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고민으로 두눈 부릅뜬 정치인 못봤다"
- 매일신문 김태완 기자

평화뉴스
  • 입력 2005.01.19 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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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부 기자...한나라당 '비밀당원'에서 열린우리당 '앞잡이' 비난까지"...
"가난한 사람들의 표정을 닮아가고 싶다...좀 더 인간미 묻어난 기사를 쓰고 싶다"


기자가 지사(志士)였던 시절은 언제일까?
배고프지만 굽힐 줄 모르고 당당한 기자가 되고 싶은 적이 있었다.
97년 2월 기자라는 ‘꼬리표’를 달기 시작해 이후 회사도 옮기고, 흘러흘러 서울까지 와서 지방지 기자생활을 하고 있지만 문득, 꿈을 잊어버린 지 오래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애초에 크고 높은 뜻이 없었으니 큰 실망도 없지만, 사범대를 나와 교사 보다 기자직을 택한-스스로 신분상승이랄까, 아니면 뭔가 다른 삶을 살아보려는 자긍심은 잃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웬 걸, 처음부터 풀리지 않았다.

결혼하자마자 IMF가 터져 아내에게 제대로 된 월급봉투를 손에 쥐어주지 못했다. 몇 년을 그렇게 살았다. 물론 언론계-유독 신문업-에 몰아친 삭풍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였다.

하나둘씩 동료들이 자리를 떠났고 유능했던 선배는 세일즈맨으로 구두끈을 고쳐 매야 했다.
착찹했지만 나는 잘 버텼다(?). 아내가 교사여서 궁핍했지만 굶진 않았고, 물오른 20대 후반 초년병 기자로 기사 쓰는 법도 모른 채 마구 썼다.(기초를 잘 닦지 못해 아직도 버벅 댄다) 점심때쯤 오라고 하는 출입처가 있으면 냉큼 달려가 한끼를 해결하거나 선배가 가르쳐준 ‘기사는 물먹어도 촌지는 물먹지 마라’는 경구를 잊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능숙하게 거절하는 법도, 진하게 배고파하는 법도, 당당해지는 법도 배우지 못해 곧잘 나와 상대방 모두 어색하게 만들었다. 그때 처음으로 기자는 지사가 아니다는 생각을 했었다.

주로 정치부에서 일했다.
대구일보와 매일신문을 통틀어 기자생활 8년 중 사회부에 1년가량 있었고 섬유출입 몇 개월 한 게 고작이다. 어찌 보면 시각이 좁을 수 있다. 지금은 한국 정치1번지라는 국회와 열린우리당 중앙당을 출입하고 있다. 만나는 정치인 중 솔직히 나라고민(愛國)으로 두 눈 부릅뜬 분은 못 봤다. <애국심 없는 정치는 정치가 아니다>고 배웠는데 정치부 기자의 눈에는 그들이 애국자로 보이지 않는 것은 왜일까. 그런데 그런 분들이 스스로 애국자라고 외치고 다니는, 도대체 이런 아이러니는 또 무언가.

이런 ‘요지경 정치’ 속에서 기자로서 그들 속으로 비비고 들어가, 그들에게 경쟁력 있다는 인상을 심어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나름대로 충실하려 애썼다. 국회의원들에게 만만하게 보이지 않으려 애썼고, 술도 그들보다 지지 않게 마셨다.
명색이 기자라, 취재원 사이의 긴장관계 내지는 ‘서먹서먹함’을 지켰다. 그러다보니 상처받는 일이 많아졌고 말수도 적어졌다. 또 기사는 많이 썼지만 특종은 못했고, 汝矣島 사람들을 마음으로 사귀지도 못했다. 돌이켜보면, 정치인들을 제대로 칭찬한 일도, 비난한 일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무미건조함은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된다는 생각도 든다.
싹은 키워야 하고, 잡초는 뽑아야 한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몇몇 정치인은 크게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기자가 할 일이 아니다. 기대와 기사는 다른 것이니까.
또 몇몇 정치인은 정말이지 집으로 ‘돌려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그래서 나름대로 기자정신을 번뜩여 보지만, 선거만 치르면 ‘신기하게도’ 다시 살아왔다. 정말이지 불사조가 따로 없다. 민심은 천심이라 했는데 그것도 하늘의 뜻일지도 모르지만, 글쎄 대구·경북의 발전은 더딜 수밖에 없다.

지역구 의원 중 한나라당 의원밖에 없으니 한나라당 기사를 많이 쓸 수밖에 없다.
열린우리당 한 실세는 나에게 “당신은 기자가 아니라, 한나라당 비밀당원”이라 비난하는 소리까지 면전에서 들었다. 또 선거때는 한나라당 후보를 비난하는 기사를 썼다가 “열린우리당 앞잡이” “돈 먹고 기사를 썼다”는 욕도 얻어먹었다.
어쩔 수 없다. 양쪽 모두를 충족시킬 수 없으니 욕을 얻어먹는 건 당연하다. 그래서 남들이 오래 살겠다고 비꼬기도 한다. 하지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버티는 데까지 버텨야겠지만 좀더 인간미 묻어난 기사를 쓰고 싶다는 소망도 가져본다.

2000년 9월 서울에 올라온 뒤 지난해 2월까지 주말부부를 했다.
햇수로 따지면 5년의 세월이다. 박봉이지만 주말마다 대구행 버스에 올랐었다. 길에 돈을 뿌리고 다녔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한 적 없다. 서울에 있다던 사람이 대구에 자꾸 얼굴을 내밀게 되면 행여 뒷말이 나올까봐, 대구에선 거의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가족하고만 보냈다. 주말부부를 하며 아내가 몹시 힘들어할 때 아무런 도움이 못됐지만 잘 버텨주었고, 아이들도 아빠 없이도 잘 자라주어 감사할 뿐이다.

이제 다시 지사(志士)얘기를 할까 한다. 희망을 얘기하고 싶어서다. 그렇다고 ‘정의(正義) 콤플렉스’에 사로잡히거나 일제 강점기 시절, 지사적 선배 언론인을 닮겠다는 거창한 소망도 없다.
결국 소시민의 외침이겠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표정을 닮아가는 기자이고 싶다. 아픔은 아픔대로, 기쁨은 기쁨대로 동시대 사람들의 자잘한 걱정거리와 소망을 전하는 사회적 몫에 충실하고 싶다. 그것이 지사적 기자상이 아닐 지도 모른다. 또 아니라고 해도 또 어떤가.

매일신문 정치부 김태완 기자(kimchi@imaeil.com)
(이 글은, 2005년 1월 6일 평화뉴스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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