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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없는 영혼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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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락 칼럼 15>
...“가난, 정녕 사회적 해법은 없는 것일까?”


평소 문단에서 좋아하던 한 선배 시인이 지난해 현대문학상이라는 상을 받았다. 수상자 본인도 상을 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나 역시 누가 무슨 상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을 높게 평가하거나 수상자를 평소와는 다르게 특별히 생각하지 않는다.
되레 그 상이 수상자에게 적절한 상인가를 평가해 정치적인 저의를 욕하거나 특히 무슨 상이든 상을 많이 받은 사람에 대해서는 상이 아니라 욕이라고 폄훼하기 일쑤이다.

물론 이 글도 특정인의 수상에 대해서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문단에서 <현대문학>이란 잡지는 역사가 오래된 보수적인 잡지로 알려져 있다. 그런 잡지에서 소위 진보진영의 시인이자 80년대 한 때 <노동해방문학>이란 극좌(?) 성향의 잡지 발행인이었던 그에게 상을 주었다는 게 신기하고 정말 세상이 많이 변하기는 변했는가보다는 생각을 잠시 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아마 우리사회에서 가장 변화가 느린 분야가 문단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그 문단에서조차 뜻밖에 시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럼 과연 어떤 인물이 어떤 작품으로 상을 받았을까? 작품을 보자.

헌 신문지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 진 손과 발이며 /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 미안하다 /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
또다시 낯선 당 후미진 구석에 / 순한 너를 뉘었으니 / 어찌하랴 /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 차라리 이대로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 /

어떤가 몸이여(「노숙」전문)

이 시를 쓴 시인은 김사인이다.
1955년 생으로 서울대 재학중 학생운동으로 징역을 살았고, 80년대에는 노동해방문학 발행 건으로 오랫동안 수배를 받아 쫓기기도 했다. 1982년 <시와경제>라는 동인지 활동을 통해 시인이 된 사람이다. 지금껏 『밤에 쓰는 편지』라는 시집 한 권을 낸 바 있다.

이 시의 시적 화자는 노숙자의 영혼인 듯하다.
영혼이 육체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면서 자신의 곡절 많았던 삶을 회고하는 형식이다. 이 시인에게 노숙이란 주제는 전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살아온 이력이 그랬고 그간의 문학적 관심이 그러했으니. 그러나 보수적인 현대문학사에서 이런 주제의 작품에 상을 준 것은 아무래도 의외이다. 어떻게 보면 보수적인 문학잡지에서도 어쩔 수 없이 수용할 만큼 '노숙자' 문제가 우리 사회의 과제일 수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지난 1월 말에 서울역에서 노숙자 두 사람이 숨졌다.
사인에 대해서 처음에는 논란이 있었지만 지병으로 사망했다는 당국의 발표가 수긍되는 분위기이다. 사실 어떤 부분이 미심쩍다고 한들 가족이 아니고서야 누가 그리 아들이 살펴보고 문제를 제기하겠는가? 사망사고가 있는 후 사망자의 사인을 두고 노숙자 수백 명이 서울역에서 철도공안원에게 거칠게 항의하는 모습이 티비 화면을 통해 방영되는 모습을 보면서 공포(공포의 성격이 어떤 것이든 간에)를 느낀 사람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곧이어 서울시에서는 노숙자들의 강제수용을 검토한다는 기사가 흘러나왔다.

사실 노숙자들이 서울역 주변에서 일반인들에게 끼치는 피해가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비교적 서울을 자주 가는 사람인데 서울역에서 한참씩을 서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철도공안원들이 정말 수고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어떤 경우는 술에 취해 욕설을 하는둥 거의 통제불능의 행패를 부리는 노숙자도 여럿 보았다.

어떻게 보면 노숙자들은 서울시가 강제로 격리수용하기 전에 이미 격리 수용된 사람이다.
냉혹한 자본주의체제가 이미 그들을 체제 밖으로 밀어냈다. 체제에서 일탈한 그들은 가족과 주위 이웃으로부터 철저히 익명화 된다. 그 익명화 된 존재들이 서울역 부근과 조금이라도 더 따뜻한 공공건물 주변을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뿐 아니라 대구도 마찬가지이다.

한 통계를 보니 지난해 전국적으로 노숙자 수가 4천여 명, 거리 노숙자가 1천여 명이다.
대구지역에도 다섯 개의 시설에 2백여 명이 수용돼 있고 거리 노숙자도 수십 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피부로 느끼기에는 훨씬 더 많은 숫자이다.

시인 랭보는 이 지상에서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겠느냐고 탄식했지만, 이들만큼 큰 상처를 입은 영혼이 이 지상에 흔하지 않을 것이다. 연말이 되면 특정 재벌 전자회사에서 천문학적인 수입을 얻어 자기들끼리 풍요하게 이익을 배분한다는 기사가 신문 지면을 장식하고, 최근에는 서울 강남의 초호화 아파트에서 자녀들을 이웃에 있는 가난한(?) 초등학교 취학 거부문제로 여론의 주목을 끈 바도 있다.

이제 며칠 후면 설날이다. 올해도 3천만 명 이상이 귀향행렬에 동참할 것이라고 한다.
이 때 이들은 어디에 가 있을 것인가? 이들의 빈자리를 고향의 부모형제 친구들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들을 두고 우리사회의 빈부 차나 사회보장제도, 안전망 구축 운운이라는 상투적인 말로 끝내기에는 너무 참담한 현실이다. 정녕 사회적 해법은 없는 것일까?
김용락(평화뉴스 칼럼니스트. 시인. [대구사회비평] 발행인. 경북외국어대 교수)






* 1959년 경북 의성군에서 태어난 김용락 시인은, 지난 '84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등단한 뒤 <푸른별>, <기자치소리를 듣고 싶다>, <민족문학논쟁사연구>를 비롯한 다수의 시집과 평론집을 펴냈으며, 지금도 [민족문학작가회의] 대구지회장을 맡아 시인과 문학평론가로 많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대구일보] 논설위원과 [대구참여연대] 편집위원장을 지냈으며, 2002년부터 계간 <대구사회비평>을 펴내고 있습니다. 또, [경북외국어대학교] 국제학부 교수로 재직하며 [CBS대구방송]의 <라디오 세상읽기>도 매일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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