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고 있자면 정말 염치를 상실한 시대가 됐구나하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아니 염치라는 게 어쩌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을 나만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든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은 경북 의성 단촌면이다. 동네 앞 거랑(강과 개울의 중간 정도를 나타내는 내(川)의 사투리) 하나만 건너면 안동이다. 의성이고 안동이고 모두 범칭 안동문화권인데 바로 유교문화가 승한 곳이다.
나는 이 문화권의 영향을 많이 받았구나 하는 생각을 나이가 들수록 많이 하게 된다. 외가가 안동이고 초중등학교를 안동에서 다녔다. 하지만 나는 소위 뼈대 있는 가문출신이 아니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양반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보학(譜學)을 따지면 곧바로 거부감부터 생긴다.
안동 출신의 유명한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도 안동 양반 말만 꺼내도 질색이다. 흔히 하시는 말로 “안동 양반이 한 게 뭐 있노? 종놈 등쳐먹은 것 외에”라고 하시고, 안동 출신 이육사 시인에 대해 퇴계 후손인데 그런 것(반상 구분) 중뿔나게 안 내세우고 독립운동하고 저항문학 한 것에 대해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중뿔나게 : '유별나게'의 뜻을 가진 경북 북부지방 사투리)
안동문화권 중 기릴만한 것으로 내게 가장 인상적인 것이 ‘염치’이다.
이 문화권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나는 어릴 때부터 어른들에게 염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안동 특유의 말로 ‘까이’라는 게 있는데 일종의 자존심 같은 것이다. 잘난 자들에게 비굴하지 않고, 못난 사람에게 으스대지 않는 일종의 자존심 내지 염치 같은 것이다. 공명정대하게 처신하라는 이야기인 셈이다. 어릴 때 어머니로부터 남자는(혹은 사람은) ‘까이’가 있어야 된다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듣고 자랐다.
멀리 이기준 교육부총리까지 갈 것도 없이 최근 이헌재 경제부총리, 최영도 인권위원장의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낙마한 사실을 지켜보면서 치부(致富) 앞에는 보수, 진보 가릴 것이 없구나하는 낙담이 컸다. 이헌재 씨는 이전부터 여러 가지 의혹사안에 얽혀 관료로서 굴절을 겪은 바 있는 인물이니 더 말할 나위도 없고, 민변 회원에다 참여연대 고문까지 지낸 사람조차 위장전입으로 부동산을 거래했다는 사실은 현재 한국사회의 도덕 지표가 어느 정도인지 능히 짐작이 간다.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나온 여론의 일각 중에 당시 여윳돈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동산을 했을 것이라는 말과, 너도 돈 있었다면 안 했겠나 같은 논리도 있었다. 돈 있어서 부동산 했으면(그것이 비록 합법적이라고 하더라도 과도한 경우도 해당한다) 아예 고위관리로 나설 생각을 말아야지 돈도 벌고 남 앞에 서서 일까지 하겠다니 이게 무슨 몰염치인가!
그리고, 여윳돈 있어도 그게 서민들 죽이고 나만 좀 더 살겠다는 극히 치사한 행동이라 생각하고 부동산 안 한 사람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부동산으로 수 억원 챙겨 좀 더 큰 집, 큰 차, 아이들 외국유학 보낸들 과연 그게 그렇게 장한 일이 될 수 있을까? 주택 보급율이 100%가 넘었지만 집 없는 사람이 여전이 국민의 절반이 넘는 우리나라 실정에서.
문제의 또 한 가닥은 이들 관료를 보는 청와대의 시각 또한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몰염치의 한 수준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이다. 경제 회생을 이유로 이헌재 씨 사표를 미루었다. 그렇다면 경제를 위해서는 도덕적 해이도 용인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욕할 근거를 잃게 된다. 경제 활성화해서 잘 살게 해주었는데 그깟 인권탄압 좀했기로 뭐가 문제가 된단 말인가.
더욱 가관인 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태도이다. 해일에 장수가 쓸려가니 어쩌니 하면서 마치 이헌재는 잘못 없는데 여론 재판으로 물러나는 것처럼 말하면서 반드시 사실(팩트)를 밝혀내겠다고 서슬 퍼렇게 난리를 쳤다. 하지만 이헌재 씨의 부동산투기 관련 사실이 여론재판인지 사실인지 밝혔다는 소문은 아직 듣지 못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염치없는 경우인가.
최영도 씨 역시 마찬가지이다. 문제가 있으면 곧바로 물러나면 될 것을 자리에 미련을 보이다가 결국은 친정인(?) 참여연대의 차가운 외면을 받고서야 사표를 낸 것을 보면, 나이 들면 사리분별이 흐려지고 탐심이 생긴다는 옛말이 하나도 그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청와대 민정수석인 문재인 씨는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위장전입 투기의혹을 검증했지만 오래된 일이고 이후 헌신적 사회봉사를 고려했다(연합뉴스 3. 19)는 답변 역시 몰염치의 한 수준이다.
본의 아니게 실수하고 이후 참회하거나 사회에 헌신하면 문제가 없다는 발상도 한 나라의 지도자급 인물의 사고방식으로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한 때 먹고살기 어려워 실수로 범죄 저지르고 현재 뉘우치고 사회봉사하는 모든 잡범들을 우선 사면하는 게 도리에 맞지 않을까? 그들은 배가 고파서 범죄에 손을 댔는데 더욱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지 않은가.
이들 못지않은 몰염치의 압권은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다. 서울 한 복판에 800억 원을 들여서 자택을 짓는다고 해서 물의를 빚더니, 스위스엔가 어디 스키장을 통째로 빌린다고 난리를 쳐서 해외에서 조차 조롱거리가 된 모양이다. 한 발짝만 거리에 나서면 노숙자와 실직자가 득시글거리는데 과연 800억 원짜리 집에서 잠이 편하게 온다면 이게 과연 사람의 양심일까?
재벌의 멘탈리티야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사실 많은 국민들이 노무현 참여정부에 대해서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이전의 역대 늙은 정부와는 달리 국가경영에서 뭔가 새로운 틀을 짜고 새로운 도덕과 철학으로 나라를 이끌어 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이번 고위관료 인사를 지켜보면서 많이 낙담했다. 믿었던 이 사람들도 참 염치가 없는 사람이구나. 어렵게 산 사람도 권력을 획득하면서 옛일을 잊어버리고 역시 쉽게 염치없는 사람으로 변질되는가보다 하고 생각하니 갑자기 삶이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이렇게 염치없는 자들을 질타하는 글을 쓰면서 나 또한 염치없는 인간은 아닌가 자신을 돌아보니 갑자기 온 몸이 꽁꽁 얼어붙는 기분이다.
김용락(평화뉴스 칼럼니스트. 시인. [대구사회비평] 발행인. 경북외국어대 교수)
* 1959년 경북 의성군에서 태어난 김용락 시인은, 지난 '84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등단한 뒤 <푸른별>, <기자치소리를 듣고 싶다>, <민족문학논쟁사연구>를 비롯한 다수의 시집과 평론집을 펴냈으며, 지금도 [민족문학작가회의] 대구지회장을 맡아 시인과 문학평론가로 많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대구일보] 논설위원과 [대구참여연대] 편집위원장을 지냈으며, 2002년부터 계간 <대구사회비평>을 펴내고 있습니다. 또, [경북외국어대학교] 국제학부 교수로 재직하며 [CBS대구방송]의 <라디오 세상읽기>도 매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2005년 3월 22일 <평화뉴스> 메인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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