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독재정권 때 민주주의를 외치다 사형당한 영남대 출신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조작사건' 영남대 출신 희생자 도예종, 서도원, 송상진 열사.
지난 1995년 영남대 후배들이 독재에 맞선 선배들을 기억하고, 민주주의·평화통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세웠던 추모비는 경찰의 군홧발에 밟히고 장비까지 동원되며 강제 철거됐다.
영남대는 이들을 '사법살인'으로 몰아넣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동상을 교정에 세우며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의 사법살인 희생자인 인혁당 피해자들에 대한 추모비는 반대하고 있다. 앞서 30년 전에도 추모비가 철거되더니, 올해 50주기를 맞아 동문들이 세우려는 것마저 막아섰다.
영남대학교 민주동문회, 영남대민주단체협의회 등이 속한 '4.9통일열사 50주기 영남대 행사위원회'는 29일 오후 영남대 캠퍼스 내 시계탑 앞에서 '4.9통일열사 50주기 영남대 추모문화제'를 열었다.
서도원 열사의 아들인 서동훈(65)씨를 포함해 김찬수 '4.9통일열사 50주기 행사위원회' 상임공동대표, 안홍태 '4.9통일열사 50주기 영남대 행사위원회' 위원장, 안영민 '4.9통일열사 50주기 경북대 행사위원회' 위원장, 이형근 영남대 민주동문회장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행사장 주위에는 "잊지 않겠습니다. 75년 4월 9일, 4.9통일열사여 영면하소서", "4.9통일열사의 염원, 자주민주통일 세상을 열어나가겠습니다", "4.9통일열사 정신계승, 윤석열 내란세력을 몰아내겠습니다"라고 적힌 현수막이 붙었다.
이날 추모제에서 공개된 추모비는 길이 69cm, 높이 45cm의 작은 크기였다. 앞면에 도예종, 서도원, 송상진 세 희생자의 이름과 함께 '4.9통일열사 추모비'라고 적혔다.
뒷면에는 "어둠의 세월, 조국의 자주통일과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다 형장의 이슬로 산화하신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선생을 비롯한 민주통일열사들의 숭고한 정신을 이곳 압량벌 검은 돌에 새겨 우리들 가슴에 기억하고자 한다"는 문구가 쓰였다.
추모비는 공개됐지만, 대학 본부 측은 "허가를 받지 않은 구조물"이라며 제지해 비석을 설치하지는 못했다.
행사 시작 전날부터 대학 본부는 종합강의동으로 가는 입구 도로에 바리케이드와 쇠사슬을 연결해 진입을 막았다. 입간판에는 주거침입과 퇴거불응, 특수주거침입죄 등을 내용으로 하는 형법 조항과 대법원 판결, 또 "점유자는 점유물이 침탈됐을 경우 가해자를 배치해 탈환할 수 있다"는 내용의 민법 제209조 내용을 담았다.
또 통일동산이라고 부르는 종합강의동 앞 로터리에는 "학교의 허가 없이 불법으로 학교 부지에 구조물 등을 세울 목적으로 학교에 들어오거나, 퇴거 요구를 받고도 응하지 않을 경우 처벌받을 수 있다"는 경고 현수막을 10여장이나 둘렀고, 포크레인도 한 대를 세워놨다.
영남대 홍보팀 관계자는 "애초에 (행사위에서) 협조 요청 자체가 없었다"면서 "대학 본부의 사전 허가 없이 하는 행사와 추모비 설치는 부적절하다"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행사위는 "사법 살인을 저지른 독재자 박정희 동상은 세워도 되고, 30년 전 경찰이 강탈한 인혁당 희생자들의 추모비를 세우는 것은 왜 안되냐"고 반발했다.
하지만 추모비 설치를 강행할 경우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건립을 유보했다. 향후 영남대 총장에게 면담을 요청하고, 면담에 불응할 경우 공문을 보내는 등 추모비 건립을 계속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안홍태 4.9통일열사 50주기 영남대 행사위원장은 "민족 영남대에는 박정희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고, 서슬퍼런 국가보안법 속에서도 지난 1995년 어렵게 세운 추모비를 강탈당했던 통일동산마저도 원천 봉쇄당했다"면서 "통일 열사 추모비를 다시 재건하겠다는 염원을 갖고 지내온 지 30년이 지났지만, 이 작은 비석이 뭐라고 영남대 본부는 동문들을 제지하냐"고 규탄했다.
