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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생각해보는 '역사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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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락 칼럼 12>
"민족문학작가회의 30년, 그리고 두 명의 야당 정치인..."


친구들과 대화 중 지켜야할 예의 중의 하나는 말하는 사람 자신만이 잘 아는 전공분야의 이야기는 되도록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공은 말 그대로 자신이 전문적으로 공부해서 아는 것도 많고 정보도 충분하기 때문에 남보다 풍부하게 화제를 이끌 수 있기는 하지만 자칫 상대방을 썰렁하게 만들어 대화의 단절을 초래할 가능성도 크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여럿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화제를 올리는 게 대화의 기본 예의이다.

이런 점을 전제하면서 다소 결례가 되더라도 내 전공분야 이야기 한 가지 하겠다.
지난 18일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 30주년 기념행사가 서울 백범기념관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대통령이 축사를 했고(문광부장관 대독) 소위 대권주자라는 여야정치인을 포함 전현직 의원 수십 명 등 많은 내빈이 참석해 축하를 해주었다. 말 그대로 상전벽해를 실감케하는 순간이었다.
유신과 5·6공 군사정권 시절 불법단체로 찍혀 탄압과 압수 수색의 대명사처럼 보였던 한 문인 단체 행사에 현직 대통령이 축사를 하고 유력 정치인과 사회 저명인사들이 내빈으로 참석했다는 사실은 여러가지 감회를 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이런 외형적 화려함은 어려웠던 과거를 추억하거나 달라진 단체의 위상을 실감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문학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반드시 반길만한 일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주지하다시피 문학은 언제나 권력과 긴장관계를 가져야하고 이미 기성체제가 된 제도와는 양립하기 어려운 불온성을 그 속성으로 하기 때문에 현실적인 권력과 가까운 친구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타락의 전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우려도 행사 당일의 감동에 비하면 말 그대로 우려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 그간 작가회의가 걸어온 길이 가시밭길이었기 때문이다.

민족문학작가회의는 지난 1974년 11월 18일 당시 박정희 유신정권에 반대하고, 구속 중이던 김지하 시인의 석방을 요구하는 문인 101인 선언 발표로 출발했다. 엄혹하던 시기에 재야 정치인도 아니고, 야당 의원도 아닌 문약하게 보이던 문인 101인이 박 정권의 유신 철옹성에 금을 긋는 성명서를 발표한 것이다. 이것은 억눌린 양심과 깜깜한 어둠 속의 광야에 한가닥 성냥불을 그어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일로 고은 이시영을 비롯한 수 명의 문인이 연행되었고, 이후 문인간첩단 사건을 비롯해 많은 문인들이 필화사건으로 구속되고 탄압받는 고난의 길을 걸어왔다.

불법 임의단체이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광주사태를 겪은 후 1984년 재창립을 모색하였고, 87년에는 드디어 민족문학작가회의로 확대 개편되었다. 나는 84년 초에 문단에 등단해 자실(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재창립 모색에부터 관여하기 시작했다. 87년 민족문학작가회의를 창립할 때는 대구에서 경부선 열차를 타고 동료문인들과 서울을 수차 오르내렸다. 당시 정치적인 계절도 꽁꽁 얼어붙었지만 계절도 겨울이라 허연 입김을 불며 무궁화열차를 타고 대여섯 시간씩 걸리는 서울을 어떤 의무감을 가지고 오르내렸다. 그랬던 민족문학작가회의가 현재 1천 여명의 식구를 구성원으로 하는 우리문단의 주류단체가 되어 드디어 30주년 기념식을 거행한 것이다.

민족문학작가회의 30주년의 다양한 기념행사를 바라보는 나 개인의 소회도 남달랐지만, 공적인 대의 또한 충분히 컸다. 나는 그 날 기념식에서 펼쳐진 공연과 30주년을 기념하는 자료화면을 보면서 내내 '역사'에 대해 생각했다. 자료화면에는 작가회의가 걸어온 30년이 한국 현대사와 함께 응축돼 있었다.

