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만의 손짜장면을 만들고 싶었는데..."
- 영남일보 이진상 기자

평화뉴스
  • 입력 2005.01.02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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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적당히 타협하고, 이따금 기사로 조지고, 특권에 적당히 젖어 살고...”


대학 4학년 때 네 가지 이유로 기자가 되고 싶었다.
첫째 넥타이를 매고 싶지 않아서. 둘째 물이 반쯤 찬 컵을 보며 ‘물이 반이나 남았네’, ‘물이 반밖에 남지 않았네’ 등 두가지로 해석이 가능한 직업인 것 같아서. 셋째 적당한 사회적 프리미엄이 있을 것 같아서. 덧붙이면 사회정의, 개혁 등 20대의 호기(呼氣)도 적지않이 작용했다.

2004년이 숨 넘어가는 지금, 기자가 되고 싶었던 이유들은 지금도 향유되고 있지만 세월과 함께 탈색돼 새삼 다시 떠올릴 필요성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고교시절부터 ‘기자’라는 직업에 품었던 선망과 기대감이 무너진지 오래고, 냉정한 현실에 몇마디 곱씹으며 스스로 기자라는 사실을 자위하며 ‘기자질’을 하고 있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는 말은 성문기본영어에서 처음 본 것 같다.
이 문장을 외며 진짜 펜이 칼보다 강한 줄 알았다. 막상 기자생활 해보니 그 반대더라. 현실에 맞게 고치자면 ‘칼이 펜보다 강하다. 그런데 가끔 펜이 칼보다 강할 때가 있더라’가 더 맞는 말일 게다. 기자들이 제보나 보도자료 등 소스를 들고 취재하는 과정에서, 권력 3부와의 긴장관계에서, 광고주와의 긴장관계에서 사실상 을(乙)일 경우가 많다.
기자가 갑(甲)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거는 현실 역학관계가 만들어 놓은 액면상 갑(甲)일뿐이다. 펜의 위력을 발휘하려고 해도 부분적으로 가능할 뿐이지, 전체적으로 불가능하다. 기본적으로 현실 권력과 자본에 얽매인 관찰자의 숙명 때문이지 않을까.

기자란 늘 새로운 것을 쫓아다니는 직업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기자 초년시절 선배로부터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을 들었다. 이젠 후배들에게 즐겨 사용하는 말이 됐다. 결국 기자가 기존의 것을 시각을 바꾸어 업데이트해 기사화 할 수 있다는 말인데, 뉴스를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으로 기다리지 말고 매번 새롭게 발굴하라는 적극적인 의미로도 풀이 된다.

인간세상은 매년 계절과 절기, 세시풍속, 수능, 투표 등 매년 반복되는 일과의 연속이다.
뉴스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에다 그때 새로운 상황과 내용을 넣어 편집한 것이다. 사건사고도 처음 2~3년간 새로운 사건을 접하지만, 어느 정도 연차가 되어 살인 강도 화재 등등 일정한 기사패턴에 익숙하면 뉴스틀은 변함없고 그 내용이 약간씩 달라질 뿐이다.

여기서 문제는, 기자들이 뉴스를 다루기에 늘 새로운 것을 대하는 사람 같지만, 실제로는 보수적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다. 기존 대학시절 배웠던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이 경험한 사건에 앵글을 비추어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내가 세상 흐름에 동떨어진 가장 구닥다리 인지도?

일상에서 그렇듯 ‘글로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
한때는 한편의 좋은 기사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가슴에 품었지만, 지금은 포기한지 오래됐다. 애시당초 그 기대가 착각이었는지 모른다. 한마디 충고(忠告)로 사람의 습관을 바꾸려는 행위가 오만(傲慢)이듯, 한편의 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은 오히려 만용(蠻勇)에 가깝다.

사고의 퇴행속에 기자생활 중 어느덧 현실과 ‘적당히’ 타협할 줄 알게 됐다.
출입처를 이따금 기사로 조지기도 하고, 말로 조지기도 하고, ‘빨아주기도’(홍보하기도) 한다.각종 민원들도 적당히 모나지 않게 처리할 줄 알고, 기자들의 특권에 적당히 젖어 살기도 하고, 술에 취해 횡설수설 하기도 하고, 어느 한때는 누구보다 비분강개하기도 한다.

내 마음이 그렇다.
처음에 내만의‘손짜장면’을 만들어 독자들에게 선보이는 기자이고 싶었는데, 지금은 어느 중국집에 들어가도 쉽게 맛 볼 수 있는 그저그런 ‘짜장면’을 만드는 기자가 돼 있다는 사실이 아프다. 어쩌까이. 2004년 갑신년이 가고 있다.

영남일보 사회부 이진상 기자(rhine@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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