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칼을 보검으로 믿는 기자"
- 영남일보 이춘호 기자

평화뉴스
  • 입력 2004.11.03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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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의 편리함에 길들여진 기자”
“선배들이 물려준 정형화된 단죄와 폭로시스템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볼 것인가”


나는 지금 지식과 지혜의 틈바구니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지식도 탐나는 물건이지만 왠지 그것만으로 역부족일 것 같아 이런저런 고전류를 뒤적거려본다.
그러나 신시류(新時流)를 명쾌하게 해부할만한 지혜의 시각은 아직 멀기만 하다. 그만큼 불안하다는 증거다.

누구나 처음엔 지식의 세계에서 우쭐댈 것이다.
지식이 증가하면 몸은 힘을 받기 시작하고 튀기 시작한다.
아는 것이 많아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지식의 무력함을 절감한다.
지식의 칼로 이 복잡다단한 세상이 해부되지 않는 걸 깨닫는 중일까.

지식이 연륜을 만나면 비로소 지혜의 세상으로 스며들어간다.
지혜가 결코 성자의 몫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아무나 그런 경지에 도달하는 것도 아닐 터.
지혜의 눈은 정의의 눈을 키우고 그 눈을 가질 때만이 강자와 약자가 동고동락하며 살 수 있는 해법의 일단을 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대다수 지식에 만족하며 기성세대로 편입돼가지만 적어도 기자는 그런 차원에 흐뭇해 할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기자는 누군가?
지식과 지혜의 세계를 연결해주는 가교, 아니 ‘휴즈’ 같은, 아니 권력의 그늘을 햇살로 변화시키는 촉매라고나 할까.
언론계에 나온 기자들에게 지식은 기본일 것이고, 그들은 그 터전 위에 지혜의 씨앗을 뿌리려 할 것이다.
기자에게 있어 지혜는 ‘시각’이다. 삶의 사각지대를 꿰뚫어 보는 눈이다.
그런데 디지털 세상은 자꾸 그 눈의 시력을 저하시킨다.
인터넷은 기자와 비기자의 경계를 붕괴했다.
독자나 기자나 독점적 정보를 취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몇 시간.
이제 무슨 정보를 안다는 게 더 이상 자랑이 못되는 세상이 도래했다.

예전엔 군부독재.반자유 세력이란 타깃이 존재했다. 그래서 언론의 사명은 더없이 막중하게 어필됐다.
그때 기자는 아닌 걸 보고 아니라고 말하고 감옥으로 가기도 하고 탄압도 받았다.
물론 용기가 없는 기자는 뭘 알면서도 말하지도 쓰지도 못했다.
그런데 이젠 세상이 달라졌다.
대통령을 향해 육두문자를 퍼부어도, 북을 칭송해도, 태극기를 태워도 기자에게 거의 불이익이 주어지지 않는다.
싸움의 대상이 사라진 듯하다.

기자가 폭로하지 않더라도 시민단체, 전교조,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등이 기자들이 알고 싶어 하는 출입처의 비리 정보를 알려준다. 오마이뉴스는 뉴스 속 뉴스를 더 풍성하게 네티즌들에게 안겨준다.
시민단체들은 일급 교수를 자문역으로 동원시켜 특정 재벌의 불법 사실을 폭로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나는 보도자료의 편리함에 더 잽싸게 길들여지고 있다는 걸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언론사 경영이 어려워지자 기사 보다는 광고가 더 중시되고 있다.

또 폭음이었다.
숙취 속 기상, 아내와 아이는 내가 사과 한 개만 먹고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지도 모른 채 깊은 잠에 빠져 있다.
편집국으로 와서 기본 업무를 처리한 뒤 출입처로 나간다. 공보관과 미스 아무개가 옆에 와서 안부를 묻는다.
이어 커피가 등장하고, 습관처럼 중앙.지방지를 이리저리 뒤적거리는 순간 전광석화처럼 뇌리를 스치는 일용한 양식(아이템)이 떠오른다. 즉시 공보관을 불러 방금 떠오른 아이템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소관부서가 어딘지 확인한다. 즉시 담당자에게 전화를 건다.

나는 담당자와 얘기도 나눠보지 않은 상태에서 기사를 99% 완성시켰다.
마지막으로 담당 직원에게 전화를 건다.
관계자 멘트가 없으면 기사 요건 상 문제가 될 것 같아 형식적으로 전화를 건 것뿐이다.
물론 나는 담당자가 설령 내가 내린 결론에 반하는 주장을 해도 감안하지 않을 태세이다.

나는 “요즘 교육계 일각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데 사실이냐”고 묻는다.
직원은 선뜻 내 명제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주지 않는다. 나는 다른 화법을 구사한다.
“당신은 이런 주장을 하지만 일각에서 저런 지적도 한다는 데…”
그래도 담당자는 “저 쪽에서 저런 주장을 하는 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맞선다.
나는 잘 알았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는다. 마감시간이 급하다. 내가 생각한 대로 기사를 쓴다.
가슴 한 쪽이 무거워진다. 다음날 담당자한테서 전화가 걸려온다.

“아니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습니까.”
“전문가 주장을 기사화한 것뿐입니다.”
“부분을 보고 전체인양 확대해석하지 마십시오.”
“언론은 전체의 의견도 중시하지만 특별한 징조가 나타나면 일부의 문제도 부각시킵니다. 그걸 나쁘게만 보지 말아주세요.”

나의 내공은 부분을 전체화시킬 수 있는 경지에 아직 못 도달했다.
기자의 눈이 없는 탓인지도 모른다.
나는 선배들이 물려준 정형화된 단죄와 폭로 시스템에 갇혀있는가.
세상이 달라졌는데 기자는 달라지지 않은 녹슨 칼을 ‘보검’이라고 맹신하고 있는 건 아닌지.
달라진 세상, 그런데 도대체 어떤 눈으로 세계를 볼 것인가?
갈 길이 멀다.

월급날이다. 월급명세서가 내 책상 위에 놓여있다. 지난 달과 같은 월급 총액.
뭘 더 찾겠다는 지 세부 항목을 샅샅이 훑어보는 내 자신이 갑자기 샐러리맨 같다는 생각을 뿌리칠 수 없었다.

영남일보 2사회부 이춘호 기자(photo2@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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