70년대의 전태일의 분신과 문인간첩단 사건, 80년대 황석영, 문익환 목사, 임수경 씨의 방북을 통한 통일운동, 90년대 구속문인 석방 집회와 남북문인회담 불발 등 간난(艱難)했던 우리 현대사가 문인 중심으로 펼쳐졌다. 과연 역사란 무엇인가? 이 보편적인 질문에 대해 많은 역사학자들과 현자들이 나름대로 해답을 제시해왔다. 그리고 역사적 인간의 정당성에 대해 강조해오기도 했다. 나 역시 역사에 대해 생각해 온 바가 있다. 나는 역사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행위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이해관계를 떠나 옳은 것에 대해 실천으로 옹호하는 자세, 비록 그 옹호로 인해 신체적 구금과 물질적 피해를 경험한다고 해도 그것이 옳은 것이기에 완강하게 주장하는 그 실천적 행위를 나는 역사라고 생각하고 그런 인간을 역사적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 화면을 보면서 나는 나의 문학적 출발이 시대의 불의에 침묵하면서 허망한 미학적 순수주의를 꿈꾸던 문학이 아닌 현실주의 문학이었다는데 일말의 안도감과 함께 행운을 느꼈다. 내가 현실주의 문학을 택한 데는 나름대로 필연적 내력이 있겠지만, 그래도 당시 우리문단의 주류, 특히 대구문단에서는 전일적 주류였던 순수문학을 따라가지 않고 시대의 불의에 저항하고 민중의 삶을 옹호했던 민중문학 진영에 몸을 담게 된 행운에 대해 새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짧은 에피소드 하나만 소개하겠다.
그날 온 여러 명의 유력 정치인 가운데 한나라당 의원이 두 분 있었다. 한 사람은 내 친구인데 행사를 끝까지 구경하다가 갔다. 이 친구가 다음날 밤늦게 술 취한 목소리로 내게 전화를 했다. 그날 자기 집에서 친구를 재워 보내지 못한 미안함과 아쉬움을 토로한 끝에, 행사 당일 날 본 자료화면과 자신은 생각이 같은데 문득 뒤돌아보니 자신이 한나라당이었다고 말했다. 나는 이 말 속에 담긴 어떤 채워지지 않은 공간을 느꼈다. 그는 적어도 옳고 그름은 판단할 정도의 역사의식은 가진, 유능하고 지역사회에서 신망받는 젊은 정치지망생이었다. 그러나 지역 정서를 감안해 야당(한나라당)에 입당해 무사히 의원이 되었다.

또 한사람, 그는 어떤 의미에서 문제적 인물이었다.
80년대 민중당운동을 하다가 당시 여당(신한국당)에 입당해 현재는 야당의 중견이 된 사람이다. 행사 도중에 자리를 떴다. 그가 왜 자리를 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가 그 자리를 견디지 못하고 꽁지 빠진 오리처럼 달아나는 게 아닌가하는 느낌을 가졌다. 그가 여당에 입당할 당시 운동권 일각에서는 그의 이름 앞에 '개' 자를 붙여 불렀다. 소위 변절자에 대한 타매였다. 나는 그가 개 아무개로 불리는 것에 대해 안타까웠고, 그가 비록 중간에 신념이 변했다고 해도 그를 개 아무개로 부르는 행동은 정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일제 식민지 시대 만해 한용운이 길거리에서 최남선을 만나게 되었는데 최남선이 반갑게 인사를 하자 만해가 육당의 얼굴에 침을 뱉았다는 일화를 생각나게 하는 그런 호명이었다.

나는 당일 행사장에서 보았던 다큐멘타리 화면과 두 야당의원의 거취를 지켜보면서 역사의식과 신념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새삼 역사란 무엇인가라고? 왜 역사를 무서워해야 하는가 라고?

김용락(평화뉴스 칼럼니스트. 시인. [대구사회비평] 발행인)
* 1959년 경북 의성군에서 태어난 김용락 시인은, 지난 '84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등단한 뒤 <푸른별>, <기자치소리를 듣고 싶다>, <민족문학논쟁사연구>를 비롯한 다수의 시집과 평론집을 펴내며 시인과 문학평론가로 많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대구일보] 논설위원과 [대구참여연대] 편집위원장, [민족문학작가회의] 대구지회장을 지냈으며, 2002년부터 계간 <대구사회비평>을 펴내며 CBS대구방송 <라디오 세상읽기>를 매일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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