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그때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30대 젊은 변호사가 노트북을 펴놓고 말한다. 앞에 앉은 60대 여성이 26년 전 기억을 떠올린다.
오래전 기억이지만 애쓸 필요도 없다. 워낙 강렬하게 자리한 기억이라 비교적 상세하게 말한다.
1975년 4월 9일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원회 조작 사건'으로 형장의 이슬이 된 남편의 일이다.
부인은 오랜 세월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못해던 그날의 아픔을 하나도 빼놓지 안고 차분히 말했다.
젊은 변호사는 말을 끊지 않았다. 부인이 말을 끝마칠 때까지 타이핑만 할 뿐이다.
모두 3명의 인혁당 유족들을 만나 앞서 26년간 묵혀둔 응어리를 풀어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엉킨 실타래를 풀고 기록하고. 인터뷰는 2년이 걸렸다.
● 1975년부터 2001년까지 26년 침묵 첫 구술증언...천주교인권위 대구지부
대구에서 인혁당 유족들의 첫 구술증언을 받은 남호진(57.법무법인 우리하나로) 변호사의 이야기다.
인혁당 조작 사건 50주기를 앞두고 최근 대구 수성구 우리하나로 사무실에서 남 변호사를 만났다. 낡은 책자와 서류 더미가 책상에 한가득이다. 과거 인혁당 유족 구술증언과 관련한 자료들이다.
유족들의 구술증언 작업을 하게 된 것은 30대 초반 새내기 변호사 시절이다. 지난 2000년 천주교인권위원회 대구지부가 만들어지면서 도시 빈민 운동을 하던 '감나무골 나섬의집(대구 북구 대현동)'에서 운영하는 법률상담소에서 봉사를 하게 됐다. 당시 진보적인 사회활동가들과 여러 선후배, 동료들을 만났다.
천주교인권위가 인혁당 사건 진상규명 작업을 하는데, 그 핵심은 유족들의 구술증언이었다. 1975년 사건 발생 이후 꽁꽁 묻힌 사건이라 제대로 된 구술증언은 전무했다. 인혁당 사형수 8명 중 4명의 고향인 대구경북에도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요청이 왔다. 그렇게 남 변호사와 인연이 닿았다. 추후 재심을 준비하려 해도 기록이 정리되어 있지 않고, 아무 자료도 없으니 처음부터 하나 하나 증언을 쌓아올려야 했다.
● "이대로 가다간 잊혀져...역사의 한켠에 기록으로 남겨야"
구술증언 기록에 참여한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인혁당 사건으로 수감 중 숨진 고(故)장석구씨 사건과 관련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지난 2001년 직권조사 개시를 결정했다. 인혁당 진상규명 시발점이다.
'의문사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2000년 제정되면서 대통령 소속으로 2001년 의문사위가 출범했다. 당시 천주교인권위는 장석구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재판 기록을 찾는데 노력했다. 자료를 찾아 의문사위에 제출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공판 기록조차 입수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당시 의문사위에서 인혁당 사건을 맡은 김준곤 변호사가 군대에 자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시민단체 인사들이 군대에 직접 방문해 장석구씨 재판 기록 등을 필사했다. 이 기록을 시작으로 의문사위는 인혁당 사건 수사관 등을 불러 조사했다. 이어 2002년 9월 "인혁당은 고문을 통해 피의자 신문조서와 진술조서를 조작한 사건"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후 유족들은 재심 신청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유족들의 증언을 담은 문서가 하나도 없었다.
남 변호사는 "이대로 가다간 인혁당 사건도 잊혀질 수도 있겠구나. 반드시 역사의 한켠에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유족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빨리 진술을 받아 자료를 남긴다는 마음이 컸다"고 기억했다. 또 "재심을 준비하는데 훼손되지 않은 증언이 필요했다"고 밝혔다.
특히 유족들 중 가장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형수들의 부인들이 당시 증언 핵심이었다. 하지만 서울로 구술 작업을 위해 다니다보니 고령의 부인들이 건강상 이유로 많이 힘들어했다. 이왕이면 대구에서 증언을 할 수 있고, 법적 공증까지 받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남 변호사는 "내가 변호사다보니 증언을 받으면 신뢰도가 올라간다고 생각한 것 같다"며 "유병철, 예은주, 유인성을 비롯해 대학(경북대학교) 선후배들과 천주교 신자 몇 명이 팀을 구성했다"고 밝혔다. 남 변호사가 주축이 되어 유족들을 상대로 한 2년간의 인터뷰가 시작됐다. 사전·사후 모임도 갖고 따로 수차례 식사도 했다. 어느 곳에서도 지원 한푼 없이 남 변호사가 자기 돈을 써가며 진술을 받았다.
