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형수의 부인들은 손을 맞잡고 무덤가를 걸었다.
각각 남편들이 묻힌 산소 위에 국화꽃을 올리고 오랜만에 남편들에게 인사를 건냈다.
벌써 50년의 세월이 흐른 탓일까, 눈물을 흘리거나 소리를 치거나 큰 감정 변화는 없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 줄 알았는데. 그렇게나 빨리 세상을 떠나버릴 줄 몰랐던 사람들.
짧은 생을 마감하고 세상을 등진 남편들의 삶이, 2030대 젊은 두 여성의 삶을 평생 좌우했다.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남편들의 생전 꿈들이 두 여성의 꿈이자, 등대가 됐다.
이제는 남편들의 나이를 훌쩍 넘어 80대에 접어든 할머니가 되었다. 그럼에도 사무치게 보고싶다.
'인민혁명당 재건위 조작사건' 희생자 고(故) 이수병씨 부인 이모(79)씨와 또 다른 희생자 고(故) 김용원씨 부인 유모(87)씨는 지난달 25일 경기도 이천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 안장된 고인의 묘역을 찾았다.
이수병씨와 김용원씨는 박정희 정권 당시 유신체제를 비판하던 통일운동가이자 민주화운동가였다. 박정희 정권은 눈엣가시 같던 두 사람 등 모두 8명을 인혁당 재건위라는 사건으로 조작해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그리고 1975년 4월 9일 사형 선고 18시간 만에 이들 8명을 사형에 처했다.
올해로 인혁당 사건은 50주기를 맞는다. 유족들은 앞서 3월 4.9통일평화재단과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 사월혁명회, 서울대민주동문회 등과 함께 희생자들이 잠든 묘역을 찾아 추모행사를 열고 참배를 했다.
"이리 오세요. 여기 위에서 같이 서서 우리 구호 한번 외쳐요."
좀 더 활발한 이수병씨의 부인이 부끄러움이 많은 김용원씨의 부인의 손을 잡고 자세를 잡는다. '민주통일열사 김용원의 묘'라고 적힌 비석 뒤에서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주먹을 불끈 쥐고 사진을 찍는다. 표정이 밝다.
"활화산의 뜨거운 불출을 미룬채 갔으니 분하다. 그러나 그는 조국산하에 의로움으로 남아 그의 사랑을 사람마다의 가슴 속에 꽃으로 피어날 것이요" 김용원씨 묘비에 적힌 글이다. 묘비 앞뒤로 같은 인혁당 희생자 이수병씨와 서도원씨를 비롯해 다른 '통일민주지사', '통일열사' 비석이 나란히 서있다. 이수병씨 묘비에는 "조국 하늘에 마침내 통일의 깃발이 펄럭이는 그날 첫 새벽의 여명으로 부활하소서"라는 글귀가 적혔다. 살아생전 그렇게 염원했던 통일을 향한 갈망이 두 사형수 묘비에 절절한 문구들로 새겨졌다.
"벌써 50년이 지나, 할 말도 없는 것 같은데...아직 너무 보고 싶어"
두 부인은 처음에는 인터뷰를 하기 꺼려했다. 50년 동안 인혁당 사건으로 인해 너무나 큰 고통을 겪었고, 할 말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수병씨와 김용원씨는 인혁당 사건으로 감옥에 끌려간 직후 생사를 알 수 없었다. 면회도 되지 않았다. 어느 날 사형이 집행됐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고, 돌려받은 시신은 처참했다. 고문의 흔적이 두 사람 온 몸에 가득했다. 멍 자국이 선명했고, 탄 자국도 보였다.
이씨는 아직도 그날이 선명하다. "그때 시신을 뺏길 줄 알았는데, 다행히 시신을 주더라고. 그런데 몸뚱이를 봤는데 다 탔어. 다 타. 그때 그 시신을 잡고 울었어. 너무 많이 울었어. 아직도 선명해"
옆에 있던 유씨는 말이 없다. 먼 산을 쳐다볼 뿐이다. 그리고는 "나도 그렇지 뭐. 비슷해요. 아이고. 이제는 안떠올리려고해. 사람들이 그렇게 억울하게 죽었는데, 우리도 평생을 마음대로 살지 못했어"
2007년 재심을 통해 인혁당이 조작된 사건이고, 8명 모두 무죄라는 선고를 받기 전까지 이들 역시 평생을 고통받았다. 누명을 벗는데 32년이의 세월이 걸렸다.
