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깜빡 깜빡하는 방 안에서 4시간 넘게 맞았다.
고문이 이어졌다. 폭력은 끝없이 되풀이 됐다.
백지를 주며 "불라"고 한다. 자백을 강요받은 26살 청년은 펜을 들었다.
자신을 비롯해 수많은 동료들의 비명이 다른 방에서 들렸다.
경찰들과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데모꾼", "시위꾼", "빨갱이", "간첩"이라며 청년을 모욕하고 조롱했다.
할 수 없이 거짓을 썼다. 재판장에서 고문에 의한 거짓이라고 고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인민혁명당 재건위 조작사건'에 연루돼 징역 20년형을 선고 받았다. 항소심에서 5년이 줄어 최종 징역 15년형을 살게 됐다. 다른 동료들도 징역 5년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아 감옥에 갇혔다.
이 사건에 휘말린 서도원씨 등 8명에게는 사형이 선고됐다. 대법원 확정 18시간 만에 목숨을 잃었다.
● 청춘을 민주화에 바치고, 청춘을 삭제당했다. 인혁당 피해자이자 생존자인 임구호(76)씨의 삶이다.
임구호씨는 지난 3월 25일 오후 경기도 이천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을 찾았다. 인혁당 조작사건 50년을 맞아 장인어른인 인혁당 사형수 고(故) 서도원씨 등 다른 인혁당 희생자들의 묘역을 참배했다.
해마다 인혁당 희생자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묘지를 찾는다. 그럴 때마다 불쑥 생각이든다.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민주주의라는 게. 여기 수많은 사람들이 누워있잖아. 다 민주주의나 통일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거든. 보기에 어때요? 얼마나 아까운 목숨들인가 그런 생각을 해"
26살 인혁당 조작사건 피해자로 감옥에 끌려가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묘지를 걷는 그의 머리는 백발이다. 어느새 50년의 세월이 흘렀다. 무덤에 잠든 장인어른보다 사위인 그의 나이가 훨씬 많다. 그는 "머리가 너무 하얗다 보니까. 염색은 못 하겠고. 대충 빗고 모자를 써요. 지금 괜찮습니까?"라고 묻는다.
● 여든을 앞둔 민주화운동가는 50년 전 대구에서의 기억을 떠올린다.
1974년 1월 8일 오전 박정희 정권은 반(反) 유신데모를 금지하는 긴급조치 1호에 이어 이날 오후 위반자는 처벌하고, 비상군법회의에 회부하는 긴급조치 2호를 발동했다. 같은해 4월 3일에는 이를 어길 경우 최고 사형까지 집행한다는 내용의 긴급조치 4호를 발동시켰다. 모두 민주화운동을 억압하는 내용이다.
얼마 지나지 않은 4월 25일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신직수 중정부장은 긴급조치 1~4호를 위반한 혐의로 전국에서 민주화운동가 등 관련 인사 1,024명을 연행해 조사했다. 사건명은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인혁당 재건위'다. 당시 인혁당 사건으로 여정남, 이수병, 김용원, 서도원, 도예종이 먼저 체포되고 이어 하재완 등도 연행됐다. 이어 5월 최종 발표에서 인혁당 관련 인사 22명이 잡혔다. 추후 인혁당 재건위 조작사건으로 유죄를 선고 받은 이들은 사형수 8명을 포함해 모두 25명이다.
당시 경북대에서 학생운동을 하던 임씨도 인혁당 사건에 연루돼 대구 집에 있다가 경찰들에게 잡혀갔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입학원인 대구 고려학원에서 강사로 일할 때다. 임씨는 "이놈들(경찰)이 집에 있는데 들이닥치더니 나를 끌고갔다"며 "구속영장이고 뭐고 없었다. 그냥 잡혀갔다. 그 길로 대구 남구 대명동에 있는 중정 대구지부로 끌려간 것으로 기억난다"고 밝혔다.
