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첼위원회의 활동과 아리엘 샤론의 집권
2000년 10월 17일, 클린턴 대통령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이 폭력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로 국제진상조사위원회(미첼위원회)를 설립하는 데 동의했다고 발표함으로써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봉쇄 해제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클린턴의 대통령 임기가 끝나는 시점이었으므로 팔레스타인 사태에 적극적이지 못했다. 22일에는 인티파다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샤름 엘 셰이크에서 열린 아랍정상회담 역시 각국의 이익이 얽혀 아랍 민족주의의 대의를 살리지 못하고 팔레스타인 민중봉기에 따른 경제적 손실을 충당하기 위한 경제 지원책을 결정하는 데 그쳤다.
11월 2일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이 6주간 계속된 분쟁에 휴전을 선언하기 불과 몇 분 전에 예루살렘의 한 시장 근처에서 자동차 한 대가 폭발했다. 이스라엘 측의 평화협상 옹호자인 페레스 전 수상은 아라파트 수반을 설득해 휴전에 합의하도록 하고 그 대가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마을 외곽에 배치한 탱크를 철수하고 평화협상을 재개하기 위한 일정을 제시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간신히 합의된 휴전협상은 물거품이 돼버렸다.
2001년 1월 20일, 중동평화에 관한 협상이 최종 타결될 때까지 ‘마라톤협상’을 벌이자는 팔레스타인 측 제의를 이스라엘이 받아들임에 따라 양측 간의 협상(타바회담 The Taba Talks)이 21일 이집트 타바(Taba)에서 시작됐다. 양측은 클린턴이 제시한 평화협상 중재안을 토대로 동예루살렘의 주권과 팔레스타인 난민 귀환권 문제 등을 집중협의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협상은 ‘상당한 진전을 보았고 거의 합의점에 이른’ 분위기였지만 27일 이스라엘 측에 의해 갑자기 중단되었다. 다음 달 6일 아리엘 샤론이 이스라엘 수상에 당선됨으로써 협상의 타결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2001년 2월 6일 샤론 당수가 수상에 당선된 이후 이스라엘 측은 미사일과 로켓, 헬기 등을 동원해 가자지구 민간인 지역을 공격하였다. 팔레스타인도 샤론의 당선과 동시에 인티파다의 강화를 선언하고 “유대인 정착촌을 생지옥으로 만들겠다.”라고 다짐하며 공격의 끈을 놓치 않았다. 미국 국무부는 성명을 통해 양측 간의 폭력 사태가 고조되어 “공격과 보복이 계속되는 통제 불능의 악순환을 낳고 있다”라고 비난했다.
샤론의 집권 후 평화협상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첫째는 이스라엘 정부가 이제까지 팔레스타인과 벌여온 모든 평화협상은 효력이 없음을 선언한 것이고, 둘째는 리쿠드당과 노동당이 연정협상을 통해 영구 평화협정 대신 잠정 평화협정을 추진키로 의견을 모은 것이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이 줄기차게 거부해온 잠정 평화협정안을 놓고 협상안을 제시하는 것은 팔레스타인 측에서 보면 협상을 하지 않겠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뿐이었다. 나아가 샤론 당선자는 폭력 사태가 끝나지 않는 한 협상에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험난한 평화협상의 과정
2001년 3월 6일 수상으로 취임한 아리엘 샤론의 예루살렘 정책은 강경했다. 팔레스타인의 주권을 인정할 수 없음은 물론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전체 예루살렘은 통일된 상태로 이스라엘의 주권하에 있어야 하며, 이를 분리하거나 팔레스타인 측에 양도하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샤론 총리의 입장은 동예루살렘은 1967년 이스라엘이 점령한 지역이며 따라서 이스라엘군이 철수해야 한다는 유엔결의 242호를 위배하고, 이곳을 수도로 하여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창설하겠다는 팔레스타인 측의 입장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샤론 총리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공격의 수위를 높임으로써, 폭력 행위를 중단하지 않을 경우 평화회담을 재개할 수 없음은 물론 팔레스타인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을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이스라엘이 영구평화협상에 성실히 응할 수 없었던 이유의 중요한 것 하나는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의 이스라엘인 정착촌이었다. 흔히 부르는 유대인 정착촌이 아니라 이스라엘인 정착촌이라 하는 것은 정착촌이 종교적으로 느슨한 결합을 하고 있는 전셰계 유대인의 정착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시민이 팔레스타인 땅을 점령한 국가권력의 힘을 빌어 점령지 내에 이주 식민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온주의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정착촌민들은 그들이 현재 살고 있는 땅에서 한치도 물러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평화체제가 성립되어 점령을 종식하면 정착촌은 철수해야 한다. 정착촌은 가자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 등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에 섬처럼 존재하며 현재 그 수가 145개에 이른다. 2000년 9월 유혈 사태가 재발한 이후 이들 정착촌을 중심으로 양측 주민 간에는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오슬로 평화협정을 전후해 정착촌이 크게 줄었으나 이후 다시 이스라엘이 확장정책을 펴면서 정착촌이 늘어났다.
정착촌의 거주민은 1993년에는 12만 5,000여 명이었으나 2001년에는 20만 명에 이르렀다. 피점령자의 일상을 지배하는 거대한 감옥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의 운명을 틀어쥐고 통제하는 식민국가 이스라엘이 그들의 주민을 식민지 지역에 이주시켜 식민지 민중의 터전을 야금야금 빼앗아 가는 상황인 것이다. 정착촌을 확장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정부는 지금까지 주택의 무상 제공 등 삶의 편의를 위한 큰 혜택을 정착민들에게 주면서 정착 희망자를 꾸준히 모집하고 있다.
