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언니들을 만난 것은 2002년 여름, 탈성매매 여성들을 위한 ‘새움터’라는 기지촌의 작고 허름한 공간입니다. 어느 거리에서나 나와 어깨를 스치며 지나갔을 ‘언니’들을 대면한다는 것이 나에겐 새삼스런 두려움이었습니다.
내가 만난 언니들은 여느 사람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어떤 것의 다름을 기대했던 걸까요? 어쩌면 나를 두렵게 했던 것의 정체는 내가 ‘다름’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과 ‘나’는 결코 구분되어질 수 없는 가부장제 사회의 ‘여성’이라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해 여름(지금도 여전히), 기지촌의 거리에는 필리핀, 러시아... 가난한 나라에서 유입된 성매매 여성들이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거리에서 ‘새움터 현장활동’을 나온 대학생인 나는 그녀들과 분명 구분되어 졌습니다.
하지만, 포르노그라피와 성폭력, 성매매가 난무하는 거리에서 나는 그리고 당신은 그녀들과 영원히 구분되어 질 수 있을까요? 여성이 ‘몸’으로 ‘섹스’로 환원된 거리에서 누군가 나를(당신을) 사고자 흥정할 때, 누군가 나를(당신을) 강간하고자 할 때, 나와(당신과) 그녀들은 어떻게 구분되어 질 수 있을까요?
성폭력과 성매매가 가능한 거리에서 선택이나 자발성은 이미 여성인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권리가 아니니 말입니다. 그렇게 기지촌의 거리에서 내가 대면한 것은 이 가당치 않은 ‘가름’을 강요하고 있던 내 안의 그리고 이 사회의 이중 잣대와 폭력성이었습니다.
"가부장제 규범 하의 인권"
나는 요즘 어느때보다 ‘인권’이라는 이름의 주장을 많이 접하고, ‘인권’에 대한 수많은 엇갈림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2004년 9월 23일 성매매방지법이 시행되었습니다. 그것을 두고 ‘9.23 테러’라고, ‘9.23 계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매매의 폭력성을 그렇게 외쳐댈 땐 반응하지 않던 사람들이 공격적으로 ‘어디 할 말이 있다면, 해보라’고 말하기를 강요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먼저 말해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런 9월이라면 얼마든지 와도 좋다!
누군가 물어온 적이 있습니다. “군산 대명동에서 개복동에서 수많은 성매매여성들이 죽어갔습니다. 만약 어느 공장에서 감금당한 노동자들이 화재로 14명이나 숨졌다면, 세상이 이리도 조용했겠습니까?”
성매매의 구조 속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도 침묵으로 일관했던 바로 그 입으로 ‘성매매 방지법이 인권을 침해한다’고 아우성치는 사회에서 여성의 권리는 인권의 범주에 속해있지 않았던게 아닐까요? ‘성매매는 여성문제가 아니라 인권문제’라고 동어반복해야만-누구도 ‘이것은 군인의 문제가 아니라 인권의 문제’라고 표현하진 않습니다- 보편적인 문제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선 ‘9월’ 이전에도 이후에도 여성의 권리는 여전히 인권의 범주 밖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9월’ 이후에 ‘그녀’들은 비로소 사회의 관심과 얼마간의 제도적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몇 번이고 이런 9월을 더 맞이해야만 합니다.
당신이 만약, 여성이 인간의 범주에 속하고, ‘인권’이란 것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마음깊이 동의하신다면, 이제 이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남성들의 신체자유와 행복추구권을 위해 성매매를 보장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말에는 ‘여성의 인권을 담보로’라는 문장이 은폐되어 있습니다. 여성의 ‘몸’이 남성의 ‘필요’에 의해 얼마든지 물화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는 주장의 섬뜩한 폭력성은 폭로되어야 합니다.
한편에선 주어를 바꿔 성매매 여성의 이름을 빌러 성매매방지법을 반대하기도 합니다.
‘성매매 여성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인권침해적인 법’이라고. 이 주장은 노예의 생존권을 위해 노예제를 유지하라는 말과 같지 않습니까? 적어도 우리가 자신의 ‘몸’이 ‘자아’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것을 분리해서 상품으로 제조하고 거래할 수 있다는 발상의 폭력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매매는 인권을 매매하는 행위입니다. 생존을 위해 인권을 유린당하는 조건을 유지시켜야 한다는 것이야 말로 기만적인 인권침해이지 않습니까?
“변화의 중심은 당신입니다”
성매매 여성의 현실이 너무나 특수해서 보편적인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여성’과 ‘인권’이라는 보편적인 질문에서부터 ‘성매매’와 마주서있습니다. 물론 성매매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폭력적인 상황들은 내가 다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방적인 성관계가 정상화된 사회에서 폭력은 결코 특수한 상황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폭력을 온전히 비껴갈 수도 없습니다. 폭력을 방치하고서는 우리가 폭력의 가해자나 피해자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은 없습니다.
2004년 9월의 법은 급진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오랜 기간 누군가의 끈질긴 노력이 있었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좀 더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와야 합니다. 우리의 가부장적인 행위의 변화 말입니다. 마음 속 깊이 ‘음성화된 성매매는 나쁘고, 양성화된 성매매는 문제없다’고 생각하고 있진 않습니까? 폭력적인 상황에 놓인 사람에게 자발성을 묻고 있진 않습니까? 인권을 거래하면서 생존해야하는 상황을 방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떤 이를 폭력으로 내몰면, 어떤 이는 폭력으로부터 안전할 것이라고 계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어떤 하나의 권리를 위해 다른 하나의 권리를 착취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우리의 내면에서부터 나와야 하고, 우리의 행동에서 구체화되어야 합니다. 변화의 중심은 당신입니다. 어떤 형태의 성매매도 종결되고, 성매매여성의 자발성을 되묻는 법조항이 바뀌고, 자신의 권리를 거래하지 않고서도 생존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착취의 가능성이 사라지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입니다. 성매매 없는 세상이 가능할까? 되물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 가능성의 중심은 당신이기 때문입니다.
영숙(사회당)
영숙씨는 2003년 사회당 대구시위원회 여성부장을 거쳐 2004년부터 성매매 현장방문상담 자원활동가로 뛰고 있으며, 혈통주의를 거부한다는 의미에서 성(姓)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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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기획 - 성매매 없는 사회 만들기>는,
[성매매 없는 사회 만들기 대구시민연대(34개 단체)]와 [평화뉴스]가 함께 마련해
2004년 12월 23일 첫 글을 시작으로 오는 2005년 2월 25일까지 모두 10차례 이어집니다.
우리 사회의 올바른 성문화와 인권을 위한 이 기획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 글 싣는 순서 -
차정옥(12.23), 강세영(12.30),
안이정선(1.6). 김희진(1.13). 김동옥(1.20).
박정희(1.27). 김양희(2.4). 영숙(2.11). 윤종화(2.18). 이두옥(2.25)
대구경북 인터넷신문 PN<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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