영남대 총학생회와 민주동문회는 지난 1995년 4월 8일 인혁당 20주기를 맞아 영남대 종합강의동 앞에서 높이 2m 크기의 도예종·서도원·송상진 열사 추모비를 세웠다. 하지만 20일여 뒤인 5월 11일 새벽 3시경 경찰은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이라는 이유로 포크레인과 페퍼포그 등을 앞세워 추모비를 강제 철거했다.
이에 반발한 학생들은 경찰의 학내 진입을 학교가 묵인했다는 이유로 총장실을 점거하고, 경산 중방동 중앙파출소에 찾아가 화염병을 던져 파출소 일부를 불태웠다. 추모비가 뽑힌 자리에는 비석 하단부와 보도블록만 남았으나 대학 본부 측에서 이마저도 모두 철거해버려 흔적조차 없어지게 됐다.
행사위는 이날 추모제에 앞서 기자회견을 열고 "민주유공자법 제정"을 촉구했다.
'4.9통일열사 50주기 행사위원회'는 이날 추모제 전 추모주간 선포 기자회견을 열고 "인혁당 50주기 추모주간은 4.9인혁열사들에 대한 추모를 넘어 내란 세력을 청산하고 새로운 민주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의지를 선포하는 것"이라며 "열사들의 정신을 계승해 민주주의를 수호하자"고 결의했다.
행사위는 윤석열 정권이 자행한 탄압과 내란 시도가 박정희 유신 독재의 부활을 꿈꾼 것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며 "국회를 해산하고 야당을 탄압하며 영구 집권을 꾀했던 윤석열의 시도는 단순한 정치적 야욕이 아니라 유신 독재의 망령이 아직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밝혔다.
이어 "4.9인혁열사의 민족 자주와 민주주의 정신,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바라는 정신을 새로운 광장에서 이어나갈 것"이라며 "남아 있는 독재를 완전히 청산하고 새로운 민주주의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모든 민주 열사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사회적으로 예우하는 민주유공자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도예종 열사는 1924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나 영남대 전신 대구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60년 대구대 경제학과 강사로 근무했다. 4.19혁명 이후 경북 영주군교육감에 당선됐고, 민주민족청년동맹 간사장을 맡았다. 하지만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 3년형을 선고받았고, 이어 1974년 4월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구속돼 1년 뒤인 1975년 4월 8일 사형이 확정돼 다음날 사형됐다.
서도원 열사는 1923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청구대(영남대 전신) 학생주임을 맡았다. 1961년 민주민족청년동맹 위원장을 맡았다가 5.16쿠데타 이후 혁명재판에서 7년형을 받고 2년 7개월을 복역했다. 이어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구속돼 1975년 4월 9일 사형이 집행됐다.
송상진 열사는 1928년 대구 동구에서 태어나 대구대 경제학괄르 졸업했다. 1960년 민주민족청년동맹 총무국장을 맡았으나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연행됐다. 무혐의로 풀려난 뒤인 1974년 4월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구속됐다가 이듬해인 1975년 4월 9일 사형됐다.
< 4.9통일열사 50주기 추모 주간 선포문(전문) >
1960년 4월 19일 419 민주혁명이 발생합니다.
1961년 5월 15일 박정희 소장에 의한 군사구데타가 발생합니다.
1964년과 1965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가 전개됩니다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도예종 선생을 비롯한 인혁열사들이 구속되거나 조사를 받습니다.
1969년 박정희의 장기집권 음모를 막기위한 '3선 개헌 반대'시위가 전국적으로 전개됩니다.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의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이 있었습니다.
1972년 10월 박정희가 영구집권을 위한 '유신헌법'을 선포합니다. 이어 유신헌법 제정 반대 시위가 벌어집니다.
1974년 4월에는 유신독재를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투쟁인 '민청학련사건' 발생합니다
<사건이 조작되는 시기입니다>
1974년 4월 25일 중앙정보부장 신직수가 민청학련사건의 배후에 북한의 조정을 받는 '인혁당 재건위'가 있다며 수사결과를 발표합니다.
