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가까워지면서 우리사회가 겪은 몇 가지 일들, 가령 수능 부정 사건, 국회의원 간첩 암약설, 밀양 여학생 성추행사건, 대구 5세 어린이 굶어죽은 사건 등을 지켜보면서 한국사회가 가지고 있는 악성 종양들이 이렇게 한꺼번에 터져 나온 적은 일찍이 없었는데 하는 안타까움과 탄식이 절로 터져 나왔다.
이 각각의 사건들에 대해 매스컴이나 각계의 전문가들이 나름대로 충분히 진단했고 대안을 제시한 터라 누구든지 관심만 있다면 사건에 대한 대강의 윤곽뿐 아니라 제법 깊이 있는 근원까지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수능 부정 사건에 대해 나는 관련 학생들이야말로 우리사회의 희생양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성인이 된 사람 누구나 학창시절을 돌이켜보면 한두 번쯤 장난삼아서라도 커닝을 한 적이 있고, 커닝을 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어 못한 적이 있을 것이다.(나는 중학교 때 수학 커닝하다가 잡힌 적이 있다. 다행이 순한 감독 선생님 만나서 용서받았지만) 나쁜 일인 줄 알면서도 커닝을 하고 싶은 이러한 심리의 밑바탕에는 학벌사회에 대한 무의식적인 공포가 있었을 것이다.
현대판 노예제도, 좀 가혹하게 표현하면 노예 확대재생산 시스템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현재의 제도교육 아래서 성적이 나쁘다는 것은 곧바로 노예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학교 교육과정 중에 학생들은 이미 몸으로 체득하고 있는 것이다. 열여덟에 치는 수능시험 한 방으로 평생이 결정되는 이 경직되고 차가운 제도를 고치지 않는 한 더 대담한 커닝방법이 곧 출현할 것이다.
한번 서울대와 서울의 명문 사립대를 입학하면 평생을 성골, 진골로 살 수 있게 만드는 이 사회가 학생을 범죄자로 만들고 있다. 도덕교육이 부족해서 학생들이 커닝을 하는 게 아니다. 다면적인 능력 평가를 가능하게 해야하고 학력간의 임금 격차도 반드시 줄여야 한다.
간첩 암약설에 대한 우리 지역출신 한 의원의 폭로는 말할 가치조차 없이 부끄러운 일이다.
21세기, 새로운 열린 세기로 들어서 화해와 화합과 희망의 세상을 만들어 가야할 이 시점에 우리사회를 다시 2-30년 후퇴시켜 야만의 시대로 되돌리자는 퇴행적인 행태이다. 고문으로 조작된 간첩혐의에 대해 당사자 개인의 아픔이나 인격에 대해서는 어떤 배려도 없이 느닷없이 정쟁의 차원에서 폭로한 이 폭력적이고 저열한 행동의 근저에는 아직까지 매카시즘에서 자유롭지 못한 한국사회의 어두운 과거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폭로 당사자의 경우 국회의원이 되기 전, 도덕성과 청렴성을 철칙으로 삼는 공직자로서(전직은 공안검사였다) 보여주었던 여러가지 물의를 생각해보면 과연 그가 정상적으로 지역 민의를 대변할 수 있을까 의심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도 지역민들이 국회의원으로 뽑아줬다면 심기일전해서 지역 여론에 화답하고 국가발전에 진력해야 할텐데 이런 무책임한 행태나 보이고 있으니, 이건 정치도 뭐도 아니다.
이 함량미달, 어떻게 보면 악질적이기까지 한 행태가 가능하게 된 배후에는 아직까지 매카시즘이 통용되는 우리사회의 후진성이 있다. 그리고 폭로 당사자의 인격자체에 근본적인 흠이 있다기보다는, 우리사회의 후진성을 예민하게 통찰하지 못하고 출세에 미혹돼 편승해온 무의식적인 관성이 이런 사태를 불러 온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나도 고문(?)을 당해봐 고문에 대한 두려움과 고문의 전지전능성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
유명한 고문 피해자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라 굳이 밝히기도 쑥스러운 일이지만 80년 5월에 시화전 준비를 하다가 영문도 모르게 경찰서에 '잠깐 협조' 하러 끌려갔다가 7-8 시간을 죽도록 얻어맞고, 시골 계시는 부모님을 교통사고 위장으로 죽이겠다는 협박을 받으면서 뭔가를 자백하기를 강요당한 적이 있다. 나는 원체 소심하고 겁이 많은 인간이라 열렬한 운동권도 아니고 거창한 조직원도 아니었기에 그 정도에서 풀려났지만 그 때의 기억은 지금 생각해봐도 별로 유쾌하지 않다.
문제는 당시 당한 폭행과 협박에 대해 나는 지금껏 한번도 그것을 고문이라고 생각해본 바가 없다는 점이다. 죽거나 진짜 독한 고문을 당한 사람이 수두룩하던 80년대에 몇 시간 맞은 것 정도는 그냥 그 날 일진이 나빴던 탓이려니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것은 달리 말하면 그 만큼 폭력과 인권에 대해서도 예민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간첩 암약설 사건은 폭로 당사자가 국민에게 정중히 사과해야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 국민들은 국가보안법 철폐운동에 더욱 매진해야 할 것이다.
밀양 사건의 가해자 남학생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행동이 이렇게 큰 죄가 되고 문제가 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 아직까지도 법적·제도적으로 사회 곳곳에서 여성을 차별하는 봉건적 남존여비 가치관에 무의식적으로 노출된 이 철부지들에게는 여성도 자신과 같은 어엿한 하나의 인격체란 생각이 애시당초 없었을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과연 이 어린 남학생들만 돌로 칠 자격이 우리에게 있을까?
지난 18일 대구시 동구에서 발생한 5세 어린이 아사사건(어린이 사인에 대해서는 현재 논란 중이지만 아사가 아니라 희귀병 때문이라 해도 마찬가지이다)은 극단적 양극화로 치닫고 있는 우리 사회가 필연적으로 노정할 수밖에 참담한 결과이다.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이기적이며 공동체 윤리에 대해 냉담한 우리 자신의 자화상이 어린이의 죽음을 통해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저께가 노무현 참여정부 2주기가 되는 날이다.
지난해와는 달리 별다른 기념식 없이 지나갔다는 보도가 보였다. 나는 참여정부가 최소한의 염치는 있구나 생각했다. 앞서 언급한 여러 사회적인 병폐가 어느 특정 정권 몇 년 만에 생긴 것도, 또 특정 기간 몇 년 만에 완전히 고쳐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참여정부는 최선을 다해 구태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해야하는 역사적 과제와 책임이 있는 정권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이 정부가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신뢰하기 어렵다.
참여정부도 이런 사실에 동의하는 지 정권 인수 2주년 기념일에 아무 기념 없이 그냥 지나간 것이다. 염치 정도는 있어 보여 좋았지만, 새해에는 이런 묵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권 차원에서 보다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할 것 같다.
김용락(평화뉴스 칼럼니스트. 시인. [대구사회비평] 발행인)
* 1959년 경북 의성군에서 태어난 김용락 시인은, 지난 '84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등단한 뒤 <푸른별>, <기자치소리를 듣고 싶다>, <민족문학논쟁사연구>를 비롯한 다수의 시집과 평론집을 펴내며 시인과 문학평론가로 많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대구일보] 논설위원과 [대구참여연대] 편집위원장, [민족문학작가회의] 대구지회장을 지냈으며, 2002년부터 계간 <대구사회비평>을 펴내며 CBS대구방송 <라디오 세상읽기>를 매일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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