지에 있는 알아크사 모스크 경내로 호송하고 있다.(2000.9.28) / 사진 출처. 게티 이미지
이스라엘 보안 요원들이 우파 야당 지도자 아리엘 샤론을 예루살렘 구시가지에 있는 알아크사 모스크 경내로 호송하고 있다.(2000.9.28) / 사진 출처. 게티 이미지

   다음 날 금요 집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항의시위를 하였다. 이들은 통곡의 벽을 향해 투석했고, 이스라엘은 비무장 민간인들을 향하여 발포를 하였다. 이스라엘군의 무차별적 사격으로 팔레스타인인 4명이 죽고 20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처음 닷새 동안 적어도 47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사살되고 1,885명이 부상을 입었다. 2차 인티파다는 1차 봉기에 비하여 팔레스타인 측에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계속되었고, 이스라엘은 치안을 통제하기마저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하마스나 이슬람지하드 등 무장투쟁 노선을 버리지 않은 급진 단체들은 성전을 촉구하고 나섰으며,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의장이자 팔레스타인 과도자치정부의 수반인 아라파트의 지도력은 큰 손상을 입었다.

   그동안 이스라엘 정치, 종교 지도자가 알아크사 사원을 방문하는 것은 금기시되어왔다. 이곳은 이스라엘이 지배, 관리하고 있는 영역이지만 팔레스타인 무슬림의 소유임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였다. 인티파다가 발발하기 직전은 이 사원에 대한 주권문제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평화협상의 최대 쟁점으로 부각된 상황이었다. 샤론은 일부러 이런 시점을 골라 알아크사 사원과 황금돔 사원을 방문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방문은 이 이슬람 성지가 이스라엘의 소유임을 과시하려는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평가된다.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의 입장에서 샤론의 행동은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과 같은 도발 행위였다. 

사태의 전개

샤론의 방문에 대해 팔레스타인인들은 항의 시위를 벌였고 이스라엘 군대가 즉각 투입되어 실탄사격을 하며 이를 진압했다. 이런 상황은 샤론의 알아크사 방문이 제2의 인티파다를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예상과 목적을 갖고 한 행위로 충분히 의심될 수 있다. 2차 인티파다는 인티파다 2000, 알아크사 인티파다 등으로 불린다. 2차 인티파다는 1987년부터 1993년 사이에 일어난 제1차 인티파다보다 훨씬 격렬했다. 팔레스타인인의 항의시위가 시작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이스라엘군의 발포로 시위대열에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이에 대하여 하마스, 이슬람지하드 같은 급진 무정정파가 총격으로 대항하였고, 나아가 이후 자살폭탄테러 공격으로 대응하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정치인이 출입하면 안되는 동예수살렘의 알아크사 이슬람 사원을 이스라엘 야당 지도자 아리엘 샤론이 방문하면서 촉발된 팔레스타인 유혈사태. 이스라엘군이 민간인들을 상대로 총격을 가하면서 팔레스타인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 사진 출처. KBS뉴스 '중동평화 아직 멀다'(2000.10.02) 방송 캡처
이스라엘 정치인이 출입하면 안되는 동예수살렘의 알아크사 이슬람 사원을 이스라엘 야당 지도자 아리엘 샤론이 방문하면서 촉발된 팔레스타인 유혈사태. 이스라엘군이 민간인들을 상대로 총격을 가하면서 팔레스타인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 사진 출처. KBS뉴스 '중동평화 아직 멀다'(2000.10.02) 방송 캡처

 10월 4일,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 바라크 이스라엘 총리,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등이 파리에서 협상을 시도했지만 합의안을 도출하는 데 실패했다. 다음 날에도 올브라이트와 아라파트는 이집트의 샤름 엘 셰이크에서 협상을 시도했으나 바라크 총리는 참석조차 거부했다.

  10월 7일에는 요르단강 서안 나블루스에서 팔레스타인인 수백 명이 유대인의 성지인 요셉무덤을 파괴했고, 레바논의 무장세력 히즈볼라가 순찰 중이던 이스라엘 군인 3명을 체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2일에는 길을 잃고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로 잘못 들어간 이스라엘 재향군인 2명이 예루살렘 북쪽의 라말라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그들이 이스라엘 비밀 수사대 일원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그들은 팔레스타인 주민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되었다. 이 장면이 이탈리아 텔레비전을 통해 전 세계에 방영되면서 이스라엘인들을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스라엘군은 헬리콥터와 미사일을 동원해 라말라와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청사에 보복공격을 가했다. 이는 1967년 6월전쟁 이후 요르단 강 서안지구에 가해진 이스라엘군의 최대 공격이었다. 이에 팔레스타인 당국은 그동안 구금되어 있었던 무장세력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 요원을 석방하였고, 이 조치는 사태를 급격히 악화시키는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주변 아랍국가들에서는 이스라엘과의 단교 및 성전을 촉구하는 시위가 대규모로 일어났다. 이스라엘에 대한 아랍인들의 악화된 감정은 대이스라엘 타협노선을 추구해온 아랍 지도자들로 하여금 운신의 폭을 좁게 만들었다. 이집트 10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국민민주당(National Democratic Party)이 무소속 후보들에 참패함으로써 무바라크 대통령은 정치적 심판을 받았다.  경제난과 함께 팔레스타인 사태에서 그가 취한 소극적 대응이 참패의 원인으로 평가되었다. 이스라엘과 국경을 접한 요르단과 시리아의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했다.

[기고]  성상희 / 변호사. 생명평화아시아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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