1974년 5월 27일 비상군법회의 검찰부에서 국가내란예비음모등의 죄명으로 '민청학련'과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54명을 구속 기소합니다
1974년 7월 8일 비상보통군법회의가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도예종 외 6인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1974년 7월 13일 비상보통군법회의가 민청학련 관련자 중 여정남 외 6인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1974년 9월 7일 비상고등군법회의가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항소를 기각합니다
<유족과 사회각계각층의 인사들의 처철한 구명운동이 진행되는 시기입니다>
1974년 11월 8일 관련자 가족들이 항소기각에 항의하며 공정한 재판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관계기관에 제출합니다.
1974년 12월 9일 사형을 선고받은 열사들의 부인 7인과 사회각계각층의 저명인사인 김수환 추기경 등 15인이 공명정대한 공개재판을 받게 해달라고 대통령과 대법원장에게 탄원서를 제출합니다.
1974년 12월 14일 조지오글 목사가 신원운동을 벌였다는 이유로 강제출국명령을 받습니다
1975년 2월 18일 영국 일간지인 <런던타임즈>에 인혁당사건 관련자 가족들의 증언을 토대로 '사형을 판결한 법원의 공판 조서가 변경되었다고' 보도됩니다.
1975년 2월 24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구속자가족협의회 후원회는 인혁당 사건 진상을 조사한 후 '인혁당의 진상은 이렇다'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합니다.
1975년 김지하 시인의 '고행 ...1974'라는 인혁당 수기가 동아일보에 발표된 후 반공법 위반혐의로 재구속됩니다
1975년 3월 6일 구속자가족협의회와 동 후원회는 'TV방송의 간첩왜곡보도'에 항의하는 성명서를 발표합니다
1975년 4월 8일 사형 판결이 나고 다음날인 4월 9일 사형이 집행됩니다
<이후 살아남은 이들의 진상규명을 위한 긴 항거가 진행됩니다.>
1982년 3월 3일 '인혁당재건위 사건'관련 생존자가 감형됩니다
1982년 12월 25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관련 생존자가 전원 출소합니다.
1988년 12월 1일 극단 '연우무대'가 인혁당 사건을 소재로 한 연극 <4월 9일>이 1989년 2월 26일까지 공연됩니다.
1989년 4월 9일 대구에서 공개적인 첫 추모행사로 '49통일열사 14주기 추모제가 민자통대구경북회의와 경북대 총학생회 주관으로 열립니다.
1990년 4월 16일 서울에서 공개적인 첫 추모행사로 이수병 선생을 비롯한 인혁열사 8인을 추모하는 '이수병 선생 15주기 추모제'가 이수병선생 추모위원회 주관으로 열립니다.
1991년 경북대학교 교정에 '인혁열사 여정남 이재문 열사 추모비'가 건립됩니다
1992년 4월 6일 인혁열사 이수병 선생의 평전 <암장>이 출간됩니다
1995년 4월 8일 서대문독립공원(옛 서대문 구치소 자리)에서 20주기 추모행사가 민청학련정신계승사업회 주관으로 열립니다
1995년 4월 8일 영남대 교정에 통일열사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추모비가 건립됩니다.
1995년 5월 18일 경찰에 의해 영남대 통일열사 추모비가 강제탈취 됩니다
1996년 6월 18일 경찰에 의해 경북대 통일열사 추모비가 강제탈취 됩니다
1998년 11월 4일 '민주화운동 유가족협의회'소속 가족들이 '민족민주열사명예회복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을 위한 국회앞 농성을 시작하여 이후 1999년 12월 29일까지 422일간의 농성이 진행되었으며
그결과 의문사진상규명법이 제정됩니다. 이 법에 따라 만들어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직권으로 '장석구 선생 옥중사망 사건'을 1년 3개월간 조사하여 인혁당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조사결과를 2002년 9월 발표하게 됩니다
1998년 11월30일. 대구경북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대책위 산하 “인혁당사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위원회”가 결성됩니다
1998년 '소위 인혁당 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공동대표 이돈명, 문정현)가 발족식을 가집니다
1999.년 4월 8일 인혁당 24주기추모식,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열리고 인혁당재건위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촉구 1천인 선언이 발표됩니다
1999년 12월 28일 국회에서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등에관한법률”,과 “의문사진상규명을위한특별법” 이 본회의에서 통과됩니다
2000년 10월 27일 제5회 인권영화제에 인혁당의 진실을 담은 다규영하 '4월 9일'(감독 김태일, 제작 푸른영상)이 출품됩니다.