2000년 10월 미국의 주도로 구성된 국제진상조사위원회는 2001년 5월 21일 최종 보고서를 통해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중단하라고 이스라엘에 촉구했다. 이는 책임의 일단이 정착촌 건설을 강행한 이스라엘에 있다고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었다. 위원회는 또한 유혈 사태를 끝내고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양측에 냉각기를 가질 것도 제안했다. 샤론 이스라엘 수상과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은 23일 양측 간의 유혈분쟁 해결을 중재하기 위해 마련된 미첼보고서를 수용키로 약속했다. 이에 따라 2000년 9월에 일어나 수많은 사상자를 낸 양측 간의 유혈폭력 사태가 종식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윌리엄 번스(William Burns) 미국 중동특사, 러시아의 중동문제 전문가인 예브게니 M. 프리마코프(Evgeni M. Primakov) 전 수상이 서남아시아 각국을 순방하며 서남아 평화 문제를 논의했다. 중동문제의 중재자인 미국은 신정부 출범으로, 어쩌면 신정부의 무능력함으로 인티파다 2000을 철저히 방관했다. 샤론은 폭력 행위가 종식되기 이전에는 어떠한 협상도 없다며 못 박았고, 아라파트는 비개입 작전과 지켜보기로 일관하면서 협상의 적기만을 기다렸다.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 독립 선포일을 1999년 5월에서 2000년 9월 13일로, 다시 2000년 11월 15일로 계속 미루었다. 팔레스타인의 독립 선포는 다시 2000년 12월 31일로 연기되었으나 결국 실행되지 못했다.
폭력 사태는 끊이지 않았다. 2001년 5월 28일에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팔레스타인인 4명이 부상한 데 이어 29일에는 서안에서 이스라엘인 2명, 팔레스타인인 1명이 총에 맞아 숨졌다. 6월 1일에는 텔아비브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자살 폭탄테러가 발생해 이스라엘인 19명이 숨지고 100여 명이 다쳤다. 이로써 미첼보고서가 발표된 이후 해결의 기미를 보이던 팔레스타인 유혈충돌 사태는 다시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스라엘은 3일, 그 전 달의 휴전 발표를 철회했으며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를 공격하라고 군에 명령했다. 아라파트 수반은 민간인에 대한 테러 행위를 비난하면서 팔레스타인 보안군에 즉각적인 휴전을 촉구했지만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 등 13개 팔레스타인 단체는 인티파다를 계속할 것을 다짐했다.
2차 인티파다의 결과와 영향
1차 인티파다가 광범한 민중이 시위, 불매운동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저항하는 큰 대열을 형성하였던 반면 2차 인티파다는 시위대에 대한 무차별적 발포로 촉발된 끔찍한 폭력사태가 주류를 이루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은 대중들과 괴리되어 가는 자살폭탄 공격 등 무력투쟁에 갇히게 되어 점차 대중의 참여가 어려워졌다. 2차 인티파다는 팔레스타인 민족해방운동에 큰 좌절을 안겨 주었다. 2002년 이스라엘군은 중화기를 앞세워 광범한 지역을 파괴하면서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라는 제한된 지역에 군대를 파견하여 다시 점령하였다. 그해에 이스라엘군은 라말라에 있는 아라파트의 집무실을 포위하였고, 아라파트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 파리의 군사병원으로 옮겨질 때까지 그곳에서 감금생활을 해야 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오슬로 협정의 화해 분위기에 도취되어 지도부 전체를 점령지로 옮긴 것은 해방기구의 지도력을 보존하지 못하고 이스라엘의 폭력에 적나라하게 노출되게 만든 실수였다고 평가된다. 자살폭탄공격은 이스라엘의 희생자 이미지를 강화하고 이스라엘인들을 단합시키고 강화하는는데 도움이 된 반면, 팔레스타인인들을 분열시키고 약화시켰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2차 인티파다가 끝날 무렵 대다수 팔레스타인인들은 이 전술을 반대하였다.
재점령과 큰 희생에도 불구하고 민족해방운동에서 얻은 것이 별로 없는 2차 인티파다 이후 팔레스타인인들의 좌절은 더욱 깊어졌다. 2차 인티파다의 쌍방에게 책임이 있는 끔찍한 폭력은 팔레스타인인들이 1차 인티파다와 이후의 평화교섭으로 쌓아 온 긍정적 이미지에 손상을 입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의 국제적 지위를 약화시켰다.
2차 인티파다는 민중의 지지를 잃고 그 동력을 상실하면서 소멸해 갔다. 2008년, 2012년, 2014년 이스라엘이 대규모 지상군을 투입하여 가지를 침공한 전쟁은 팔레스타인 민중, 특히 가자지구 주민들의 삶을 밑바닥까지 위협하였다. 이 전쟁의 비극 속에 요르단강 서안에서 벌어지는 항의시위를 자치당국이 진압하는데 이스라엘과 공모한 흐름도 보인다.
2005년 대통령 선거를 보이콧한 하마스 등은 2006년 1월 의회선거에서 예상을 뒤엎고 참가를 결정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평화를 염원하는 세계시민들의 의사에 정면으로 배치되게 하마스의 선거승리와 집권을 수용하지 않았다. 단지 그들이 테러리스트라 부르는 하마스가 승리하였다는 이유로 그들과 합의를 통하여 탄생한 팔레스타인 자치의 결과물을 인정하지 않고 여전히 절멸의 대상으로 본 것이다.
[기고] 성상희 / 변호사. 생명평화아시아 이사
저작권자 © 평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