끌려간 곳에서 끝없는 구타와 고문이 이어졌다. 괴로운 기억이 생생하다. 임씨는 "집중적으로 고문을 당했다. 나뿐만 아니라 뒤에 보니 전재권, 이태환 선생도 들어와서 신나게 맨날 두드려 맞았다"고 기억했다.
구타 후 중정요원들은 백지를 건냈다. 지난 한달 간 일정을 쓰라고 했다. 누구를 만나고, 어떻게 했는지 적으라고 강요했다. 임씨는 "백지를 주는 거면 뻔하다. 어느 구석에서든 이름이 나오게 돼 있다. 그래서 학생운동하고 관련 없는 친구들하고 어울려 논 것만 썼더니 또 작살나게 맞았다"고 회상했다. 이어 "4시간 정신 없이 맞고 나면 이걸 다른 사람들도 쓸텐데 속일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고문을 견디다 못해 요구하는 대로 자백했다. 재판 과정에서 고문에 의한 강요라며 번복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심 재판부는 긴급조치 1호, 4호 위반, 유신헌법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등 5개 혐의에 대해 다 유죄를 인정해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항소심에서는 1심보다 형량을 5년 줄여 징역 15년에 자격정지 15년을 선고했다. 함께 끌려온 강창덕 선생 등 7명은 무기징역, 정만진씨 등 4명은 징역 20년, 임씨 등 4명은 징역 15년, 장석구 등 2명은 징역 5년이 떨어졌다.
● 청년의 나이 26살, 감옥 생활이 시작됐다.
1982년 3월 전두환씨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기념 특사로 인혁당 피해자들을 풀어줘 겨우 출소할 수 있었다. 억울한 옥살이 기간만 7년 10개월이다. 하지만 형집행정지 기간이라 전두환 정권 눈 밖에 나면 언제든지 취소가 가능했다. 다시 감옥으로 끌려갈 수 있다는 공포는 늘 그를 사로잡았다. 먹고는 살아야 하는데 자격정지를 풀어주지 않아 취업도 할 수 없었다.
인혁당이 조작으로 밝혀지기 전이라 33살 청년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2주에 한 번 담당 형사들이 찾아와서 감시를 하고 나중에는 친해져도 술도 한잔씩 마시고 밥도 먹었다. 주변으로 사람들이 오지를 않았다. 할 수 있는 게 마땅치 않았다. 민주화운동을 이어가며, 생계 활동으로 포항과 청도에서 농사를 지었다. 자격정지가 끝난 1998년, 50대가 되어서야 겨우 식당을 차렸다. "형집행정지와 자격정지 탓에 농사를 하면서도 빚만 졌는데 자영업을 하면서 집사랑이랑 딸에게 처음 돈을 벌어줬다"고 했다.
옆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며 고초를 치르는 아들을 지켜보는 가족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의 기억으로 부모님들은 "특별한 분들"이었다. 1969년 8월 경북대는 재학생 중 민주화운동을 하는 소위 '데모꾼' 부모들을 학교로 불러모았다. 당시 임씨의 아버지도 시골에서 불려왔다. 대학은 "더 이상 우리들은 이 학생들을 지도할 수 없으니 집으로 데리고 가라"고 했다. "신변이 안전하지 않으면 가지 못한다"고 했더니 대학은 "안전을 보장한다"고 말했다. 그 길로 고향 포항까지 아버지와 함께 버스를 타고 내려갔다.
아버지는 "너한테 생긴 문제는 농사를 짓는 내가 감당할 수 없다. 그래서 너의 문제는 네가 알아서 챙기고, 알아서 결정하고,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화운동에 대해 하라, 하지 마라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임씨는 "자식이 하는 일을 보니 위험하긴 해도 나쁜 일은 아니니 간섭을 하지 않으셨다"며 "부모님들은 일본과 만주에서 민족해방운동을 하시던 분들이라 대의를 위해서라면 그런 일은 좀 크게 봐주시던 특별한 분들이셨다"고 떠올렸다. 1972년 시위 때문에 유치장에 들어갔을 때에도 미안해하는 임씨에게 어머니는 "남자로 태어나 그 경험도 해야 한다. 마음 굳게 먹고 가라"고 말했다
● 감옥에서 풀려난 뒤에도 한참을 그를 괴롭힌 것이 있었다. 무언가에 쫓겨 도망다니는 악몽이다.