● 사형수 부인들 등 증언..."고문, 빨갱이 손가락질, 무덤에서 '박정희 천벌 받아라' 외침"
대구에서도 처음으로 인혁당 구술증언 작업을 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그 동안 목소리 낼 곳이 없어 숨죽여 있던 유족들과 피해 생존자들이 찾아왔다. 당시 개업한지 4년 된 남 변호사의 사무실에 사형수 고(故) 하재완씨의 부인 이영교(90)씨를 비롯해 피해 당사자인 임구호(76), (故)강창덕씨 등이 방문했다.
구술증언을 받은 것은 당시 대구에 살던 유족들이다. 인혁당 사형수 중 가장 먼저 희생된 고(故) 서도원씨의 부인 배수자(90)씨를 포함해 징역 15년형을 선고 받고 옥살이를 하다가 출소 이후에 심각한 고문 후유증으로 1986년 목숨을 잃은 고(故) 전재권씨의 부인 정점매(91)씨 등 3명이다.
인터뷰가 시작되자 26년 봉인된 기억들이 터져나왔다. 부인들은 오래전 일인데도 비교적 자세히 기억을 떠올렸다. 경찰관 압수수색 과정, 연행 경위, 다른 피고인들과의 관계 등 작은 부분까지 기억했다.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기억임에도 차분히 서술했다. 담담한 증언이 인터뷰를 하던 남 변호사를 더 아프게 했다.
배수자씨의 진술 중 일부다. "(남편인 서도원씨) 시신을 인계 받고 나서 나중에 시신을 염할 때 보니 등쪽에 넓은 부분이 검붉게 멍이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하재완씨가 고문을 당해 탈장이 되어 밖으로 나온 상태에서 막 끌려다녔다. 법정에서 이를 말하자 검사가 말을 가로 막았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정만진씨는 밤에 수사기관에 불려나가 새벽에 초죽음 상태로 업혀 들어왔다" 고문에 대한 유족의 증언이다.
당시 경찰에 가서 남편에게 불리한 발언을 하고, 수사에 협조하는 듯한 진술을 한 것 같다면서 나중에 집에 돌아와서 극단적인 선택을 기도했다는 증언도 있었다. 뿐만 아니다. 사형 집행 이후 정보기관의 유족 동정 확인과 감시가 심해지고, 동네 이웃들로부터 따돌림까지 당하니 스트레스가 커지기도 했다.
한 유족은 남편이 잠들어 있는 대구 칠곡 현대공원에 한밤 중에 가서 남편 무덤에 대고 하소연을 했다. 속에 쌓인 말은 많은데, 아무도 없으니 편하게 말을 할 수 있었다. 묘지에서 "박정희 천벌을 받아라"를 한 10번쯤 외치고 속이 시원해지면 그제서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충격적인 증언도 있었다. 하재완씨 부인 이영교씨 말이다. 안기부와 경찰에 늘 쫓기는 남편 행방을 수소문하다가 서울에서 대구 집에 돌아와보니 막내아들이 나무에 묶여 있었다. 동네 아이들이 "빨갱이 자식"이라고 써놓고 총살놀이를 했다. 학교에 간 아이에게 친구들이 "빨갱이 자식"이라고 손가락질하며 도시락에 모래를 뿌린 일도 있었다. 인혁당은 어린 아이의 삶에도 낙인을 찍었다.
● 긴급조치·국보법 위반? "애초부터 불법 조작"...첫 세미나에서 펑펑 운 부인들
구술 내용을 종합하면 인혁당은 애초부터 구속 기소를 할 수 없는 사건이다. 당시 사형수들은 긴급조치 위반, 반공법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선동죄 등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하지만 유족들의 구술증언만 봐도 애초부터 사건이 성립되지 않는다. 남 변호사는 "고문에 의한 자백을 받아낸 것 자체가 문제"라며 "피의자 신문조서는 증거 효력이 없다"고 했다. 또 "재판 과정에서 가족 접견 금지, 변호인 접견 제한, 일반인 방청객은 불허했다"면서 "반대 심문마저 박탈해 절차도 위법하다"고 꼬집었다. 이어 "대법원의 사형 선고 전 사형장 청소를 시켰다는 증언도 나온다"면서 "집행 절차조차 법적으로 문제"라고 했다.