박정희가, 국가가 남편을 죽였고, 자식들은 감시와 연좌제로 고통받았다. 엄마들은 쥐죽은 듯 그림자의 삶을 살았다. 그러면서도 남편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고 싶다는 진실을 향한 의지는 꺽이지 않았다. 오랜 싸움 끝에 마침내 무죄를 받아냈고 이윽고 웃음도 되찾았다. 그리고 이제는 꿈도 꾸고 있다.
"내 꿈은 그날부터 통일, 민주주의...나는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것"
두 사람 꿈은 다르다. 이씨는 "남편이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날 지경"이라며 "남편 꿈이 살아생전에 통일, 민주주의였다. 내 꿈도 그날부터 통일이고, 민주주의"라고 밝혔다. 또 "50년 전 인혁당으로 감옥에 가서 기도하고 울고 했던 그날부터 내 꿈"이라며 "통일이 되는 그날을 함께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해. 그리고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윤석열이 파면되게 해달라고 같이 빌고 있다"고 덧붙였다.
남편이 사무치게 보고싶은 날이면 남편 모교인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학교 캠퍼스 안 이수병씨 추모 동상을 찾아간다. 털실로 된 모자를 씌워주고, 목도리를 둘러주며 손을 잡아보기도 한다.
유씨의 꿈은 다르다. "육신도 마음대로 이리 저리 못 다니게, 꼼짝못하게 했어. 그게 정말 마음이 아팠다"며 감시의 고통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나는 평범하게 사는 게 소원이었다"고 고백했다.
두 부인은 최근 시국에 대한 씁쓸한 마음도 전했다. 인혁당 희생으로 이룬 역사의 진전에도, 통일과 민주주의는 틈만나면 후퇴한다. 유씨는 "화창한 봄날이 왔지만 우리 가슴은 왜 이렇게 먹먹하고 슬픈지 모르겠다"며 "50년 전이 까마득한데,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어서 가슴 아픈 하루를 보낸다"고 했다.
이씨는 "지금 상황을 보면 살아생전에 통일이 될까 의구심이 들지만, 통일이 돼야 눈을 감지 아니면 못 감는다"면서 "게다가 요즘에는 윤석열 때문에 밤잠도 못자고 설친다. 인혁당 50주기인데 이제는 진정한 평화 통일이 되고, 우리나라가 민주주의가 되어 국민이 잘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박정희 동상을 동대구역 광장에 세운 대구시와 홍준표 대구시장을 향해서는 분노했다. 50년 전 젊은 부인들에게서 남편을 뺏앗아간 독재자를 기념하는 동상을 어떻게 공공시설에 세울 수 있냐는 것이다.
이씨는 "인혁당 유족으로서는 보기 그렇다. 어떻게 그걸 거기에 세울 수 있냐"며 "끌어내려야한다. 우리 남편처럼 목에 줄을 해서라도 끌어내려야지. 그걸 부셔버려야지. 이 시대에 그 흉물이 어떻게 광장에 세워질수가 있냐"고 흥분했다. 유씨도 "(우리는) 그게(동상) 너무 보기 힘들다"며 "대구시민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까 가슴이 아프다.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사법사상 암흑의 날' 1975년 4월 9일 발생한 '인혁당 재건위 조작사건'이 올해로 50주기를 맞습니다. 박정희 독재 정부의 조작으로 인해 8명의 가장과 청년들이 사형선고 18시간 만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희생자 중 4명이 대구경북지역 출신입니다. '평화뉴스'는 당시 사건을 돌아보고 희생자들과 유족들, 관련자들의 삶을 재조명하는 연속 보도를 통해 인혁당과 같은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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