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권력에 의한 희생, 당연히 국가가 배상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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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10월 사건' 소송...구인호 변호사 "국민의 기본권 침해, 좌.우 따질 문제가 아니다"


해방 이듬 해 발생한 '대구 10월 사건' 희생자 유족에게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는 첫 판결이 나오면서, 이 사건이 시작된 대구에서 진행중인 유족들의 유사 소송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부산지방법원 민사8부(재판장 심형섭)는 '대구 10월 사건'으로 희생된 정모씨와 이모씨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국가는 정씨와 이씨 유족에게 각각 5억9천만원과 3억9천만원을 지급하라"고 지난 16일 판결했다. 재판부는 "경찰이 정당한 이유와 적법한 절차 없이 국민을 살해한 것은 국민의 기본권인 신체의 자유와 생명권, 적법 절차에 따라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했고, 공무원들의 위법한 직무집행으로 희생자들과 유족들이 입은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판결 이유를 밝혔다.

'대구 10월 사건'은 광복 이듬 해 1946년, 미군정의 식량공출과 친일관리 고용, 토지개혁 지연 등에 항의하며 10월 1일 대구 도심에서 시작된 대규모 민중항쟁으로, 경찰은 당시 대구역 앞에 모인 수 천여명의 시민을 향해 총을 쐈고, 미군정은 10월 2일 계엄령을 선포하며 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시위는 경북 전역과 경남, 전남을 비롯해 12월까지 전국적으로 이어졌다. 당시 전국에서 230여만명이 시위에 참가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대구 10월 항쟁 64주년 희생자 추모제>(2010.10.1 대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 사진. 평화뉴스
<대구 10월 항쟁 64주년 희생자 추모제>(2010.10.1 대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 사진. 평화뉴스

과거 권위주의 정권은 이 사건을 '대구 폭동'으로 매도했으나 학계와 재야에서는 '대구 10월 항쟁'으로 불렀다. 또, 대통령 직속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10년 '대구 10월 사건'이란 중립적인 명칭을 쓰면서 법조계를 비롯해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다. 당시 위원회는 이 사건으로 "민간인 60명이 적법한 절차 없이 희생됐다"고 발표하고, 국가가 그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사과하고 위령사업을 지원하도록 권고했다.

때문에, '대구 10월 사건'에 대한 부산지법의 이번 판결은 국가권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사법부가 처음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특히, 대구에서 진행중인 유사 소송에 미칠 영향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대구에서는 10월 사건 희생자의 장남 김모(87)씨를 비롯한 5명의 유족의 소송이 진행되고 있다.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으로, 구인호(48) 변호사가 소송을 맡고 있다.

구인호 변호사
구인호 변호사
구 변호사는 부산지법 판결과 관련해 "국가권력에 의해 국민이 희생된 사건이기 때문에 국가의 손해배상은 당연한 결과"라며 환영했다. 그러나, 검찰이 항소할 가능성이 높은데다, 전국 지방법원의 판결이 다를 수 있는 점 등으로 미뤄 "대법원까지 가야 결론이 날 것"으로 예상했다.

구 변호사는 10월 사건과 관련해 "당시 경찰과 군인들은 정당한 이유나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국민의 생명을 희생시켰다"며 "국가권력이 국민의 생명을 비롯한 기본권을 침해한 사건으로, 국가는 소멸시효를 따질 게 아니라 희생자 유족들에게 당연히 배상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국민의 기본권 침해는 좌.우를 따질 문제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설사 좌익이라 하더라도 영장 없이 붙잡아 적법한 절차 없이 희생시킬 수는 없다"며 "유족들이 '빨갱이' 누명으로 받은 고통은 돈으로 환산할 수도 없을정도"라고 말했다. 구 변호사는 현재 진행 중인 대구지역 소송이 올 6월을 전후해 판결날 것으로 내다봤다.

한편, '대구 10월 사건'은 6.25전쟁 이후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이어지며 수 많은 희생을 낳았다. 전국 100여개 유족회로 구성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전국유족회'는 '10월 사건'이 시작된 1946년 10월부터 1953년 11월까지 전국에서 114만여명의 민간인이 학살됐으며, 대구에서 3만5천여명, 경북에서 10만여명이 공권력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전국유족회' 결의대회(2011.4.21 대구백화점 앞). 참가자들이 '민간인 피학살자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행진하고 있다. / 사진. 평화뉴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전국유족회' 결의대회(2011.4.21 대구백화점 앞). 참가자들이 '민간인 피학살자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행진하고 있다. / 사진. 평화뉴스


참고자료 / '대구 10월 사건' 당시 상황에 대한 함종호 4.9인혁재단 상임이사의 글

「10월 민중항쟁은 복권되어야 한다」
 출처. <대구작가> 12호(2010. 5)

미군정의 일방주의와 식량정책의 대 실패는 이남 지역 주민들의 분노를 자아내게 했고, 이 분노의 숲에 불을 던진 역할을 하게 되는 대구항쟁이 1946년 10월에 발생한다. 그 시작은 10월 1일 노동자파업에 대한 경찰발포로 2명의 노동자가 사망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대구시민들은 분노한다. 다음날 시청 앞에는 기아데모(굶주린 부녀자들이 쌀을 달라고 하는 시위)가 열리고 대구역 앞에는 어제의 노동자들이 재집결하여 경찰과 대치하다가 십수 명이 사살 당한다.

마침내 삼덕동을 중심으로 학원가에서 분노가 폭발한다. 대구의전(현 경대의대)학생들을 선두로 삼덕동에 밀집된 남녀중고등학생이 총궐기하여 시민들과 함께 대구경찰서(현 중부경찰서)를 포위하고 경찰들을 무장해제 시킨다. 이제 대구는 권력이 시민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성난 시민들은 친일경찰과 친일지주 및 고리채부자들의 집을 습격한다. 달성공원에서는 빼앗은 물건을 모아놓고,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야말로 해방구가 연출된 것이다. 대구의 해방구는 다음날 미전술군이 대구경찰서를 접수하면서 종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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