증언 속에는 지역사회에 대한 원망도 섞여 있었다. 희생자 대부분 대구경북 사람들임에도, 2000년 전까지 적극적으로 진상규명을 돕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신독재 정권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인혁당 사건을 조작해 사법 살인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 대구. 박정희 사망 후 전두환·노태우까지 군사정권이 집권하며 독재 정권이 연장되자 유족들은 더 고립됐다. 누구도 나서서 도움을 주지 않았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대구지부와 대구경북 민주화교수협의회가 2004년 11월 5일 '인혁당 재건위 조작사건과 국가보안법'이라는 주제로 '국가보안법 폐지 인권 세미나'를 연 것이 지역의 첫 공론화다. 구술 작업을 하며 교류가 생겼고, 추후 민변 대구지부가 생기며 더 많은 유족들이 모여들었다.
첫 세미나에 온 사형수 고(故) 도예종씨 부인 고(故) 신동숙 여사가 펑펑 운 일도 있었다. 남 변호사는 "신 여사가 세미나에 와서 '대구에서 한번도 이런 일을 안해줘서 서운했는데 이렇게라도 해주니 너무 고맙다'고 말하며 오열했던 일도 있었다"고 떠올렸다. 뿐만 아니라 고(故) 하재완씨 부인 이영교씨가 "'변호사님이 늘 옆에 있어서 많은 도움을 받는다. 변호사가 옆에 있으니 너무 좋다'고 말한 적도 있다"고 덧붙였다.
● "어머니들 '우리 변호사님 오셨네' 참 듣기 좋았던 말...변호사 인생 중 가장 잘한 일"
이렇게 쌓인 구술증언록은 서울로 보내졌다. 추후 재심 재판에서 인혁당 희생자들의 '무죄'를 이끄는 바탕이 됐다. 이후 유족들은 국가로부터 손해배상금을 받았고, 서울과 대구 2곳에 관련 재단도 만들었다.
경북대 법과대학 86학번인 남 변호사는 대학 시절 어렴풋이 인혁당 사건을 알았지만 구술 작업을 하면서 제대로 공부를 했고, 그 과정에서 '사법 살인' 진상을 실감했다. 남 변호사는 당시 인혁당 구술 작업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을 "운명같다"고 말했다. 그는 "대현성당에서 법률상담을 하며 좋은 선·후배들을 만난 게 계기였다"며 "내 변호사 인생 중 구술 작업을 한 게 가장 잘한 일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유족들이 내게 했던 말 중 제일 좋았던 게 '우리 변호사님 오셨네'"라며 "그 말을 하면 참 좋았다...누가 다시 인혁당 구술작업을 하라고 해도 나는 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구술 작업에 참여한 것도 24년 전의 일. 당시 그 과정을 통해 배운 교훈은 여전히 명징하다. 인혁당 사건이 아닌 반드시 '인혁당 조작 사건'이라고 부를 것이다. 남 변호사는 "뭔가 실체가 있는 듯한 인혁당 사건이 아닌 인혁당 조작 사건이라고 불러 우리 기억에서 왜곡이 일어나게 해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개인의 양심과 공동체의 도덕성을 강조하는 발언도 했다. 1차 인혁당 조작 당시인 1964년 경찰은 박정희 독재를 비판하던 일부 민주화운동가들에 대한 구속 영장을 신청했다. 그러나 사건을 담당한 검사들이 "요건이 안된다"며 구속과 기소를 모두 거부했다. 그 탓에 당직 검사를 통해 대신 영장을 청구했다. 남 변호사는 "엄혹한 시절에도 사법 질서 내에 소수의견이 있었고, 양심 있는 자가 있었다"며 "법의 이름으로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는 걸 최근 우리는 너무나 많이 목도했지만, 개인의 양심과 공동체 도덕성을 지킨다면 인혁당 같은 비극적인 역사를 또 만들지 않을 것"이라고 희망했다.
'사법사상 암흑의 날' 1975년 4월 9일 발생한 '인혁당 재건위 조작사건'이 올해로 50주기를 맞습니다. 박정희 독재 정부의 조작으로 인해 8명의 가장과 청년들이 사형선고 18시간 만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희생자 중 4명이 대구경북지역 출신입니다. '평화뉴스'는 당시 사건을 돌아보고 희생자들과 유족들, 관련자들의 삶을 재조명하는 연속 보도를 통해 인혁당과 같은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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