2000년 4월 9일 제25주기 추모제가 대경민족민주열사대책위 주최로 두류공원에서 열립니다
2001년 3월 17일 의문사 진상조사 규명위가 '장석구 옥중사망 사건'에 대해 직권조사를 개시합니다.
2001년 4월 9일 인혁당 대책위원회 주관으로 '49 통일열사 26주기 추모문화행사를 진행합니다.
2002년 9월 12일 의문사 진상규명위가 인혁당 고문조작 사실을 발표합니다.
2002년 12월 10일 서울지방법원에 사형당하신 여덟분의 열사에 대해 재심을 신청합니다
2003년 4월 9일 대경연합, 민자통, 민주노총대구본부, 민노당대구시지부, 5.18대경동지회,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등이 현대공원 묘원에서 28주기 추모제를 엽니다
2003년 11월 3일 민청학련 인혁당 사건 증언록인 <1974년 4월>1권을 민청학련운동계승사업회가 펴냅니다이후 2005년까지 관련자 59인의 증언을 담아 4권까지 발간됩니다.
2003년 11월 24일 인혁당 사건 재심개시 여부 결정을 위한 심리가 개최됩니다.
2004년 10월 9일 제임스 시노트 신부의 현장 증언론 <1975년 4월 9일>이 나옵니다
2004년 11월 5일 '인혁당 사건과 국가보안법'을 주제로 한 인권세미나가 대구민교협과 민변주관으로 열립니다.
2005년 2월 1일 소설가 김원일이 '인혁당 사형수를 소재로한 소설' <푸른혼>을 출간합니다.
2005년 4월 8일 명동성당 꼬스트홀에서 '인혁당 희생자 30주기 추모제'가 개최됩니다
2005년.4월 9일 228기념공원에서 49통일열사30주기추모제 개최됩니다‘ 증언대회`강연회`사진전 등 개최됩니다.
2005년 7월 21일 민청학련, 인혁당 진상규명위에서 <인혁당 사건, 그 진실을 찾아서'를 펴냅니다.
2005년 12월 7일 국가정보원 과거사진실규명위에서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고문조작 사실을 인정합니다
2005년 12월 27일 서울지방법원이 2차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재심을 결정합니다
2006년 1월 23일 '민주호운동심의위원회'에서 인혁당 사건 관련자 16인을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합니다.
2006년 3월 20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인혁당 사건 재심 1차 공판이 진행됩니다
2007년 1월 23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사형수 8인에 대한무죄 판결이 납니다. 사건이 일어난지 32여년만의 일입니다.
2007년 4월 13일 경북대학교 총장실에서 여정남열사 명예졸업장 수여와 대학 내 기념공원 조성 합의에 합의하였습니다.
2007년 8월 21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사형수 8인에 대해 국가배상 판결이 납니다.
2008년 1월 23일에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 생존자 9인에 대해서도 무죄판결이 나옵니다
2008년 10월 27일 서울에서 재단법인 49통일평화재단 창립식이 진행되고 2009년 6월 30일에는 대구에 사단법인 49인혁열사 계승사업회가 설립됩니다.
2010년 4월 10일 제35주기 인혁열사 추모제 및 여정남공원 제막식이 경북대에서 열립니다.
'사법사상 암흑의 날' 1975년 4월 9일 발생한 '인혁당 재건위 조작사건'이 올해로 50주기를 맞습니다. 박정희 독재 정부의 조작으로 인해 8명의 가장과 청년들이 사형선고 18시간 만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희생자 중 4명이 대구경북지역 출신입니다. '평화뉴스'는 당시 사건을 돌아보고 희생자들과 유족들, 관련자들의 삶을 재조명하는 연속 보도를 통해 인혁당과 같은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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