민주화운동을 하며 가장 두려웠던 것은 '죽음'이 아니였다. 혹시 고문 중 누군가의 이름을 불까봐 그것이 가장 무서웠다. 그래서 늘 숨어다니는 삶이 익숙했다. "나는 죽을 급이 아니였다. 8명 선생님들(인혁당 사형수)은 전국적 인물들이니 죽음을 항상 염두해뒀지만, 나는 그때 철부지였어. 그래서 내가 붙잡혀서 뭘 말할까봐 그게 늘 불안했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석방 이후 50대 중반까지 늘 악몽에 시달렸다. 다시 청년 임구호로 돌아가 누가 잡으러 오면 도망가고, 담을 타넘고, 그러다 다리가 붙잡혀 뿌리치는 꿈이다.
● 재심, 무죄...허망함과 슬픔. 다시 살아돌 수 없는 사람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 인혁당 등 과거사들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이 급물살을 탔다. 인혁당이 국가에 의한 조작된 사건이라는 것이 증명되고, 국정원이 사과를 하며 드디어 오랜 억압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리고 2007년 1월 재심 재판에서 사형수 8명에 대해 무죄가 선고됐다. 같은해 8월 유족과 생존 피해자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막대한 배상액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이듬해 2008년 임구호씨 등 또 다른 피해자들도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 받았다. 33년 만에 억울한 누명을 벗었다. 임씨는 무죄를 선고 받은 그날 "덤덤했다"고 떠올렸다. 자신에 대한 무죄가 아니라 숨진 8명을 생각했다. 그는 "8명의 그 사람들, 사형수 진상규명이 중요한 일이였다. 그런데 8명이 무죄 선고를 받은 날은 좀 슬프더라. 아니 허망했다."고 밝혔다. 왜냐하면 "무죄 판결을 받아도, 나는 살아있는데 그 사람들은 다시 살아서 못 돌아오니까 그렇게 마음이 아프더라. 안타깝고 화가 나고 비통했다"고 회상했다.
● 인혁당 50주기를 앞둔 지금.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에 박정희 동상 건립까지. 후퇴하는 민주주의를 지켜보는 인혁당 생존자이자 민주화운동가의 마음은 어떨까. "반동은 상수"라는 게 그의 평가다.
임씨는 "역사는 변화와 발전 끝에 반동이 온다"면서 "한국 사회는 윤석열이라는 형태로 심각한 반동이 왔다"고 했다. 이어 "인혁당과 같은 위험은 언제든지 또 올 수 있다"며 "이승만과 박정희가 살아나고 있지 않나. 비극적이지만 민주주의는 시행착오를 거듭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민주화운동 세력도 엘리트 계급적 절차적 민주주의 오류에 빠진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면서 "정치적 투쟁을 않고 사법 투쟁으로 빠지는데, 피땀 흘려 이룩한 민주주의를 법관들에게 갖다 받치는 행위"라고 꼬집었다.
동대구역 광장에 세워진 박정희 동상에 대해서는 "기자회견을 열고, 집회를 하고, 시위를 하되 강제로 드러내는 것은 안된다"며 "그러면 반동이 온다"고 지적했다. 예전 경북대 사대 본관에 있던 박정희 전 대통령 흉상과 관련해 한 친구가 전화가 와서 '어떻게 뽑아낼까요?' 물었던 적이 있는데 '하지 말라'고 말한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경북대 구성원 결론이 모여 철거시켜야 완벽하게 사라지는 것이지, 운동의 형식으로 강제로 뽑아내면 반동이 오고 불완전하다. 그래서 만류했다"고 떠올렸다.
그러면서 "대구경북 곳곳에 선 박정희, 이승만 동상. 자꾸 세우라고 해라. 결국 대구경북 사람들 손으로 철거하는 상황이 올 것"이라며 "시민사회는 힘의 근원지를 비판하면서 민의를 모으면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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